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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인간이 되기 위한 인문

세노야로 바라본 우리말 속 일본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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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노야 세노야 / 산과 바다에 우리가 살고 / 산과 바다에 우리가 가네
세노야 세노야 / 기쁜 일이면 저 산에 주고 / 슬픈 일이면 님에게 주네
세노야 세노야 / 산과 바다에 우리가 살고 / 산과 바다에 우리가 받네
세노야 세노야 / 기쁜 일이면 바다에 주고 / 슬픈 일이면 님에게 주네

<세노야>는 양희은의 노래로 잘 알려진 노래다. 구슬픈 멜로디에 아름다운 시가 어우러져 많은 이의 사랑을 받고 있다. 며칠 전 한겨레신문에 '세노야'가 우리말이 아닌 일본어라는 내용의 칼럼이 실렸다. "'세노야'는 일본 어부들이 배에서 (주로 멸치잡이) 그물을 당기면서 부르던 뱃노래 후렴이다. 남해 지역에서 취재한 여러 자료를 분석하면 동쪽으로 갈수록 일본말이 많아진다. '세노야'는 우리말이 아닌 것이 확실해 보인다."라고 말한다. 강재형은 "글쎄, 어느 쪽 손을 들어줘야 할까."라며 한발 물러서 말한다.

칼럼에 관한 고은의 '세노야'에 관한 사연이 실렸다. 고향인 군산 앞바다가 아니라 남도의 멸치잡이 어선의 어부에게서 들었다고 정정했다. 훗날 규슈 해안의 어부가로 다시 '세노야'를 들었다고 전한다. 고은은 "근대어의 경우 일본의 조어를 그대로 받아들인 사실을 굳이 숨길 까닭도 없다. 이는 현대 한국어나 중국어의 관념어 대부분에 해당한다. 그래서 우리 언어의 한 부분은 고대에는 중국에 빚지고 근대에는 일본에 빚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라며 "나는 '세노야'가 일본어라고만 단정하는 것을 주저한다."라고 말한다.

우리 생활에 알게 모르게 일본어가 자리 잡고 있다. 일본어는 많이 순화되었지만, 일본식 한자어는 많은 부분에 남아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친 한국이 일본어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이다. 학술적으로 사용하는 많은 번역어가 근대 일본 번역가의 노고에 의해 일본의 단어가 되었고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의 단어로 자리 잡았다. 近代, 哲學, 社會, 美, 自然, 存在, 浪漫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러한 단어를 일본어라고 사용하지 말아야 할까. 근대 일본의 번역어뿐 아니라 새로운 개념이 나오면 일본 번역서를 참고해 그대로 사용하는 병폐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황대권은 《빠꾸와 오라이》에서 "일본에서 만든 단어가 우리 일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민족적 자존심을 거론하며 발본색원의 당위성을 강요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또한 "우리가 워크맨을 들고 다니고 노래방을 들락거린다는 사실이 자연스럽다면, 오히려 어느 정도의 일본의 영향을 인정하는 편이 합리적"이라는 서현 교수의 지적에 동의한다. 나도 누구의 손을 들어주어야 할지 한발 물어서야 하나.


남해 멸치잡이 어선의 조업 장면. 사진=박미향 기자.


일제강점기가 이 땅의 근대화를 이끈 시기라는 점을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이처럼 우리의 언어에 거대한 증명서가 존재하고 있다. 건축, 근대라는 말 자체가 일본이 번역한 것 아닌가. 문제는 일제강점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훨씬 뒤에 만들어진 조어는 손쉽게 대한해협을 건넜다. 러브호텔, 재태크 등은 신문과 방송에서도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단어다.

일 본에서 만든 단어가 우리 일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민족적 자존심을 거론하며 발본색원의 당위성을 강요할 필요는 없다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한자가 그렇듯이 이미 우리 생활의 완벽한 조직으로 변화한 부분은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워크맨을 들고 다니고 노래방을 들락거린다는 사실이 자연스럽다면, 오히려 어느 정도의 일본의 영향을 인정하는 편이 합리적일지도.

_《또 한 권의 벽돌》 서현

빠꾸와 오라이
황대권 글.그림/시골생활(도솔)





10월26일치 30면 ‘말글살이’를 읽고
_고은 시인

이것은 반박문이 아니다. 1960년 말 내가 취중의 즉흥으로 일필휘지한 노랫말 ‘세노야’에 관한 사연을 밝힌다.

1968 년인가 그 다음해인가 나는 미당과 함께 경남 진해의 육군대학 문예강연에 갔다. 육군 고급장교들이 교생이었는데 전두환 노태우 등도 교생이었던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강연 뒤 육군대학 총장 김익권 장군의 호의로 육군대학 전용의 소형군함에 두 사람이 타고 통영에서 여수까지의 다도해를 경유하게 되었다. 도중에 박재삼의 고향인 삼천포에도 잠시 기항해서 소주를 마시는 여유를 누렸다.

바로 그 남해 난바다까지 나가 나의 뜻에 따라 멸치잡이 어선들에 조심스레 접근했다. 멸치 그물을 후리고 끄는 선상 노동은 노래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어부가 중 후렴으로 ‘세노야 세노야’라는 낯선 낱말이 내 뇌리에 박혔다.
이 ‘세노야’는 내 고향 군산 앞바다의 그것이 아니라 남해 일대의 노동요 발흥의 허사이다. 그런데 훗날 나는 일본 규슈를 여행하다가 규슈해안의 어부가로 다시 ‘세노야’를 만날 수 있었다.

<한겨레> 10월26일치 30면 말글살이난의 ‘세노야’는 이 낱말이 일본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나서 내가 그 사실을 모르고 일본말로 노래 제목을 삼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군산 앞바다 어부가에는 ‘세노야’가 있지 않다.

과연 일제 강점기간 우리 모국어는 금지된 언어일 뿐만 아니라 그 기간 이후로도 많은 손상과 오염 그리고 지배언어의 잔재가 거기에 개입한 바 있다. 아니 근대어의 경우 일본의 조어를 그대로 받아들인 사실을 굳이 숨길 까닭도 없다. 이는 현대 한국어나 중국어의 관념어 대부분에 해당한다. 그래서 우리 언어의 한 부분은 고대에는 중국에 빚지고 근대에는 일본에 빚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남해 일대의 언어는 당대의 시각으로 한국어다 일본어다 하고 분별하기보다 고대 한국어가 일본으로 건너간 분명한 사실이 일본어의 기원에 대한 절대조건인 것을 전제한다. 그래서 남해의 이쪽 한국 쪽이나 그 건너 일본 쪽에서 해상언어의 공동사용이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온 것이다. (이런 사례가 아니더라도 심지어는 고대 이집트어가 한국어로도 충분히 토착화되었다. 만주어의 경우도 적지 않다.)

나는 ‘세노야’가 일본어라고만 단정하는 것을 주저한다. 그것은 오랜 공해상의 흥취를 담은 고대 한국어이자 지금 국제어로서의 한 낱말이기 십상이다.


[말글살이] 세노야
_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 · 아나운서

‘세노야’(senoya)는 미국 시카고에 있는 뷔페식당이다. 곽재구 시인은 1990년에 ‘서울 세노야’를 발표했다. 김혜수와 변우민이 출연한 일일연속극 ‘세노야’는 1989년에 방송되었고, 가수 남진과 하춘화가 주인공을 맡은 영화 ‘세노야’는 1973년에 개봉했다. 노래 ‘세노야’는 조영남, 최백호, 최양숙, 나윤선, 김란영 등의 가수는 물론 배우 최민수도 불렀다. 양희은의 것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방송에서 처음으로 노래한 이는 작곡자인 김광희이다. ‘세노야’의 노랫말은 고은 시인이 1970년에 발표한 시다. ‘세노야’는 미국 피아니스트 짐 브릭먼의 음반에도 들어 있다. ‘세노야’가 라디오 방송 전파를 타고 세상에 퍼지기 시작한 때는 1970년 이맘때인 가을이었다.

‘세노야’의 역사와 존재를 더듬은 까닭은 어느 선배의 말 한마디 때문이다. “‘에야누 야누야…’가 일본 ‘뱃노래’에서 왔다”는 얘기를 건네니 “‘세노야’도 그렇다”며 나직하게 응답한 그는 <한국민요대전>을 엮어낸 최상일 민요전문 피디(PD)다. 그가 자신의 누리집에 올린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세노야’가 일본말이라는 사실은 민요 취재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세노야’는 일본 어부들이 배에서 (주로 멸치잡이)그물을 당기면서 부르던 뱃노래 후렴이다. 남해 지역에서 취재한 여러 자료를 분석하면 동쪽으로 갈수록 일본말이 많아진다. ‘세노야’는 우리말이 아닌 것이 확실해 보인다.”

고은 시인이 나고 자란 곳은 전북 군산시(당시 옥구군). 어릴 때 들었던 그물질 소리의 뿌리가 일본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그물 올리며 메기고 받는 흥겨운 소리 ‘세노야’는 훗날 시가 되었고, 처연함 뚝뚝 떨어지는 노래로 거듭났다. 이런 이유로 1990년 <한겨레>가 창간 두 돌을 맞아 뽑은 ‘겨레의 노래’에 ‘세노야’가 꼽혔을 때 이의가 없지 않았다. 오히려 질곡의 역사가 반영된 민족의 노래가 될 수 있다는 의견 또한 만만치 않았다. 글쎄, 어느 쪽 손을 들어줘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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