본문 바로가기

行間/돈 안되는 정치

진보정당을 생각하면서

반응형

홍세화 선생의 컬럼을 보았다.

진보정당이 언제부터 선거 결과에 그리 민감하였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과거 민노당 시절 준비도 안된 어린아이에게 사탕 몇 알을 안겨주니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때는 주었는데 지금은 왜 안주는 거지. 그때보다 나이도 먹었으니 더 큰 사탕을 주겠지 라고 맘을 먹고 있는데 주는 이는 너는 나이가 먹었으니 사탕 먹을 때가 지났다고 말하며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이다.
좀 더 칭얼 되어야 하는건지 아니면 목소리가 작은 것 같으니 어제까지 등지던 옆집 아이와 목소리를 합쳐서 칭얼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워 하는 형국이다.

지난 지방선거가 끝나고 그동안 안고 있는 진보신당내의 문제점을 김규항이 먼저 말한다. 거기에 거론된 진중권이 답한다.
둘은 당적을 가진 자유주의자, 예수를 파는 사회주의자라 칭한다.

진보신당의 정체성에 관한 논쟁이라 생각된다. 누가 더 왼쪽이냐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왼쪽의 관점은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다. 정체성 논란이 지속되면 당의 분열은 불을 보듯 뻔하다.

지나고 보니 민주노동당이 막연히 생각하던 진보정당일거라 생각했고 거기서 원조 민주노동당이 탈당하여 (내몰리어) 만든 진보신당(참 이름 맘에 안든다)이 또 생각하던 진보전당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와 생각하면 아닌가베. 이런 생각이 자꾸든다.

진중권의 말처럼 진보신당에 여러가지 생각의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당이란 정강이 있고 그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한나라, 민주 ... 여러 정당 처럼 그때 그때 만드는 것이 아닌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지난 선거에서도 진보신당 후보가 노무현 전 대통령(예전에는 노통이라 했지만)의 유지를 받든다는 유세를 들었다. 나는 이게 맞는 말인지 참으로 궁금했다. 직접 아는 처지가 아니니 물어 볼 수도 없고 하지만 참으로 무슨 생각으로 그런 유세를 했는지 궁금했다. 지금은 더 궁금하다. 진짜 그런 생각인지....

진중권이나 김규항이나 같은 집안은 아닌것 같은데 나같은 외부인이 볼때는 집안 싸음처럼 보인다.
없는 집안이 씨끄러우니 예전에 쫒겨난(이러면 너무 비굴해 보이니 뛰쳐나온이라 말하자) 집에서 그냥 들어와서 같이 살자고 한다. 이런 젠장... 내가 왜 이리 호가 나는 걸까? 개뿔.

덧붙임_
제목을 진보신당을 생각하면에서 진보정당을 생각하면으로 바꾸었다. 진보신당이 진정 이땅의 진보정당을 대변할 위치가 되는지의 고민을 위한 것이다.

덧붙임_둘
링크만 다는 것이 옳지만 조금지나면 유실됨을 염려하는 맘으로 옮겨놓으니 너그러운 이해 바랍니다.
굳이 문제가 된다면 삭제 하겠습니다.


[홍세화칼럼] 외유내강의 정치

외유내강의 뜻을 “대외적 유연성에는 내강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풀어도 될 것이다. 지난 6·2 지방선거 과정에서 진보신당은 내강 없는 정당임을 드러냈다. 원칙도 일관성도 없었고, 대외적 유연성이라고 할 수 없는,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 국민이 판단하기 전에 당원들이 먼저 검증, 토론, 의결하는 진보정당만이 갖는 긍정성도 발휘되지 않았다. 선거가 끝나면서 ‘통합’ 이야기가 불거지는 것도 선거공학적 계산만 있을 뿐, 기본과 원칙에 충실한 일상의 정치에 대한 내강이 없음을 반영한다.

한나라당 독주 구도를 흔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나 또한 오해를 사기도 했는데 그런 유연성은 주로 선거 국면에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선거를 마치자마자 통합을 말하고 있다. 자신이 몸담은 정당, 강령에 기초한 진보정당의 존재이유를 부정하는 일이다. 특히 민주노동당에서 분리되어야 했던 배경과 이유에 관해 유연성을 보이는데, 그야말로 ‘내강 없는 외유’의 전형이다.

항용 정당의 존재이유를 권력 쟁취에 둔다. 하지만 진보정당은 거기에 몰입해선 안 된다. 권력 쟁취에만 목적을 둘 때 선거에만 치중하게 되고 그 결과에 연연함으로써 새로운 사회를 위한 끊임없는 모색이며 실천으로서 일상의 정치를 실종시킬 위험이 있다. 진보신당은 과연 사회적 발언을 하지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나 농민, 영세상인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일상의 정치를 보여주었는가. 가령 트위터는 보수 양당 체제인 미국에서 유효한 소통 방식으로 우리는 거기에 머물러선 안 된다. 마포 ‘민중의 집’과 같은 ‘희망의 기지’가 다른 지역에 뿌리내리지 못하거나 비정규직 노동자 연대사업이 지지부진한 이유 중에 선거 대응 중심의 당 활동이 있지 않은지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진보정당에게 선거는 장기적 정치비전에서 비롯된 일상의 정치가 국민에게서 평가받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선거 결과나 당 지지율에 지나치게 연연하고 흔들린다. 총선과 대선, 지방선거로 거의 2년마다 선거가 있는데, 2년마다 흔들리는 정당이라면 진보정당으로 뿌리내릴 수 없다. 중장기 정치전략이 있을 수 없고 강령은 휴짓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진보는 어렵고 불편하며 특히 느린 것인데, 다시금 통합 논란으로 세월을 보낼 참인가.

마치 권력과 선거 바깥에는 정치가 없는 듯 진보 정치인들조차 권력과 선거에 집착을 보이는데, 여기에는 레닌주의의 함정만 작용하는 게 아닌 듯하다.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옆의 사람이다.” 톨스토이가 남긴 문답 중 하나다. 가족, 동료, 이웃 등 일상의 삶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 가장 소중하다는 점을 누가 모르겠는가. 진보정당에서 당원이 가장 소중하듯이. 사람의 눈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외부 정면을 향한다. 내부를 향하지도 않고 아래를 향하지도 않는다. 내 눈이 나의 내면을 바라보지 못하듯이 내가 서 있는 자리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옆에 있는 소중한 존재에게 홀대하는 대신 저 너머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거나 새로운 관계를 기대한다. <한겨레>가 기존 구독자들을 소중히 여기기보다 앞으로 구독할 대상에게 관심과 비용을 더 들이듯이, 우리 각자 또한 이미 형성한 만남에 성실하면서 존재와 관계의 성숙을 모색하기보다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긴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진보신당이 내강하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 점에 있지 않을까.

통합을 말하기 전에 강령을 다시 읽어볼 일이며 무엇보다 서로 존중할 일이다. 자신의 기반인 정당과 당원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국민을 존중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몸담고 있는 절집이 너무 작은가. 그래서 품은 뜻을 펼치지 못하겠다는 스님, 스스로 ‘큰스님’이라고 믿는 분은 큰 절집으로 떠날 일이다.


[야!한국사회] 오류와 희망 / 김규항 (2010.06.16)

진보신당의 지방선거 결과는 참담하다. 노회찬씨가 3% 남짓의 표를 얻고 심상정씨는 아예 선거 직전 사퇴했다. 두 사람은 지난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낙선했지만 이번보다는 나았다. 진보신당의 사정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대체 왜일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나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대중성 강박으로 인한 ‘프레임 오류’에 있다고 본다. 물론 모든 정치는 대중성이 중요하며 분당을 통해 만들어진 진보신당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진보신당의 대중성은 진보정당으로서 최소한의 정체성을 지키는 한도 안에서만 중요하다. 그걸 넘어서버리면, 다시 말해서 당장의 대중적 호응에 집착해 자유주의적 의제에 몰입해버리면 대중들은 ‘굳이 진보신당을 지지할 이유’를 잃게 된다.

한나라당 같은 극우정당 혹은 민주당·국민참여당 같은 자유주의 정당은 애써 그 정체성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두 세력은 이미 반세기 이상 독재/반독재 혹은 여야로 존재해왔고 대중들은 어쨌거나 그 정체성에 매우 익숙하다. 그러나 진보신당은 그 정체성을 대중에게 처음부터 설명해야 한다. 자신들의 정치가 기존의 반독재/민주세력과 어떻게 다른지를, 굳이 자유주의 정치가 아니라 진보정치여야 하는 이유를 말이다.

그러지 않으면 기존의 구도가 몸에 밴 대중들은 당선 가능성도 적은 그들을 굳이 지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좋은 뜻에서든 나쁜 뜻에서든 많은 사람들은 완주한 노회찬씨는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켰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노회찬씨 역시 제 정체성을 지켰다고 하긴 어렵다. 이를테면 선거 직전에 열린 그의 인터넷 토론은 시종 오세훈 조롱 경연으로 일관했다. 오세훈을 막는 게 그리 전적으로 중요하다면 당연히 한명숙을 찍어야 한다는 말 아닌가?

그 토론은 ‘한명숙이 아니라 굳이 노회찬이어야 하는 이유’에 집중되어야 했다. “반이명박 반이명박 하는데 당신들 집권했을 때 서민과 노동자 입장에서 이명박과 뭐 그리 달랐습니까?” “부자정권 비판하는 당신들은 삼성공화국 만들지 않았습니까?” “새만금 삽질한 사람들이 4대강 삽질 욕해도 되는 겁니까?” 등등으로 말이다.

그 에피소드는 대중성 강박에 빠진 진보신당이 보여온 무수한 프레임 오류 가운데 한 예일 뿐이다. 심지어 진보신당은 진중권씨를 비롯한 진보신당 당적의 자유주의자들이 그나마 진보신당의 정체성을 간직한 ‘전진’ 같은 그룹을 마치 스탈린주의자들이라도 되는 양 마구잡이로 조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 자유주의자들이 촛불광장에서 활약한 덕에 당원이 늘었다지만, 그렇게 입당한 사람들은 지금 진보신당을 아예 자유주의 정당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2008년 11월 노무현씨가 “한-미 에프티에이 재협상을 준비할 때”라는 내용의 글을 인터넷에 올리자, 심상정씨가 “민초들이 노 전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건 이명박 정권에 대한 ‘재협상’ 훈수가 아닌 한-미 에프티에이 체결에 대한 고해성사”라는 글을 올리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노무현씨의 중단으로 논쟁이 끝까지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내가 기억하기론 진보신당 역사에서 그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또렷한, 아니 거의 유일한 사건이었다.

바로 그런 사건이, 극우와의 싸움뿐 아니라 자유주의자들과의 경쟁이 진보신당의 주요하고 일상적인 활동이 될 때 비로소 대중들이 ‘굳이 진보신당을 지지할 이유’가 생겨난다. 그렇게만 된다면 진보신당은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진보신당엔 자유주의를 진보정치라 강변하는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라 제 정체성을 간직한 당원들, 사민주의적 전망으로 이 추악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진지한 당원들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대중성과 정체성 (2010. 06.24)

(인터뷰집에서 진보신당 관련한 부분을 발췌해 싣는다. 근래 자유주의와 좌파에 대한 내 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진보신당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진보신당은 민족주의자들과의 결별 후, 즉 분당 후 계급적 경향을 좀 더 분명히 할 거라는 예측과는 달리 자유주의적인 코드가 있는 사람들과 결합하면서 오히려 우측으로 가버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요.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엇보다 ‘대중성 강박’ 때문이죠. 좌파가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려면 대중성이 중요하죠. 대중성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스타일에 매몰되어 계속 고립되어가는 좌파들에게도 회의적입니다만, 좌파가 대중성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봅니다. 진보신당의 문제가 그렇다고 보는데요. 특히 촛불집회 등을 거치면서 그런 경향이 매우 심해졌어요. 진보신당 홍보대사인 진중권 씨가 반이명박 싸움에서 대중적 인기를 얻는 건 진보신당에 유익할까요, 아니면 해가 될까요? 매우 안타깝지만 나는 후자라고 봅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당적이 어디인가와는 별개로 자유주의적인 의제를 가지고 벌이는 싸움의 성과는 전적으로 자유주의 진영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아무리 진중권 씨가 대중적인 인기를 많이 얻어도 그 인기가 자유주의 의제로 생긴 거라면, 말하자면 이명박 정권의 비판으로 생긴 거라면 그 성과는 결국 자유주의 진영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그런 대중적 호응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민주당 같은 자유주의 정당과 진보신당의 구분은 사라져버리는 거죠.

진보신당에 입당하는 사람들이 늘기도 했지 않습니까?

물론 일부는 진보신당의 지지나 입당으로 나타나기도 했는데요. 그 역시 진보신당의 자유주의화로 귀결된다고 봅니다. 사실은 민주당이나 유시민 전 장관을 지지해야 할 사람들이 잘못 들어간 셈이니까요. 당원은 조금 늘어났지만 당의 정체성은 흐려진다고 봐야죠. 촛불집회 즈음에 진보신당에 새로 입당한 당원들이 계급이나 사회주의 같은 걸 폐기하자는 식의 주장들을 했는데요. 그게 바로 그런 현상의 일각이죠. 그런 식으로 진보신당 당원이 세 배로 늘어났다면 아마 강령도 다 바뀌었겠죠. 자유주의 정당이 되는 거니까. 진보 정당이란 앞서 말했듯이 세상을 민족이나 국가가 아닌 계급으로 보는 관점을 기본으로 하는 정당이고, 자본주의의 모순을 넘어서는 세상을 만들려고 움직이는 정당이잖아요. 계급과 사회주의적 지향을 폐기하면 더 이상 진보 정당이 아닌 거죠.

원론대로라면 너무나 간단한 이치인 것 같은데요. 현실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진보 정당의 지지나 표는 자유주의 세력과 경쟁해서 얻는 거잖아요. 전략이나 전술이 아니라 이치가 그렇습니다. 보수 세력의 표는 진보 정당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자유주의 세력과 진보 세력이 가지는 표의 총량은 일정합니다. 그 총량 안에서 자유주의 세력이냐, 진보 세력이냐 하는 거죠. 그런데 진보 세력은 자유주의자들이 하는 싸움만 하고 있으니 몫이 줄어들고 갈수록 죽을 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죠. 언제였더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쯤이었을 겁니다. 심상정 전 의원이 인터넷상에서 노 전 대통령과 두세 번 토론을 했어요. 일시적인 일이라 많이 알려지
진 않았는데 그때 진보신당 지지율이 며칠 만에 갑자기 올라갔어요. 당직자들도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진보신당의 표는 자유주의자들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잘 말해주는 예라고 할 수 있어요.

아, 그 당시 저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반이명박 싸움이라는 게 자유주의 세력에게는 그 자체로 목표가 되지만 진보 세력에게는 자유주의 세력과의 싸움을 위한 준비인 거죠. 물론 구舊좌파적인 구호나 스타일을 고수하자는 건 아닙니다. 노동형태나 사회구조도 많이 달라졌어요. 진보 세력이 얻어야 할 것은 새로운 세상에 맞는 진보적 상상력이지, 진보적 상상력을 버리고 자유주의 세력으로 전향하는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세상과 상상력을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고 있는 거죠.

한국의 진보적인 인텔리들이‘계급’이라는 말에는 알레르기가 심합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현재 한국의 진보 진영의 문제는 계급의식의 결핍에 있습니다. 과잉되어서 생기는 문제 같지는 않아요. 물론 계급만 말하면서 아무 것도 상상하지 못하는 구좌파들이 있긴 한데요. 그건 버려야 할 편향일 뿐입니다. 계급을 말하는 방식과 스타일의 낙후성을 계급 자체와 동일시하면 안 되는데요. 그들은 동일시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의 숙제는 계급을 어떻게 말하는가에 있는 것이지, 계급을 말하지 않는 데 있는 게 아닙니다. 계급을 말하지 않을 때 좌파는 좌파 명찰을 단 자유주의일 뿐이죠.

계급이라는 게 세상을 보는 어떤 특정한 방식이나 관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결국 같은 이야기인데…, 좌파라는 사람들조차도 계급 이야기를 하면 세상을 보는 낡은 방식인 것처럼 반응하기도 해요. 계급이라는 건 방식이나 관점이 아니라 그냥 사실입니다. 왜 그렇게 세상을 계급적으로만 보냐고 하는 사람에게, 그럼 당신 아버지와 이건희 씨가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냐고 물어보면 얼버무립니다. 다들 양극화가 문제라고 말은 하잖아요. 양극화라는 게 뭡니까? 계급적 격차가 심각하게 벌어진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양극화라고 말하면 수긍하면서 계급이라고 말하면 알레르기를 보이죠. 물론 이건 이데올로기 공작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옛날엔 계급이라고 하면 잡아 죽이면 되었는데 이젠 정치적으로 민주화되어서 그럴 수가 없어요. 그러니 계급이라는 말을 쓸모없는 말, 사실과는 무관한 어떤 편협한 말로 만들어버리는 거죠. 그리고 옛날처럼 국가주의나 애국심을 말하는 게 아니라 ‘노동의 변화’나 ‘디지털 시대엔 계급이 사라진다’와 같은 요상한 소리들로 계급을 말하지 못하게 하죠. 대중들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좌파라는 사람들이 그런 소리를 따라하는 걸 보면 참 딱합니다. 노동의 변화도 디지털 시대도 맞아요. 하지만 여전히 계급은 존재합니다. 오히려 그 격차와 모순이 더 벌어지고 있죠. 계급은 그냥 현실입니다. 더 이상 계급을 말하지 않는다는 건 더 이상 현실을 말하지 않는 것과 같아요.

진보와 좌파가 자기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런 점은 무척 안타깝습니다.

예. 현재 가장 보편적인 구분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현재 행태로서 신자유주의입니다. 반독재도 아니고, 정치적 민주주의도 아니고, 신자유주의입니다. 그러면 경계선이 분명해져요. 김대중, 노무현, 유시민 모두 확실하게 구별이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거죠. 중국공산당이 국공합작할 때 국민당한테 흡수되는 것 봤어요? 일단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친 다음 국민당하고 싸웠잖아요. 그래서 결국 적화했어요. 그런데 한국의 진보 세력은 일본과 싸우기 위해 국민당으로 흡수되는 꼴입니다. 진보 정당 하나가 사라져도 진보 세력은 남습니다. 하지만 진보 세력이 자기 정체성을 잃는다면 그건 진보가 완전히 사라지고 마는 겁니다.

한국에서는 왜 그렇게 자유주의 경향이 돋보인다고 보십니까?

세상이 달라졌다, 새로운 디지털 시대의 좌파다, 이런 여러 이야기들을 하는데요.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삶의 변화와 좀 더 관련이 있다고 봐요. 더 이상 초라한 자취방에서 살지 않고, 더 이상 풍찬노숙하며 광야에서 운동하는 게 아닌 거죠. 언론계든 정치계든 대학이든 주류 사회에 발을 걸치고서 직함도 하나 있고, 소주만 마시다가 와인과 위스키를 마시고, 돈이 들어가는 취미생활을 즐기죠. 이런 달라진 생활을 포기하거나 되돌리고 싶지 않은 겁니다. 만약 계급 이야기를 꺼내면 그런 안락한 삶이 자꾸만 불편해질 게 분명합니다. 자유 시장을 반대하기도 어렵지요. 자신이 그 시장 체제에서 꽤 높은 소득을 올리니까. 그러니 자신들의 삶에 맞춰진 진보가 필요한 거죠. 그래서 ‘디지털 시대의 진보’나 ‘현실적인 진보’라는 이름의 괴상한 행태로 나타나는 겁니다. ‘한국적 진보’라고 안 하는 게 신기해요.(웃음) 처음엔 운동을 하던 집단이 김대중이나 노무현 정권 쪽으로 가면서 그런 행태가 나타났다고 보는데요. 그 방향으로 나아간 386들이 처음 그런 현상을 보이더니, 이제 점점 더 왼쪽으로 침범해서 결국엔 진보신당에서도 그런 모습이 나타납니다.

솔직하지 못하다고 보는 건가요?

그렇죠. ‘난 이제 먹고 살 만하다, 그래서 더 이상 계급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차분하게〈한겨레신문〉이나〈경향신문〉보면서 촛불집회 나가고, 그렇게 진보적 경향을 가진 자유주의자로 살고 싶다’이렇게 솔직하게 말하고 소신껏 살면 문제될 게 없잖아요. 더 이상 좌파로 살지 않는다고 누가 욕하는 것도 아닌데 왜 억지를 부리는지 모르겠어요. 순진한 대중에게는 이명박 정권에 딴죽을 거는 것으로 눈속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묵묵히 활동하는 진짜 좌파들이나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는 겁니다. 보는 사람도 불편하고 자신도 몹시 불편할 텐데 말입니다.

영국의 노동당도 표를 얻기 위해 우측으로 갔는데요. 집권을 했지만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되는 겁니다. 무서운 일이죠. 모든 게 다 그래요. 〈롤링 스톤〉이 주류 잡지가 되기 위해 뉴욕으로 옮겼어요. 그런데 이후에 자기 색깔이 흐려지지 않았나요? 〈한겨레신문〉이 경영상의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여러 사업을 벌이고 있어요. 그중엔 정체성을 해치는 것들도 있어요. 그렇게 해서 운영에 도움이 되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런 것들이 결국 ‘한겨레’를 ‘한겨레’가 아니게 만드는 거죠. 중요한 건 정체성입니다. 껍질이나 외형이 커지는 게 무작정 나쁜 건 아니지만 껍질과 외형이 커질수록 정체성이 흐려지는 경향도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됩니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래요. 남녀가 단칸방에서 알콩달콩 고생할 때보다 우아한 침실이 딸린 저택에서 살 때 오히려 애정이 없어진다거나, 작가가 근사한 집필실을 가지게 되면서 더 이상 걸작을 쓰지 못한다거나, 자전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자전거 가게를 차리면 오히려 자전거 탈 시간이 없어진다거나… 아, 이건 아닌가?(웃음)


[진중권의아이콘] 양가죽을 쓴 늑대 (2010.07.09)

정체성과 동일성

김규항이라는 이가 <한겨레>에 기고한 글에서 진중권을 “진보신당의 당적을 가진 자유주의자”라 불렀다. 그의 구별에 따르면, 진보신당에는 한편으론 “제 정체성을 간직한 당원들, 사민주의적 전망으로 이 추악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진지한 당원들”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자유주의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촛불광장에서 활약한 덕에 당원이 늘었다”고 자랑하나, “그렇게 입당한 사람들이 지금 진보신당을 아예 자유주의 정당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근데 내가 아는 한 촛불당원들은 노선투쟁 같은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의 언급 중에서 “제 정체성을 간직한 당원들”이라는 표현은 ‘사회주의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한편 “진지한 당원들”이란 표현은 정체성에는 문제가 좀 있지만 그래도 이 추악한 세상을 변화시키려 해서 나름 갸륵한 ‘사민주의자’를 가리키는 듯하다. 한편, 촛불 때 입당한 당원들은 일거에 ‘자유주의자’로 분류된다. 그들은 계급의 적, 즉 김규항의 표현을 뒤집으면 제 정체성을 잃고 추악한 세상을 그대로 온존시키려고 드는 진지하지 못한 당원이 된다. 아무 데서나 붉은 살 드러내는 이 좌파 바바리맨 쇼는 그냥 웃어넘기자.

흥미로운 것은 ‘자유주의자’라는 표현의 독특한 의미론이다.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 함께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근간을 이룬다. 이른바 북구의 사회국가들도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자유주의자’에 대한 이 생뚱맞은 적의는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내가 보기에 그것은 80년대 이념서적에 난무하던 어법이다. 이렇게 21세기의 한국을 졸지에 멘셰비키와 볼셰비키가 다투던 러시아 혁명기로 만들어놓았으니, 내친김에 차라리 ‘자유주의자’ 숙청하라고 선동을 할 일이다.

정체성의 폭력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이른바 근대적 강박관념이다. 가령 “제 정체성을 간직한 당원들”이란 표현을 보자. 그는 이들의 정체성이 곧 진보정당의 정체성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이들만으로 진보정당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그가 편협한 것은 아니다. 정체성에 조금 문제는 있지만, 사민주의자들은 당에 좀 있어도 된다(이른바 ‘견인’을 해서 끌고 가면 되니까). 그런데 왜 진보신당의 당적을 갖기 위해 그의 개인적 정체성을, 혹은 그가 “제 정체성을 간직”했다고 판단하는 그 사람들의 정체성을 받아들여야 할까?

사실 진보정당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서 이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회주의가 뭔지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그 사람들도 모른다고 하고, 사민주의가 뭔지는 직접 유럽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낯선 개념이다. 촛불당원들은 대부분 그저 한나라당이 싫고, 민주당은 구리고, 그나마 진보정당이 제 취향에 맞는다고 생각해서 입당한 이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향이 여러 가지 면에서 민주당보다는 좀더 진보적이라고 믿는다. 이런 사람들은 진보정당에 들어오면 안되는가?

여기서 “제 정체성을 간직한”이라는 표현의 폭력성이 드러난다. ‘정체성’(identity)은 동시에 ‘동일성’을 의미한다. 다른 모든 당원들을 제 형상대로 찍어내야 비로소 당의 정체성이 유지된다는 강박관념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차라리 당원 받을 때에 아예 이념조회를 하는 게 낫겠다. “당신은 사회주의를 믿습니까?” “아뇨, 전 공산당이 싫어요.” “그럼 사민주의라도 믿습니까?” “글쎄요. 그게 뭔데요?” “흠, 당신은 어쩔 수 없는 자유주의군요. 민주당으로 가세요.”

“진보신당의 당적을 가진 자유주의자”라는 딱지는 아마도 모욕을 위한 표현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게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 내가 ‘자유주의자’라는 것은 나를 아는 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 워낙 천성이 리버럴해서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못 봐주는 편이다. 한편, 진보정당에 적을 둔 것은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 특히 강력한 사회 복지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체제 중에 유럽식 사회국가 시스템을 선호한다. 그래서 진보정당에 남아 있는 것이다.

유학 시절에 만난 독일의 한 여학생은 내가 기독교인이면서 무신론자라는 사실에 혼란스러워 했다.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인이고, 철학적으로는 무신론자이고, 윤리적으로는 쾌락주의자고, 논리적으로는 금욕주의자고,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자고,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자고, 문화적으로는 무정부주의자다.” 그는 그 모든 규정들이 어떻게 머릿속에서 하나가 될 수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정체성을 왜 패키지로 가져야 하는가. 그러는 김규항도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며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예수 족보 팔지 않던가?

진보정당 안에는 다양한 생각이 공존한다. 거기에는 유신론자도 있고 무신론자도 있다. 자유주의자도 있고 집단주의자도 있다. 사회주의자도 있고 사민주의자도 있으며, 심지어 한-미 FTA에 찬성하는 당원도 있다. 선거연합에 찬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독자후보를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른 당과 통합하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독야청청 나 홀로 걸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진보신당에 정체성이란 게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이 모든 생각들의 총합, 혹은 교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나는 묻는다

“진보신당의 당적을 가진 자유주의자”라는 표현은 아마도 ‘좌파를 가장한 우파’라는 뜻일 거다. 내가 이런 소리를 듣는 근거는, 중도에 사퇴했다고 비난을 받는 심상정씨의 말도 일단 경청할 필요가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진보신당이 더이상 이대로 갈 수는 없다고 믿는다. 거기에 찬성을 하든 반대를 하든 일단 그로 하여금 말은 말할 수 있게 해줘야 할 터. 이 당연한 요구를 했다고, 남의 이마에 함부로 딱지를 붙여댄다. 도대체 그 딱지 붙이기로써 내 주장의 뭘 반박하려 한 건지 알 수가 없다.

우파가 좌파를 가장해 무슨 영광을 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이와 똑같은 비난을, ‘듣보잡’이라는 이름으로 마침내 유명해질 수 있었던 어느 불행한 청년에게도 들은 바 있다. 이 우익 스토커는 내가 한-미 FTA에 대해 반대한 적이 없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실은 여러 차례 FTA에 반대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아무튼 ‘무슨 말을 했다’는 게 아니라, ‘무슨 말을 안 했다는 것’을 정체성 판단의 근거로 삼는 그 아스트랄함에는 설명하기 힘든 묘한 매력이 있다.

왼쪽과 오른쪽, 서로 방향은 달라도 멘털리티는 동일하다. 그래서 나온 게 바로 ‘포스트모던’의 근대비판이다. 90년대 이후 20년 동안 모두들 나서서 지겨울 정도로 근대를 반성했건만, 이 모든 지적 유행의 물결도 80년대 이념서적을 유일한 교양으로 간직한 고고한 정신만은 전혀 건드릴 수 없었나 보다. 그 포스트모던도 유행이 다 지나 이제 회고를 하는 시절. 그 시점에 마주친 이 비난의 형식(“그는 양가죽을 쓴 늑대다”)은 너무 복고적이어서 그런지 언캐니하게 느껴진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