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면을 뒤집어쓴 자의 망상일 뿐이다 : 중국에서 온 편지

2012.04.11 07:30 行間/향기로운 시와 소설

들어보십시오. 나는 부소입니다. 나는 부소이자, 나는 부소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가면입니다. 그러니 이건 소설도 아니고 평전도 아니고 역사는 더욱 아닐 겁니다. 되기로 한다면 이건 겨우 읽을거리나 될까요. (9쪽)

부서는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이룬 진시황의 장남이다. 이야기를 시작하는 '나는 부소입니다'는 그 자신이 부소가 아니라 '부소라 말하는 사람의 가면'을 장정일이다. 이 소설(이야기)은 1999년 처음 출간되었다. 이 때는 1997년 필화(? 라고 말해도 되는가)사건으로 여론과 문단에게 집단 이지메(왕따와는 조금 다르다)를 당하고 있을 때이다. 그래서 '나'는 '겨우 읽을거리'라 말하는 것이다.

들어보십시오. 나는 부소입니다. 이제야 나는 내 입으로 부소를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건 소설도 아니고 평전도 아니며 역사는 더욱 아닙니다. 이 언설은 다만 내 가면을 뒤집어쓴 자의 망상일 뿐입니다. (47쪽)

장정일은 이제야 '나는 부소입니다'라 말한다. '이제야 내 입으로 부소를 말'한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장정일이 말하는) '이 언설은 다만 내 가면을 뒤집어쓴 자의 망상일 뿐'이다. 책 소개는 "진시황의 큰아들 부소의 입을 빌려 장정일이 새롭게 그려내는 진시황 이야기"라고 말하지만 진시황 이야기를 빌어 나(부소 = 장정일)의 이야기라고 여기고 싶다.

제국의 중앙집권이 더욱 강고해지기 위해서는 모든 지식과 사상을 국가가 통제하고 황제가 독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 한비자로 불리게 된 법가 최고의 이론가였던 한비는 일찍부터 사상통제의 필요성을 설파했는데, ... 한비는 이렇게 썼지요. 현명한 군주가 지배하는 나라에는 죽간이나 목간에 씌여진 문장은 필요치 않다. 법률에 의해서 백성을 교육하면 족하다. 상고의 성인의 말 따위는 필요치 않다. 관리를 백성의 교사로 삼으면 족하다. (38~39쪽)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하고 그간 불리우던 왕王을 무시하고 황제皇帝라 칭하게 된다. 그가 행했던 "분서갱유책은 통일과 집중이라는 시스템의 원리가 학문과 사상의 영역까지 확대된 논리적 절차"였다. 이에 대해 부소가 아버지 진시황을 변론한다. 장정일의 생각이기도 하다. 이것이 그의 독서일기에서 가끔 나오는 보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기차에 두고 내렸다 등으로 표현되는 것과 통하는 것은 아닐런지. 조금 더 지나 그는 자신의 책 제목을 <산 책 읽은 책 버린 책>이라 정하지 않았던가. 부단히 버려야 채울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진시황도 그러한 연유로 분서갱유를 한것이라니 재미있는 표현이다.

아버님의 땅덩어리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었고 나의 상상에 의하면 아버님이 세상의 책을 모두 불태운 까닭도 아버님이 이렇게 생각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제국은 너무 좁다. 그러니 제국내의 책을 모두 불태우면 그 제국이 조금이라도 더 넓어질 것이 아닌가? 방 안의 자질구레한 가구를 재활용 센터에 전화해서 값싸게 들어내고 나면 25평짜리 아파트가 훨씬 넓어 보이는 이치와 같은 거지요. (55쪽)

장정일은 '작가의 말'에서 <사기>의 여러가지 판본 중 까치의 그것을 정본으로 삼았다고 한다. 사마천에 대한 것은 <사마천의 역사인식>, <진시황 평전>이 진시황과 진나라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주었다고 적어 놓았다. 이 책의 주제에 대해서는 "내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주제의 한 부분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프레이저의 <황금의 가지>가 대신해 주었다"고 한다. 왜 이런 부연을 달았을까? 앞서서도 기술하였듯이 이 책을 쓴 시기에 장정일이 겪었던 일과 무관하지 않음이 아닐까.

책(작가정신, 2012 개정판)은 120여 쪽의 작은 책이다. 부소를 빌어 '나'가 하고 싶은, 한 이야기는 나(장정일)의 이야기이다. 작가의 모든 산물은 작가의 생生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장정일이 이 '편지'를 쓴다면 이렇게 썼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비웃는 문학계가 변하지 않았지만 작가 자신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책을 읽고나니 <사기>를 읽어야 겠고 <한비자>를 읽어야 겠다. 둘 모두 편집된 것으로 읽었는데 그 모두 보여주는 대로 본 것에 불과하다. 나의 시각으로 읽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덧_
김탁환의 작품해설 "감각, 관념, 그리고 이야기"만 따로 읽어도 좋다. 데끼리.


중국에서 온 편지
장정일 지음/작가정신

덧붙임_
작자정신, 2011년 8월 개정판 1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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