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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새로 나온 책

2012년 11월 2주 새로 나온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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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사는 일이 역사와 특별히 관련 없는 대부분 사람의 경우 우리나라 역사라도 고려시대까지만 올라가면 태조 왕건 다음의 왕이 누구인지, 마지막은 또 누구인지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저 넓은 땅덩어리, 3천 년 중국 역사로 옮겨 가면 중화인민공화국이 언제 생겼는지조차 모를 지경이다. 그렇다고 굳이 중국 역사를 우리가 대학입시 준비하듯이 파고들 이유 또한 그다지 마땅치 않다.

그런데 신경은 좀 쓰인다. 뉴스에 자주 나오는 정치가, 재벌기업 회장, 성공한 CEO, 유식한 대학교수 등등의 사람들이 꼭 한문 사자성어를 비롯해 중국의 고사나 역사적 사건, 인물의 저서나 어록을 인용, 자신의 의견을 내비친다. 또 그 인용이 심심찮게 언론의 화제가 된다. 때문에 저잣거리의 화제가 된 그 '중국, 중국사람'에 대해 깜깜했다가는 어디서 어떤 궁색한 상황을 맞을지 모른다.

공자, 맹자, 마오쩌뚱, 등샤오핑 정도까지는 그런대로 괜찮다. 학교 다니면서, 신문기사에서, 대화에서 워낙 자주 거론되기에 대충은 감당이 되기 때문이다. 공자 왈, '학이시습지불역열호아 (學而時習之不亦說乎) :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정도는 우리가 알지 않은가. 그런데 그 사람들만큼이나 자주 거론 되는 사람인데도 범인들의 머리에선 한 발 비켜선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한비자(韓非子)다.

'공자, 맹자도 머리 아픈데 하물며 한비자까지… …그런데 도대체 그 사람이 어떻길래 이리 유명하지? 뭐가 있긴 있나 본데 어떻게 하지?' 바로 이런 고민을 해결해 줄 깔끔한 책이다. 이 책은 한비자가 쓴 원문의 번역서, 즉 '저자 한비자'가 아니다. (현재 서점에는 그런 '한비자'도 있다.) 왕굉빈이라는 중국의 교수가 한비자를 시시콜콜 쉽게, 우리가 알면 좋을 것들만 추려서 해설한 것을 편역한 책이다. 한비의 출생부터 법가사상 일체, 현대 중국에까지 녹아 든 법가, 한비사상의 현대적 의미, 전략적 리더술(術), 관리학과 마케팅까지 한비자의 가르침 중에 지금 우리에게 약이 될만한 것들만 모아 쉽게 읽히도록 재미있게 해설하고 구성했다.

한국 기업의 중국 현지 사업체 리더가 '이 책을 미리 읽었더라면 중국인 간부들의 명확한 속내를 읽고, 그들의 사유방식을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그들을 더욱 잘 이끌어 왔을 것 같다'고 뒤늦은 출판을 아쉬워 한다. 그런데 사실 한비자에서 한비는 이름이고, 자는 존칭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됐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긴 하다.

한비자
왕굉빈 해설, 황효순 편역/베이직북스

능력자이고 싶은 리더의 필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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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는 냄새로 가득하지. 동방의 향료 냄새, 남방의 샤프란 냄새, 북부 산악지대에서 온 황금의 냄새. 포로들과 발을 끌며 걸어가는 노예들의 땀 냄새…. 나는 지금 법정을 향해 걸어간다네. 젊은이들의 힘을 믿고, 노인의 지혜에 기대는 이 애증의 도시는 내 삶과 재판에 대해 들려주고 싶지 않겠지만 난 그 이야기를 꼭 해야겠네.

내가 법정에 가게 된 소상한 전말을, 이 도시와 시대의 모순을 햇볕 아래 생생하게 끌어낸 주인공은 역사학자인 베터니 휴즈. 아래 '글로벌 북카페'가 소개한 앤드루 마와 함께 BBC가 신뢰하는 역사 다큐멘터리 진행자 중 한 사람이라네. 믿어도 좋을 거야.

돌이켜보건대 나의 죄목은 무엇이었던가? 불경죄. 아테네 신을 숭배하지 않고 젊은이들을 신에게서 등 돌리게 함으로써 타락시켰다는 건데, 진짜 문제는 내가 시끄럽고 허름한 구두장이 공방에서 관습을 벗어난 새로운 생각의 씨앗을 틔웠다는 거였지. "자신과 화해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더 나은 삶을 만들 수 있는 존재는 '그들'이 아닌 우리 자신이다." 하지만 아테네인들에게 젊은이는 신성한 존재이자 절대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될 불가침의 존재였음을 내가 간과했던 건지 모르겠군. 이 도시가 사랑하고 소중히 아끼는 그들이 더 많은 걸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 그들과 어울렸던 것이거늘.

오해들 마시게. 나는 고매하신 철학자님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도시를 휘젓고 다니며 술을 마시고 흥청거렸네. 그저 이날 이때까지 시민들에게 구두를 만들면서도, 노를 저으면서도, 빵을 구우면서도 인간은 언제나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지. 혹자는 그럽디다, 내가 '도넛 같은 사내'라고. 내 철학 얘기는 무궁무진하지만 정작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와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를 설명하는 자료들은 뻥 뚫려 있어 실속이 없다는 뜻일세.

그래서 알려주겠네. 아테네는 자유와 민주주의, 문명이 완벽히 갖춰진 도시는 아니었어. 외면의 아름다움이 내면의 고귀한 영혼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믿는 이들이 가득한 이 도시에서 나는 추하고 너저분한 남자였네. 시민들이 말하는 자유는 페르시아의 '개 같은 야만인'에게 억압당하지 않을 자유와 그들의 노예가 되지 않을 자유였고, 민주주의의 상징이라는 아고라에선 1년에 단 하루를 빼고 매일 크고 작은 종교축전이 열렸지. 사람들은 불에 그슬린 염소 털과 비둘기 피를 바쳤고, 아픈 사람의 팔다리와 무릎, 성기를 본뜬 모형도 바쳤다네.

소송을 즐기는 아테네인들에게 법정은 한 편의 연극 같았지. 합의하기 위한 곳이 아니라 상대를 이기기 위한 곳이었으니. 남자들이 울고 애걸했고 귀족들이 민중의 발아래 엎드리기도 했지. 원고와 피고의 눈물, 간절한 손동작, 멋진 언변,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최후의 판결까지…. 법정이라는 극장에서 일어나는 교묘한 감정 조작은 수많은 배심원, 아니 관객들에게 중요한 흥행 요소나 다름없었다네. 전쟁이 끝난 후 남성의 3분의 1은 목숨을 잃었고 내전 시기에는 파벌 정치로 일가족이 몰살당하며 울부짖던 아테네는 카타르시스를 간절히 원했고 책임을 물을 대상이 필요했지. 그게 오늘의 나라는 점이 안타깝지만.

캐묻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네. 나는 한 사람씩 찾아다니며 물었고, 사람들은 내 질문에 화를 냈고 나를 미워했지. 그 사실이 슬프고 두려웠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개인이나 재산에 신경 쓰는 만큼 영혼의 완성에 신경 쓰도록 설득하며 돌아다니고 싶었네. 본질적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절대 열등하지 않다며 전통과 관습 그 너머를 보도록 자극했지만, 이 역시도 공허한 외침에 불과했지.

사랑했지만 날 버린 애증의 도시 아테네에서 나는 너무 이른 꿈을 꾼 것 같네. 이 도시가 나를 받아들이기엔 아직 준비가 덜 돼 있지 않나 싶어. 새로운 미래를 가꾸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거나, 누군가는 앞서서 몰매를 맞아야 하는 법. 자, 이제는 자네가 선택할 시간. 나를 죽일 배부른 돼지가 되겠는가, 나를 따라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후예가 되겠는가.

아테네의 변명
베터니 휴즈 지음, 강경이 옮김/옥당(북커스베르겐)

희생양 부르는 혼란의 시대… 당신은 ‘소크라테스’가 되겠는가
소크라테스의 죽음, 패전의 분풀이였나
소크라테스를 죽인 진짜 이유…BC 399년 아테네의 불편한 진실
스파르타에 패한 아테네 "이게 다 소크라테스 때문"
2400년 전 소크라테스의 도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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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프랑스 학자들이 1,000명에게 약간의 금액 차이를 두고 돈을 준 뒤 그 돈을 불릴 수 있는 시뮬레이션 게임 기술을 똑같이 알려주는 실험을 했다. 부를 쌓는데 개인적인 능력 차이가 없도록 한 것이지만, 일정한 기간이 지난 뒤 피험자들은 20%의 사람들이 80%의 부를 보유한다는 '파레토 법칙'에 따라 부의 편중이 일어났다.

도대체 왜 어떤 사람들은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실패하는 걸까. 개인의 능력과 노력이 중대 변수가 아니라면 무엇이 성공을 결정하는 걸까. <80/20 법칙>의 저자인 미국의 경영 컨설턴트 리처드 코치 등이 쓴 <낯선 사람 효과>(원제 'Superconnect')는 그 비결을 '본능적으로' 네트워크를 잘 이해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능력에서 찾는다.

네트워크에서 중요한 것은 연결이 많은 것보다도 올바르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며 저자들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 '약한 연결'이라고 말한다. 미국 사회학자 마크 그라노베터가 1970년대 초반에 지적한 대로, 지인들과의 '약한 연결'은 단지 피상적인 관계가 아니라 각각의 밀집된 덩어리(강한 관계)를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한다. 약한 관계가 부족한 사람은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는 그룹에서는 정보를 거의 얻지 못하고 오직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 얻는 지엽적이고 개인적인 정보만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우리 주변에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사회적인 움직임을 이끌어내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풍부한 사회적 연결을 기반으로 가치 있는 유용한 정보에 쉽고 빠르게 접근하는 그들은 '슈퍼커넥터'이며, 그들이야말로 현대사회의 '진정한 엘리트'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슈퍼커넥터는 엄청난 인맥을 가진 유명인이 아니다. 많은 사람을 알고 있어야 하지만 좋은 첫 인상으로 친근감을 주고 아무 대가 없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외향적이고 카리스마 넘치고 매력적이기보다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평범한 스타일이다.

'약한 연결'을 잘 이해한다면 가난에서 벗어나는 데도 유용할 지도 모른다. 가난한 사람들은 대체로 돈을 버는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지인ㆍ외부인과의 약한 연결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그래서 가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자본, 외부 기업들로 이어진 약한 연결을 공동체 속으로 풍부하게 주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저자들은 책에서 약한 연결의 유용함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신들을 포함해 기업을 사고 파는 사업 과정에서 성공한 사례를 잔뜩 늘어 놓는다. 그러면서 찰리 채플린이 '모던타임스'에서 그렸던 초기 산업사회와 달리 '우리에게는 자신의 의지대로 허브(연결망)를 옮기거나 또는 자신이 추구하는 새로운 허브를 만들 수 있는 권리도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장점이자 맹점이 바로 이 대목이다. '어떤 종류의 허브가 자신에게 잘 어울리고, 어떤 형태의 허브에 자신이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도전과 실패의 과정을 거치면서 깨달아가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외부상황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한 허브에서 다른 허브로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저자들의 주장은, 그들에게는 가능했을지 모르겠으나 대단한 열정과 노력, 지혜와 의지를 갖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가능해 보이지만 실은 불가능한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 효과
리처드 코치 & 그렉 록우드 지음, 박세연 옮김/흐름출판

성공하고 싶다면 '얕고 넓은' 인맥 만들어라
이름도 가물가물한 그 사람…네트워크 연결의 숨겨진 키
현대사회 성공 비결은 ‘넓고 얕은’ 인맥
안주하지 말고 낯선 인맥으로 확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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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가. 그냥 아이디어가 아니고 '탁월(卓越)한' 아이디어다. 뉴스위크가 '인터넷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50인'에 선정한 과학저술 작가, 스티븐 존슨. 그는 《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가》에서 생명의 탄생, 다윈의 진화론, 포도주의 역사 등의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혁신의 원천과 창의적 사고의 방법론을 알려준다.

과연 생명의 탄생, 생명체의 비밀에서 찾을 수 있는 아이디어 혁신의 원천은 무엇일까. 생명체의 기본은 탄소다. 재미있는 것은 인체의 거의 20%를 이루고 있는 탄소원자가 지각의 전체 구성요소의 0.03%밖에 차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탄소를 기초로 한 생명체'라는 말은 중복되는 표현이다. 생명은 탄소원자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부분의 우주생물학자들은 만일 외계생명체가 존재한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아낸다면 그 생명체가 화성에 있든 어딘가 먼 은하에 있든 역시 탄소에 기반을 둘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데 있어 탄소의 결정적 역할을 그렇게 확신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탄소원자 자체의 핵심적 특성과 관련이 있다.

탄소원자의 맨 바깥쪽 껍질에는 원자가전자(原子價電子) 4개가 있으며 그 덕분에 탄소는 다른 원자들과 '연결'을 맺는 데 특별히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 그중에서도 수소, 질소, 산소, 인, 황 등의 원자는 특히 다른 탄소원자들과 연결을 잘 맺는다. 그런데 이 6개의 원자들이 지구의 모든 생명체의 건조 중량의 99%를 차지한다.

인체에, 생명체에 탄소가 그렇게 많이 들어 있다는 사실은 탄소원자의 독특한 특성인 결합 능력을 보여준다. 즉 탄소는 '연결 장치'다. 탄소의 연결 능력이 생물 발생 이전의 지구로 하여금 엄청나게 많은 수의 안정된 화학반응을 찾아냈으며, 그것이 최초의 유기체로 꽃을 피웠다. 그와 같은 탄소의 연결성이 없었다면 지구는 아마도 생명체는 없고 여러 가지 원소들만 섞여 있는 수프 같은 곳, 즉 죽어 있는 행성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명을 만들어낸 힘, 연결의 힘을 제대로 이용하는 비즈니스가 있을까.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세상을 바꾼 연결은 바로 인터넷 웹이다. 웹은 역사상 그 어떤 통신기술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연결을 탐구해왔다. 1994년 초에 웹은 글자들로 이뤄진 페이지가 하이퍼링크로 연결된 모습이었다. 즉 텍스트만으로 이루어진 매체였다. 그러나 몇 년 만에 그 연결 가능성의 공간이 무한히 확장되기 시작했다. 웹은 금융 거래를 할 수 있는 매체가 돼 쇼핑몰이 됐고 경매장이 됐고 카지노가 됐다.

곧 웹은 진정한 쌍방향 연결매체가 돼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는 것만큼 자신의 글을 써서 올리는 일도 쉬워졌다. 그래서 그때까지 이 세상에 존재한 적 없었던 형태가 탄생했다. 사용자가 직접 만드는 백과사전과 블로그, 소셜네트워크 등이 그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인터넷 사업들, 검색엔진,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는 모두 이 연결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다. 새로운 비즈니스를 하고 싶은가. 아니 비즈니스를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생명의 힘, '연결' 사고를 가져야 한다.

좋은 아이디어는 자유로움이 아니라 연결, 융합, 재결합을 필요로 한다. 개념적인 경계를 가로지르면서 재발명되는 것이다. 훌륭한 아이디어는 경쟁할수록 완성도가 더 높아진다. 아이디어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함으로써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회의 테이블, 즉 서로가 '연결'된 곳에서 아이디어가 터져 나온다. 혼자서 고립돼 골몰하던 것을 잠시 멈추고 사람들을 찾아 떠나라. '연결'의 힘을 찾아라. 이것이 과학저술 작가 스티븐 존슨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탁월한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방법이다.

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가
스티븐 존슨 지음, 서영조 옮김/한국경제신문

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가
아이디어는 겉절이 아닌 묵은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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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이 본국에서 고려 사람들은 사람의 고기를 구워먹는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제주도에 처음 표류해 닿았을 적에 마침 날이 어두운 시각이었다. 사또가 조사하려고 횃불을 굉장하게 준비하고 나오는 것을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이 보고 다들 '저 불은 필시 우리를 구워먹으려는 것이라'고 통곡하는 소리가 하늘에 닿았다고 한다."

조선 시대 문인 정재륜(1648-1723)이 쓴 '한거만록'(閒居漫錄)에 수록된 '박연'(朴淵) 이야기 중 한 대목이다. 박연은 '하멜표류기'로 유명한 하멜보다 20여 년 전 제주에 표착했다가 조선에 귀화한 네덜란드인이다. 네덜란드 이름이 벨테브레이인 그는 조선 여자와 결혼, 남매를 뒀으며 조선 땅에 정착해 살았다.

'한거만록'에서 '박연' 이야기를 소개한 정재륜은 명문가 출신으로 효종의 딸 숙정공주와 혼인해 부마(駙馬.공주의 남편)가 된 인물이다.

임형택(69)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한거만록'은 누구도 접근하기 어려운 고급 정보를 담은 보고서"라면서 정재륜의 정보력에 대해 "국가 전반에 걸쳐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부분까지 미칠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임 명예교수는 '한거만록'에 실린 '박연' 등 조선시대 한문 단편 115편을 선정해 우리말로 옮기고 작품마다 평설(評說)을 달아 '한문서사의 영토'(태학사)를 펴냈다.

책에는 고려 사람으로 원나라에 살다가 원나라가 몰락하자 고려로 귀환한 조반의 이야기를 담은 '조반의 애희'에서부터 19세기 말에 나온 이야기들까지 한문 단편 115편이 실려 있다. 조선 후기 이현기(李玄綺)가 쓴 야담집 '기리총화' 등 임 명예교수가 발굴한 작품들도 포함돼 있다.

"책에 소개할 한문 단편을 고를 때 문학적 가치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또 그 시대의 실상과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지, 현대 독자들이 재밌게 읽을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수록 작품을 선정했습니다." '임꺽정' '전우치' 등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부터 '도박해서 미녀를 얻다' '구렁이가 보석을 토하다' '괴물 이근' '요승'(妖僧) '옥을 안고 통곡하다' '소를 탄 여자'에 이르기까지 제목부터 흥미진진하다.

"이야기가 다채로운데 용감하게 어려움을 이겨내는 내용이 많습니다. 특히 여성들이 대단합니다. 사회적 제약 속에서도 남편을 공부시켜 과거급제시키는 기생 '일타홍' 이야기 등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운명을 개척해나갑니다." 국내 한문학의 대가로 꼽히는 임 명예교수는 한국한문학회 회장, 한국고전문학회 회장,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장 등을 지냈으며, 한문학 연구에 기여한 공로로 만해문학상, 다산학술상 학술대상, 단재상, 연세대 용재상 등을 받았다.

한문서사의 영토 1
임형택 지음/태학사

한문서사의 영토 2
임형택 지음/태학사

고려사람들이 사람 고기를 구워먹었다고?
계약 동거·식인 공포… 조선시대에 모든 스토리 다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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