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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새로 나온 책

2012년 10월 3주 새로 나온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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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시대 문체반정을 새롭게 돌아보는 책.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보리 한국사' 시리즈 둘째 권이다. 문체반정은 당시 유행하던 소설 문체를 엄격하게 금하고 수천 년 전 고전 문체로 돌아가자는 정책이다. 자칫 어려울 수도 있는 문체반정이라는 주제를 쉽고 재미있게 풀면서 '시대와 문체, 진정한 변혁'의 의미까지 아울러 짚은 책이다.

이제껏 문체반정을 독립된 주제로 다룬 책은 없었다. 그저 정조 시대를 서술한 책이나 18세기 문화 상황을 짚는 책에서 부분부분 나왔을 뿐이다. '문체'라는 것이 워낙이 쉽지 않은 주제이거니와, 개혁 군주라는 정조의 평소 이미지와도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체반정을 연구한 논문들에서조차 정조에 대한 판단은 늘 엇갈렸다.

"바른 정치는 바른 문장에서 나온다"는, 전형적인 학자 군주 정조. 그러나 그 뒤에는 문체를 앞세워 탕평책을 꾀하거나, 노론 대신들을 견제하거나, 아끼는 남인 학자들을 구하려 하는 노회한 정치가 정조의 모습도 함께 숨어 있다.

이 책에서는 문체반정의 모든 것을 다룬다. 문체반정이 왜 일어났으며, 어떻게 전개되었고, 또 마무리는 어찌 되었는가. 문체반정의 의미는 무엇이며, 정조의 의도는 무엇이고,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결국 문체반정은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 정조, 정조 시대, 그리고 문체반정. 떼려야 뗄 수 없는 세 가지 이야기들이 책 속에서 시원하게 파헤쳐진다.

문체반정을 정조의 시각에서만 살펴보면 아마도 반쪽짜리 분석 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신하들이 다 임금의 명에 고개를 숙일 때, 임금 반대편에 서서 당당하게 저항하고 맞선 사람들이 분명 있었다. 임금에게 꼿꼿이 맞선 두 사람, 바로 당대의 학자 박지원과 유생 이옥이다.
절 대 권력자 임금에 맞서 당당히 자기 목소리를 내고 끝까지 문체를 지켰던 그이들을 만났을 때 비로소 “문체를 통해 시대를, 또는 사람을 읽는” 이 책의 큰 그림은 완성된다. 그리고 이 책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대목도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문체반정의 과정보다 문체반정의 ‘뒤끝’ 이야기가 오히려 이 책의 진짜 본론이다.

연암 박지원은, 정조가 문체가 나빠진 ‘원흉’으로 박지원을 지목하면서 문체반정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당장 바르고 곧은 고전 문체로 반성문을 써내라!” 호통 치는 임금에게 무릎 꿇지 않았다. 오히려 끝까지 자기주장과 목소리를 높인다.
이옥은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하고도 문장에 소설체가 섞였다 하여 최하 꼴찌로 내처졌다. 그 뒤로 끝내 벼슬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평생을 무명의 선비로 살았다. 그래서 흔히 이옥을 문체반정의 최대 피해자라 일컫는다.
이 책에서는 이옥을 새롭게 해석한다. 이옥은 피해자도 아니었고, 결코 불우하지도, 실패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임금과 시대를 뛰어넘는 당당함을 글에서 보여 준다. 그것도 도니, 예니, 의니 하는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라 작은 꽃, 벼룩, 욕설, 담배, 개나 돼지 같은 사소하고 흔한 이야기로 “천지만물의 감성, 가장 작은 것의 외침”을 들려줌으로써 개성 있는 문체를 완성했다.

“이 제 사람들은 더는 경서의 시대, 고전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았다. 그보다는 새로 등장한 소품이나 자유로운 산문이 훨씬 더 사람들을 흔들었다. 때로는 욕도 하고 상소리도 섞고 음담패설도 튀어나오지만, 토끼 이야기를 하다가 벼룩 이야기를 하다가 용왕 이야기로 튀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생생하고 자연스러운 글. 살아 있는 현실의 글. 바로 그런 글이 당시에는 필요했던 것이다.” (본문에서)

이옥의 글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진짜 문체를 만날 수 있다. 수천 년 전 고전을 본뜬 낡은 문체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이곳을 사는 사람들을 생생하게 그려 내는 문체.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게 하는 문체. 그런 문체가 ‘진짜’인 것이다.
임금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문체라며 내친 패관소품이 이옥에게는 “가장 작고 천대받는 이야기여서 가장 멋지고 위대해지는” 글이었다. 그 선언 속에 담긴 ‘진실’은, 이옥과 정조가 살아간 시대뿐 아니라 지금 현재도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던져 준다.

문체는 시대와 함께 움직인다.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과 함께 변화한다. 정조의 문체반정이 결국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아무리 임금이더라도 혼자 힘으로 문체를 바꿀 수는 없다. 문체를 변하게 하는 주체는, 글을 쓰고 말을 하는 사람들 ‘모두’이기 때문이다.
지금 새롭게 문체반정을 읽어야 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임금 정조는 결코 혼자 할 수 없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하면 정조가 생각한 것처럼 문체를 바꿔 세상을 바꾸는 일이 가능하니까. 모두가 함께 세상을 바꾸는 것이 진정한 변혁이다.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시대와, 문체와, 변혁’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

정조·박지원·이옥 3인의 관계를 풀다
실패로 끝난 정조 ‘문체반정’의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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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월요일자 조선일보에 '조용헌 살롱'을 연재하는 동양학자 조용헌의 매력은 많이 다니고, 많이 읽고, 많이 만난다는 것. 일상에 매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경험을 글에 쏟아붓는 것이다.

' 조용헌 살롱'을 묶어 낸 이 책은 아무 데나 펼쳐도 재미있는 스토리 보따리가 펼쳐진다. 구례 쌍산재에선 빨치산도 비켜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주고, 부자를 졸부(猝富)와 명부(名富), 의부(義富)로 나눠 명부와 의부가 많아야 사회가 안정된다고 말한다. 서울엔 커피 전문점이 늘고 부산엔 차(茶) 애호가가 늘고 있다며 '북커남차'란 조어를 내놓고, 초콜릿과 빵, 마시멜로가 합해진 초코파이를 '현대의 삼합'이라 우기기도 한다. 전국의 유명한 집들을 구경 다니면서 각 집안의 손님 맞는 태도를 비교하고, 각 지방의 맛있는 음식 이야기까지 이르면 독자의 입에도 침이 고인다.

조씨는 스스로의 직업을 '매설가(賣說家)'라 작명했다. '이야기를 팔아서 먹고산다'는 뜻으로 "나로서는 출퇴근이 없고, 정년이 없고, 만나기 싫은 사람은 안 만나도 되고, 승진과 인사고과 부담이 없어서 좋다"고 했다. 먹고 살기 바빠 못 떠나는 사람들에겐 처음엔 부러움 그다음엔 위로와 대리만족을 줄 책이다.

동양학을 읽는 월요일
조용헌 지음, 백종하 사진/알에이치코리아(RHK)

많이 읽고, 다니고, 만난 남자의 이야기 보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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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워킨의 <민주주의는 가능한가>(문학과지성사)는 이 절망적으로 보이는 물음들에 대한 성실한 답변이다. 법률가이자 법학 교수답게 드워킨은 이 곤란한 물음을 실감나는 사례와 차분한 논리로 하나하나 풀어나간다. 그는 민주당과 공화당 지지 세력 사이의 건널 수 없는 심연을 확인하면서 미국이 ‘두 문화’로 나뉘어 있다고 진단한다. 대통령 선거 때마다 TV에서 볼 수 있는 동서부 연안 지역의 파란색과 중남부 지역의 빨간색이 변경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미국 정치의 구도임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의 그 어떤 정치 지도자도 당분간 이 분할을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두 문화 간의 화해나 공존은 결코 뛰어난 정치 지도자의 손으로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 드워킨의 진단이다. 현재 이 땅의 상황에 기대어 말하자면 ‘통합’은 한 후보의 구호로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문화 사이를 가교하는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

드워킨의 대답은 ‘대화’이다. 진부해 보이는 이 대답을 제시하면서 그는 이 진부한 대답 외에는 대안이 있을 수 없음을 성실히 논증한다. 그런데 그가 제안하는 이 대화는 가령 폭력으로 점철된 역사 기억을 용서와 통합이란 이름 아래 억지로 화해시키려는 시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대화를 이루기 위한 공통의 규범을 개개인의 정치적 신념을 철저히 되물음으로써 도달하는 원리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드워킨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서구 정치사상을 틀지어온 ‘더 나은 삶’을 향한 노력과 책임을 그 원리로 제시한다. 너무나도 원론적으로 보이는 이 제안에 독자들은 식상해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억지 화해와 통합이 판치는 이 땅에서, 우직하고 강건하게 원리를 내세우는 목소리는 너무나도 소중하다. 부디 사랑하는 후배가 이민을 떠나지 않도록 대화의 원리가 이 땅에 뿌리 내렸으면 좋겠다.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로널드 드워킨 지음, 홍한별 옮김/문학과지성사

로널드 드워킨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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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흥미진진한 책이다.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지능과 인간(특히 현대인)의 관계를 파고든 책은 도발적이면서도 흥미롭기 그지없는 사실들을 밝히고 있다. 미리 말하자면, 읽는 사람에 따라 저자의 주장에 크게 반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저자의 논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그러니 섣부른 판단은 일단 보류하고,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여기서 ‘지능’이란 연역하거나 귀납해서 판단하고, 추상적으로 생각하며, 유추를 이용하고, 정보를 통합하며 그것을 새로운 영역에 적용하는 능력을 말한다. 저자의 결론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지능이 높은 사람들은 (지능이 낮은 사람들에 비해) 진보주의자와 무신론자가 될 가능성이 더 크다. 또한 아침형 인간보다는 야행성 인간이 될 가능성이 더 많으며 동성애자가 될 가능성이 더 크다. 지능이 높은 사람들은 성악보다는 순수 기악을 즐겨 들으며 술·담배와 심지어 마약을 사용할 가능성이 더 많다. 과음을 하고 취할 가능성 또한 더 높다. 그리고 지능이 높은 사람들, 특히 지능이 높은 여성들은 지능이 낮은 사람들보다 평생 동안 자식을 적게 갖거나 갖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 같은 결론에 대한 저자의 논증을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으니 그 중 하나, 지능과 정치적 성향의 관계만 살펴보자. 미국 청소년건강연구와 종합사회조사 자료에 따르면 자신이 ‘아주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20대 초반 청년의 청소년기 지능지수(IQ)는 평균 94.82, ‘아주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청년의 청소년기 IQ는 106.42로 나타났다. 연구 결과에서 보이는 IQ 11.6점의 차이는 통계학적으로 매우 유의미하다. 이는 지능이 높은 개인일수록 진보주의적 가치관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에 따르면 원시 수렵채집인 종족의 모든 구성원은 남성의 경우 유전적으로 친족이나 친구고, 여성의 경우 생존을 위한 동맹자였다. 자신의 식량을 유전적 친족들과 나누는 것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보편적인 본성이다.

그러나 만난 적이 없거나 만날 가능성이 없는 낯선 사람들과 자원을 나누고자 하는 성향은 인간 본성에 속하지 않는 매우 새롭고 낯선 가치관이다. 지능이 높은 사람들이 ‘진화적으로 새로운’ 진보주의를 선택할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이다.

왜 진보주의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주장 또한 흥미롭다. 저자는 영국 버킹엄대 브루스 찰턴 교수의 말을 인용, “진보주의자들은 상식을 무시하기 때문에 상식이 부족하다”고 말한다(여기서 상식이란 진화의 과정에서 갖게 된 자연스러운 판단이나 감정을 뜻한다). 진보주의자들은 ‘감정’을 느껴야 할 상황에서 ‘생각’을 하고, 추상적인 논리나 추론을 사회나 대인관계 영역에 대입하여 일반인들에게 거부감을 준다는 것이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지능은 인간이 가진 수많은 특성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키가 큰 사람이 작은 사람보다 인간적으로 더 가치 있거나 나은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듯이 지능이 높다고 해서 지능이 낮은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키나 눈동자 색깔 등에 대해서는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지만 지능에 대해서는 그 사람의 가치와 결부시키는 경향이 있다. 사실과 가치는 전혀 다른 영역의 문제다.

지능의 사생활
가나자와 사토시 지음, 김영선 옮김/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IQ 높을수록 무신론자 된다… 술·담배 즐길 가능성도 높아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여성… IQ가 높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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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도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자연 선택의 우연한 결과일 뿐이다.”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이론이 함축하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인간이 세상 만물의 질서에서 어떤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당대 사람들은 혼돈에 빠졌다. 인간도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자구상에서 언젠가 영원히 사라져 버릴 존재라면 삶의 가치나 이상 등은 무의미한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삶에 더욱 집착했고, 죽음을 거부하고 심지어는 정복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이 책 ‘불멸화위원회’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과학으로 죽음을 피하려고 했던 두 가지 시도에 대한 이야기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저명인사들 사이에는 인간 개개인의 고유한 영혼(개인성)이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지속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당시 유행했던 교령회(交靈會)는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려던 열정적이고 절박한 노력이었다. 케임브리지의 철학자 헨리 시지윅, 다윈과 함께 자연선택이론을 알아냈으나 훗날 심령주의자가 된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 영국 총리와 ‘심령연구학회’ 회장을 지낸 아서 밸푸어 등이 삶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이런 노력에 빠져들었다.

영국의 지식인들은 유령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받아쓰는 ‘자동 기술’과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자동 기술된 문서를 대조해 사후 세계의 존재를 증명하는 ‘교차 통신’에 몰두했다. 월리스가 심령주의를 ‘전적으로 사실에만 기초를 둔 과학’이라며 옹호했던 건, 다윈 이후 세계가 재주술화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러시아 지식인 사이에서도 죽음에 맞서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볼셰비키 지식인 분파인 건신(建神)주의자였다. 막심 고리키를 비롯해 소비에트 정권에서 인민계몽 위원장으로 임명된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 ‘불멸화위원회’를 만들어 레닌의 사체를 영구 보존하기로 결정한 핵심인물이었던 레오니드 크라신 등이었다. 이들은 과학의 힘으로 아예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과학의 힘을 완전하게 활용할 수 있게 되면 죽음을 인위적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던 것이다. 이들에게 진화는 목적 없는 과정이 아니라 진보를 향해 가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이를 성취하려면 먼저 인간을 새로운 인간형으로 개조해야 했고, 이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희생됐다.

저자는 두 경우 모두 과학과 종교, 주술의 경계는 흐릿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며 책을 통해 불멸을 바라는 인간의 헛된 욕망과 부조리, 주술적 과학의 허상을 꼬집는다.

그는 “인간을 필멸의 운명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목적에서 지식의 힘이 소환됐다”며 “과학은 과학에 반(反)하여 쓰였고 마법으로 가는 통로가 됐다”고 일갈한다.

저자는 반(反)휴머니즘 사상을 집약한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유토피아 정치 기획을 비판한 ‘추악한 동맹’ 등을 통해 우리에게 낯익은 존 그레이 전 런던정경대학(LSE) 교수. 저자에 따르면 과학을 통해 불멸을 추구하는 것은 죽음을 격퇴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우연성과 신비성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일 뿐이다. 여기서 우연성은 인간이 항상 운명과 우연에 지배받으리라는 것을, 신비성은 인간이 알 수 없는 것들에 항상 둘러싸여 있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지식을 이용해서 ‘인간 동물’이 ‘인간 조건’을 초월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오늘날의 사례로 레이 커즈와일을 든다. 커즈와일은 ‘기술이 인간을 초월하는 순간 특이점이 온다’는 저작을 통해 지식 성장이 세계를 변형시킬 정도로 가속화되는 시기가 왔다고 주장했다. 수확 가속의 법칙이 작용한다고 전제하면 인공지능이 그것을 발명한 인간의 지능을 능가하게 되는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커즈와일이 제시한 특이점은 최근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이뤄진 뒤에야 도달할 수 있는 상태지만 개념 자체는 새로운 게 아니다”며 “커즈와일이 생각하는 가상의 내세는 심령연구자들이 생각한 내세의 하이테크 버전이고, 우주에서도 진화가 가속화된다는 생각은 진화가 내세에서도 계속 이뤄진다는 빅토리아시대 프레더릭 마이어스의 꿈이 업데이트된 버전이다”고 말한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하고 지식이 성장한다고 해도 인간을 인간이라는 조건에서 벗어나게 해주진 못한다는 다음과 같은 지적은 저자가 책을 통해 전달하려는 핵심 메시지다.

“과학은 인류가 자신의 운명을 향상시키게 해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살아가는 자연환경을 훼손한다. 과학은 죽음을 극복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대량 살상을 가능케 하는 강력한 기술들을 만들어 낸다. 이 중 어느 것도 과학의 오류는 아니다. 단지 과학이 마법이 아님을 보여줄 뿐이다. 지식의 성장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들의 법위를 확장시켜준다. 하지만 인간을 인간이라는 존재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지는 못한다.”

불멸화 위원회
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이후

과학을 ‘주술’로 격하시킨 ‘인간의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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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침팬지 얼굴에 커다란 점을 그려 넣었다고 치자. 깨어난 그가 어슬렁거리다 거울 앞에 선다. 화들짝 놀란 짐승은 점을 지우려 하면서 누가 이런 장난을 쳤는지 찾는다. 침팬지, 오랑우탄 등 유인원(類人猿)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인식한다. 원숭이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침팬지는 사람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다. DNA로는 98.7%가 일치한다. 침팬지 이름이자 동물실험 프로젝트인 '님 침스키(Nim Chimpsky)'는 불행히도 그 닮음 때문에 시작된 드라마다. 이 책은 대도시 뉴욕에서 인간의 손에 자랐다가 버림받은 어느 침팬지의 수난사다.

님 침스키라는 이름부터 삐딱하다. 유명한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Noam Chomsky)를 향한 조롱이 담겨 있다. 침팬지에게 언어 교육을 시도한 님 프로젝트는 '언어는 인간에게만 내재된 능력'이라는 촘스키의 핵심 주장을 무너뜨리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실험을 이끈 행동심리학자 허버트 테라스는 인간과 비(非)인간을 나누는 언어의 경계를 흐릿하게 해 종(種)들 사이의 소통을 보다 믿을 만하고 과학적인 토대에 올려놓을 생각이었다.

님은 1973년 11월 미국 오클라호마의 영장류연구소에서 태어나 열흘 만에 뉴욕 웨스트 78번가의 일반 가정으로 옮겨졌다. 허버트의 제자로 님의 첫 대리모였던 스테파니는 이 수컷 침팬지를 친아들처럼 길렀다. 기저귀를 채우고 옷을 입히고 양치질을 해주고 때론 젖도 물렸다. 생후 2개월부터는 수화(手話)를 가르쳤다.

님이 처음으로 익힌 수화는 '마시다(drink)'. 주먹을 쥐고 엄지를 앞으로 내민 다음 부드럽게 입으로 가져가는 동작이었다. 2주가 지나자 님은 어떤 암시 없이도, 동작을 만들어주지 않아도, '마신다'는 신호를 보냈다. 두 달 만에 '주다' '위' '달콤한' '더 많이'를 터득했다.

사람 옷을 입고 포크로 스파게티 먹는 법을 배운 님은 사람 다루는 기술도 뛰어났다. 하지만 첫 생일을 맞기도 전에 녀석은 동물성(야성)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통제와 예측은 점점 어려워졌다. 스테파니의 결혼 생활이 삐걱거리면서 님은 새 보금자리를 찾아야 했다.

비용도 골칫거리였다. 컬럼비아 대학 교수였던 테라스는 방송과 신문에 님을 노출하면서 프로젝트를 알렸고, 후원금을 타냈다. 님은 언어 수업을 중심으로 빡빡하게 바뀐 일상을 견디기 힘겨워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을 물어뜯으며 난폭해졌고 '새 엄마들'은 자꾸 떠나갔다. 프로젝트는 연구비도 끊기면서 뚜렷한 성과 없이 4년 만에 중단된다.

님은 오클라호마의 영장류연구소 사육실로 돌아왔다. 실험이 끝나도 삶은 계속된다. 님의 여생은 외롭고 어두웠다. 영장류를 대상으로 의학생체실험을 하는 연구소로 팔려갔다 구출되기도 했다. 동물의 언어와 문화를 그 자체로 이해하려 하는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동물윤리학이 왜 필요한지 역설해주는 스토리다.

테라스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님의 삶보다는 데이터를 더 중시했다. 마지막에 텍사스 동물보호소로 님을 데려온 클리블랜드 에이모리는 동물을 사랑하고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님을 더 고립시켰다. 동료가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침팬지의 특성을 몰랐고 직원들이 님과 수화로 대화하는 것을 막았다. 님은 실험실에서도 보호소에서도 존중받지 못한 것이다.

이 책은 2000년 동물보호소에서 심장 폐색으로 쓸쓸하게 죽을 때까지 님 침스키가 지나온 삶을 되밟는다. 과학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님과 살았던 사람들을 찾아 그의 삶을 재구성한다. 님이 인간과 함께 살고, 매트리스에서 좋아하는 담요를 덮고 자고, 아침을 먹으며 수화로 이야기하는 장면들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뉴욕에서 지낸 4년은 물론이고 말년을 보낸 여러 시설에서 그를 돌본 이들의 목소리도 들려준다. 뉴욕에서 왕자처럼 길러진 님은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사육동물로 전락했다.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님이 습관적으로 수화를 했지만 이를 이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님의 드라마는 최근 '프로젝트 님'이라는 다큐멘터리로 상영되기도 했다. 이 책은 영화에는 없는 일화와 사람을 풍부하게 담아냈지만 기대만큼 드라마틱하지는 않다. 구체적인 자료 없이 증언에 의존한 점, 평이한 스토리텔링 방식이 흠이다. 침팬지의 실화를 통해 동물을 이해하는 방식을 반성하게 하는 시각은 매력적이다. 어쩌면 님 침스키는 인간의 욕심과 본성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 프로젝트다.

님 침스키
엘리자베스 헤스 지음, 장호연 옮김/백년후

스파게티 먹고, 수화도 하지만 나는 인간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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