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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향기로운 시와 소설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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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는 신비하다. 도대체 무엇인지 그 정체를 알 수 없다. 안개의 정체를 알 수 없음은 물론이고 안개가 감싸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안개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안개가 감싸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안개는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하지만 안개도 만능이 아니다 멀리 보이는 것만 보호한다. 가까이 다가가 그 실체를 알려고하면 안개의 그 자취를 감춰버린다. 그 자리의 안개는 다른 먼 곳을 보호하려 그곳으로 가 있다. 그래서 안개는 현실적이다. 보지 않으려 하는 것만 감춘다. 보려 하면 안개는 그저 말없이 보여준다.

얼마전 신문에서 '안개의 나라'라는 詩를 빗대어 쓴 글을 읽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안개의 나라'라는 것이다. 온통 안개속에 있어 무엇인지 구별할 수 없다고 한다. 김민기는 그의 노래 친구에서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라 했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지못하는 안개속에 헤매이고 있다.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안개의 나라'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모든 것이 가려져서 불투명하다. 정치는 정치대로 종교는 종교대로,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안개의 나라. 선거철이 되면 '장미의 나날'이 곧 온다는 안개 같은 말이 온 나라를 덮는 나라. 그런데 주먹을 휘두르는 꼬마 아이들이 안개처럼 몰려다닌다. 너무 익숙해져서일까? '왜?'라고 질문하지도 않는다. 희망이 안개 속에 숨어서일까?

나는, 우리는 투명하고 명징한 나라의 백성이고 싶다. 나는, 우리는 멀리 산과 수평선이, 그리고 꿈꾸는 일이 모두 투명하게 내다보이는 나라의 백성이고 싶다. 의심으로 가득한 토끼 귀를 달고는 우스꽝스럽게 살고 싶지 않다. 안개 걷힌 화창한 나라의 화창한 백성으로 살고 싶다. 그곳에 도달해야 한다! (조선일보 5월 2일 - 장석남 시인. 한양여대 교수)


덧붙임_
안개하면 떠오르는 것은 기형도의 안개, 정훈희의 안개,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 감독의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 그리고 이 영화의 원제 Play Misty For Me에서 나오는 Misty 정도이다. 그리고 LondonFog다. 안개에 관한 시, 노래는 의외로 많다.


안개의 나라 - 김광규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개 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 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안개 - 기형도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 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 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 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銃身)을 겨눈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새벽 안개 - 신경림

사랑을 배우고
미움을 익혔다
이웃을 만나고 동무를 사귀고
그리고 더 많은 원수와 마주쳤다
헛된 만남 거짓 웃음에 길들여지고
헤어짐에 때로
새 힘이 솟기도 했으나

사랑을 가지고 불을 만드는 대신
미움을 가지고 칼을 세우는 법을
먼저 배웠다
법석대는 장거리에서
저무는 강가에서

이제 새롭게 외로움을 알고
그 외로움으로
노래를 만드는 법을 배운다
그 노래로 칼을 세우는 법을 배우고
그 칼을 가지고
바람을 재우는 법을 배운다
새벽 안개 속에서
다시 강가에서



안개- 정호승

하체 없는 상체로
세상을 살아가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팔 없는 손으로
당신을 껴안기란
그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
그래도 껴안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삶의 어느 한순간에
느닷없이 하체가
없어지는 일이 있다.
하체없이 상체만으로
살아가야 하는 순간이 있다.
시멘트 바닥에
저 혼자 떨어진
물고기처럼
펄떡펄떡 뛰는
심장 하나만으로
살아가야 할 때가 있다.
그래도 다행이다.
상체가 하체를 그리워하니까.
그래도 다행이다.
안개 때문에
길이 없어지지는 않았으니까.



안개의 기원 - 박제영

춘천 춘천 나지막이 춘천을 부르면 출렁출렁 안개가 새어 나옵니다 아니 정확히 안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춘천이라는 말, 그 말에 한 번이라도 닿은 것들은 마침내 안개가 됩니다 아니 호수에 비친 얼굴이 안개처럼 흐려졌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단지 떠도는 소문일지도 모릅니다

어제는 횃불을 들고
안개 자욱한 공지천변을 따라 고슴도치 섬까지 걸어갔더랬습니다
춘천의 정현우 시인이 그랬거든요

고슴도치 섬에는 안개공장이 있대
퇴출된 詩노동자들이 섬 밖으로 안개를 나르고 있대*

과연 그러했습니다 늙은 난쟁이들과 맹인들이, 물론 그들은 퇴출된 습지의 시인들입니다, 섬 밖으로 안개를 나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여기가 안개의 기원인가요? 아니라고 더 깊은 곳까지 가보라고 자기들도 그곳에서 온 물과 바람과 나무와 풀로, 고양이의 울음과 쥐의 눈물과 도마뱀의 오줌으로 안개를 만들고 있을 뿐이라고

안개 속에서 더 깊은 안개 속으로 그렇게 한참을 걸어 들어갔더랬습니다
사람도, 나무도, 강물도 안개가 되어버린 그 속에서
과연 나는 무엇을 보았을까요?

아무 것도 없습디다
춘천에서 안개의 가장 안쪽을 아주 오래 걸어보았는데
마침내 아무 것도, 안개도 없습디다



안개 - 신정숙

머리 풀어 헤친 여자가 걸어온다
나무를 채근하며
여자가 문을 두드린다
흩어진 가을을 쓸어모아
불지르고 떠난 자리
자식처럼 달고 온
보따리를 풀어헤친다
뜨겁게 죽어간 밤을 찾아
천 년을 건너온 여자
손 비비며
퍼질러 앉아 울다 웃다
육식에 묶인 어둠을 벗겨낸다
잉걸불에 타는 허공이
소리 없이 퍼져 나간다



안개 - 박정남

나무들의 숲에 안개가 내리면
나무들도 아랫도리가 보인다
나무들이 다 벗지 못한 옷을
안개가 벗기고 있다

안개 속에서
나무들이 불을 켜지 않는 것은
꽃들이 젖어 있어서
젖은 꽃들이 이대로는 내어놓고 싶지 않아서
이대로는 돌려보낼 수가 없어서
좀 더 기대어 울고 가라고

벗은 나무가 오래
안개 속에 서 있다



안개 - 문정희

아침 안개 속에
다소곳이 어깨를 기대고 서 있는
저 지붕들은
아무래도 하나의 물음 같다
대답을 알려고 해서는 안되는
심오한 그 무엇 같다

생이 어찌 안개 뿐이겠는가
사과나무에 매달린 사과처럼
때로 햇살 속에
눈부신 나체로 흔들릴 때

그 장엄한 대답,그리고
끝내는 사라지는 것들의
짧은 물음 외에
우리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지붕과 지붕 사이
아무것도 아닌
조금 물기 있고
조금 흔들리는 것인
안개가 오늘 또 당도한 것 말고
서로 어깨를 기대고 서 있는 것 말고


안개 - 조병화
-1957년 역 부근

어데로인지 자꾸만 가고 있는 것이다.
은행나무 잎파리는 떨어져
나무 가지가지에 가을이 흐트러지는 계절의 가장자리
가을 변두리 안개 깊히 흐르는
길을
어데로인지 자꾸만 걷고 있는 것이다.

나무도 돌도 사람도 사라지는 기억 아득히
모두 호올로 제각기 자기 자리
묵묵한 자리
떼지어 흐르는 안개 틈틈이
먼 시간의 찬 기침소리
나는 밀려
어데로인지 자꾸만 가고 있는 것이다.

사랑에 빈마음도 이젠 깊히 돌아오지 않고
혼자 남은 생각
무척 그리던 사람도 이제 마음 다 풀어 버리고
혼자 남은 생각.

어데로인지 자꾸만 가고 있는 것이다
은행나무 잎파리는 떨어져
나무 가지가지에 가을이 흐트러진 계절의 가장자리
가을 변두리 안개 깊히 흐르는
낙엽수 사잇길을 뚝 뚝
내가 나를 흘리며 나를 떼놓으며
어데로인지 자꾸만 걷고 있는 것이다.

 

안개로 가는 길 - 조병화
-경인 하이웨이에서

안개로 가는 사람
안개에서 오는 사람
인간의 목소리 잠적한
이 새벽
이 적막
휙휙
곧은 속도로 달리는 생명
창 밖은
마냥 안개다

한 마디로 말해서
긴 내 이 인생은 무엇이었던가
지금 말할 수 없는 이 해답
아직 안개로 가는 길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면 저렇께
생각할 수도 없는 세상에서
무엇 때문에
이 길로 왔을까
피하여, 피하여
비켜서 온 자리
사방이 내 것이 아닌 자리



안개 - 조병화

안개는 다정스러우나 불안하옵니다.
안이 보이질 않기 때문이옵니다.

사랑은 그리운 것이나 허전하옵니다.
안을 다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이옵니다.

아, 안개는 고요하고 다정스러우나 허망하옵니다.
안을 보이지 않은 채 개이기 때문이옵니다.

사랑도 그와 같이
사랑은 아름다우나 불안하옵니다.
안을 다는 알지 못한 채 이별이 오기 때문이옵니다.

아, 안개는 고요하고 다정스러우나 허망하옵니다.
안을 보이지 않은 채 개이기 때문이옵니다.


비단안개 - 김소월

눈들이 비단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차마 잊지 못할 때러라.
만나서 울던 때도 그런 날이오,
그리워 미친 날도 그런 때러라.

눈들이 비단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홀목숨은 못살 때러라,
눈 풀리는 가지에 당치마귀로
젊은 계집 목매고 달릴 때러라.

눈들이 비단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종달새 솟을 때러라.
들에랴, 바다에랴, 하늘에서랴.
아지 못할 무었에 취할 때러라.

눈들이 비단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차마 잊지 못할 때러라.
첫사랑 있던 때도 그런 날이오
영이별 있던 날도 그런 때러라.



안개중독자 - 이외수

사랑아
그대가 떠나고
세상의 모든 길들이 지워진다
나는
아직도 안개중독자로
공지천을 떠돌고 있다
흐리게 지워지는
풍경 너머 어디쯤
지난날
그대에게 엽서를 보내던
우체국이 매몰되어 있을까
길없는 허공에서 일어나
길없는 허공에서 스러지는
안개처럼
그토록 아파한 나날들도
손금 속에 각인되지 않은 채로
소멸한다
결국 춘천에서는
방황만이 진실한 사랑의 고백이다



안개 - 송기원

처음에는 노랫소리인 줄도 몰랐습니다.
끊일 듯 말 듯 갸냘픈 소리 하나가
다른 소리에 잇대어지고, 그렇게
또 다른 소리에 닿더니
가로등 아래 드디어 노랫소리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결코 클 수 없는 미약한 소리들이 모여
저렇듯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어내는
노랫소리는 그대와 나에게 무엇일까요
노랫소리는 잠든 거리를 뒤덮고, 강과 숲을 뒤덮고
마침내 이 흉흉한 밤까지 뒤덮으묘 빛나고 있습니다.
저리도 무수한 사람들이 흉몽으로 뒤척이게 하던
살육의 밤까지도 뒤덮으며 넘치고 있습니다
그대는 저 노랫소리의 어디쯤에서 빛나며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지요



안개 - 박현

나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거리
그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하나

생각하면 무엇하나 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아 그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속에 외로이 하염없이 나는 간다

나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거리
그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하나

돌아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가 다오
아 그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속에 눈을떠라 눈물을 감추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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