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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새로 나온 책

2012년 12월 1주 새로 나온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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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16년(1792년) 영남 지역 선비들은 한양이 아닌 안동 도산에 있는 도산서원에서 과거를 치렀다. 관학이 아니라 사학(私學)인 서원에 과장(科場)이 열린 것이다. 과거에 앞서 정조는 도산서원이 모시는 퇴계 이황(1501∼1570)을 치제(致祭·죽은 신하에게 임금이 내려주는 제사)하게끔 했다.

정조가 이 같은 명을 내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최대의 사림을 보유한 영남 지역에 ‘러브콜’을 보낸 것이다. 실제로 도산서원에서 과거가 열린 지 1개월 만에 사도세자의 신원(伸寃)을 위한 영남 만인소가 나왔다.

이 사실은 퇴계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후인 선조 7년(1574년) 퇴계 문하의 인물들과 유림이 세운 도산서원이 오랫동안 퇴계학의 본거지이자 영남 유교 세력의 중심축 역할을 해왔음을 보여준다.

도산서원은 조정이나 다른 사림학파로부터 퇴계학에 대한 질문이나 이견이 나올 때는 강회를 열어 공론을 이끌어냈다. 강회는 정치적 성격도 지녔는데, 정조 19년(1795년) 문체반정(文體反正)에 대한 지침 이후 시행된 을묘강회가 대표적인 예다. 문체반정은 패관, 잡문이나 소설의 문체를 배격하고 순정한 옛 문장으로 환원한다는 정책이었으며 평소 주자의 가르침 이외의 것을 이단으로 배격한 퇴계학의 본산답게 을묘강회는 이를 학술적으로 뒷받침했다. 오늘날 정치집단의 후원을 받는 학술대회와 겹치는 장면이다.

심학(心學)과 이기(理氣), 정학(正學)을 둘러싼 당대 학자 간의 논쟁과 도산서원의 역할에 대해서도 책은 세세히 설명한다. 쉽게 읽히진 않지만 당시 정치 상황을 은밀하게 엿보는 쾌감을 준다. 한 예로 퇴계학의 정통을 계승했다는 평가를 받던 월촌의 학맥이 퇴계학파 내에서 뻗어나가지 못한 이유는 월촌의 정치적 기반이 퇴계 문인의 주축이 된 남인이 아니라 북인에 있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도산서원과 지식의 탄생
정만조 외 지음,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실/글항아리

도산서원 강회는 정치적 학술대회였다
`조선의 지식발전소` 도산서원
퇴계 편지 100통 넘게 받은 애제자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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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육친을 잃을 때마다 시코쿠를 돌았다. 이제까지 두 번이다.

시코쿠를 도는 동기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어떤 사람은 병이 낫기를 바라며, 어떤 사람은 속죄를 위해, 또 어떤 사람은 무언가 간절한 소망을 이루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팔십팔 개의 사찰을 순례한다. 나 역시 이제까지 반세기 이상 살아왔으니 부지불식간에 범했을 죄와 마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형의 죽음으로 인하여,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사자의 공양을 위하여 순례길에 나섰다.(…)

개인적으로 ‘사자의 혼’이란 내 안에 남아 있는 고인을 향한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죽은 사람은 남겨진 사람들의 영혼 속에 살아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고인의 모습은 산 사람과 마찬가지로 제각각이다. 서로가 함께했던 인생의 즐거운 추억들과 함께 마음속에 안식의 땅을 얻는 경우도 있을 것이며, 반대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함께 떠올릴 때마다 언제까지나 사람의 마음을 할퀴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삶 속에서 지인의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그의 최후를 충분히 납득하고 평온한 마음을 되찾는 것은 일반적으로 상당히 어렵다. 마음속 어딘가에 후회가 남아 있기에, 때로 그것이 내면에서 영원한 번뇌로 화한다. 나는 이런 상황을 ‘사자가 성불하지 못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내 안의 미련을 정화하기 위한 것이 공양이며, 이것은 사자를 위한 공양인 동시에 자기 자신을 위한 공양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기도
후지와라 신야 글.그림, 장은선 옮김/다반

먼저 떠난 형을 위한 공양, 시코쿠의 88개 사찰 따라 간 1200㎞ 순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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