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自然이란 무엇인가

2012.11.03 10:36 쓰기 연습/槪念語事典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자연自然은 본디 사용하고 있던 고유어와 19세기 일본의 번역어로서의 자연과 혼재되어 사용하고 있다. 온전히 어느 한 쪽의 뜻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둘의 뜻이 혼재하여 사용하고 있어 혼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도법자연道法自然은 《도덕경》 25장의 마지막 구절이다. 노자의 글이라는 것이 논란이 많으니 딱히 어떤 해석이 바르다고 할 수 없다. 대체로 두 가지로 압축되어 번역되고 있다. 하나는 자연을 '스스로 그러하다'로 해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을 natural의 번역어로서 자연을 의미하는 '자연'으로 해석한다.

본디 '자연스럽다'의 '자연'은 번역어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원래부터 사용하던 자연의 의미이다. 굳이 현대어로 표현한다면 '저절로'가 맞다. 《도덕경》이 만들어진 연대에는 천지 · 자연 · 인간처럼 두 글자가 합쳐져서 하나의 뜻을 나타내는 경우가 없었다고 하며, 한참 이후에야 그런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하니 자연이란 뜻도 한 단어가 아니라 스스로 그러하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야나부 아키라는 《번역어의 성립》에서 자연自然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노자》와 같은 오래된 한문 서적과 일본에서도 불교 용어로 쓰였으니, 역사가 오래된 말이다. 번역어 자연에는 원어(서구어)의 뜻과 모국어(일본어)의 뜻이 혼재한다는 데에 문제점이 있다. 자연의 혼재는 여러 경우에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연도태自然淘汰는 natural selection의 번역어로, 다윈 진화론의 키워드이다. 여기서 자연은 번역어 자연이 아니라 고유의 자연, 저절로 이루어지는 도태의 뜻이다. 자연에 의한 도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도태를 의미한다.

한국은 번역어 이전의 자연은 '자연적으로', '자연 상태로'를 의미한다. 번역어 자연이 정착된 것은 일본이 정착된 1890년보다 20년 늦은 1910년 전후로 보인다. 일본과 같이 기존 '자연'과 혼재되어 사용되었다. (《번역과 일본의 근대》, 최경옥)


덧_
자연선택(自然選擇, 영어: natural selection) : 특수한 환경하에서 생존에 적합한 형질을 지닌 종이, 그 환경하에서 생존에 비적합한 형질을 지닌 종에 비해 생존과 번식에서 이익을 본다는 이론이다. 자연도태(自然淘汰)라고도 한다.


덧붙임_
인간의 감각과 사고의 확장은 문자를 기반으로 한다. 문자로 정리하다 보면 사물의 실체가 분명해진다. 쉽게 말해, 개념이 잡힌다. 모호하거나 쓰임새를 다시 알아보기 위해 문자로 정리하고자 한다. 즉 개념을 잡기 위함이다. 개념에 대한 개념을 먼저 알아야 개념을 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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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란 낱말을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도덕경의 여러 곳에서 이미 쓰이고 있다. 도덕경에 나타난 자연의 의미는 인간 사회에 대해 대응하여 원래부터 그대로 있었던 것, 또는 우주의 순리를 뜻한다.

한편 유럽의 여러 언어에서 자연을 뜻하는 낱말은 라틴어 natura를 어원으로 하고 있는데 영어와 프랑스어의 nature, 독일어의 natur,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의 natura 등이 그것이다. 라틴어 natura는 "낳아진 것"이라는 뜻으로, 그리스어 φύσις의 번역어로 채택되어 "본성", 즉 우주나 동물, 인간 등의 본질을 가리키는 낱말로 사용되었다.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자연이란 낱말은 서구의 nature를 번역하여 들여온 것으로 중세 기독교 신학에서 비롯된 인간에 의해 정복되어야할 것이란 관념과 17세기 과학혁명 이후의 자연주의적 관점 등이 함께 혼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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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ure

그리스어로는 피시스(physis :태어나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태어나서 성장하고 쇠퇴하며 사멸하는 것이 자연이라는 뜻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따르면 '그 자체 안에 운동변화의 원리를 가진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세계를 거대한 동물로 생각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을 다루기 위해 고안한 개념적 도식도 이런 생각을 전제로 하고 있다. 자연은 다양한 사물들이 그들의 특징적인 형태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하는 영역으로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목적이 자연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우주의 물리적·화학적 측면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그것들을 우주의 생물학적인 양상에 종속시켰는데 이는 근대 이후의 기계론적 세계관에 익숙한 현대인에게는 놀라운 사실이 될 수도 있다. 물질을 구성하는 4원소(흙·공기·불·물)조차도 각각 우주 안에서 제자리를 찾아 움직이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견해와 데카르트의 생각은 너무 대조적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자연은 유기체가 아니라 기계장치이며 따라서 인간의 정신을 제외하고 동물과 인간의 육체까지를 포함한 그 안의 모든 것은 기계적인 원리에 따라 이해될 수 있다. 데카르트는 그의 이러한 철학으로 17세기초에 나타나 뉴턴까지 이어진 갈릴레오의 새로운 물리학을 지지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순수한 기계론자는 아니었고, 정신은 자체의 원리에 의해 지배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저작들은 계몽기에 인간의 정신현상도 물리적 세계와 동일하게 기계적인 해석이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발전했다. 칸트도 마지못해 이런 입장을 받아들였는데 그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을 포함한 자연 안의 모든 것은 인과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또 도덕적 행위에 있어 인간은 자신을 자유정신 세계의 일부로 생각함으로써 자연의 영역을 벗어나므로, 인간의 존엄성과 특이성이 보존될 수 있다고 보았다. 현대의 자연관은 환경에 대한 인식의 제고로 종래의 기계론적 자연관을 벗어나 서서히 인식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특히 최근 한 학자에 의해 제시된 가이아 이론(Gaea theory:지구를 생명력 있는 유기체로 보는 이론으로 가이아는 그리스 신화의 대지의 여신)은 그리스적 자연관으로 복귀한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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