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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새로 나온 책

2013년 2월 4주 새로 나온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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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치를 먹었다. 온몸의 세포, 글자 그대로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고동치는 것을 느꼈다. '오, 주여! 이게 바로 살아있는 느낌이구나.' 나는 고개를 숙이고 흐느꼈다."

고작 참치 캔 하나 가지고 과장이 심하다 싶다. 하지만 20년 만에 처음 입에 댄 참치라면? 저자는 16세 때부터 20년간 급진적 채식주의자 '비건(vegan)'으로 살았던 인물. "엄마가 있거나 얼굴이 있는 건 먹지 않는다"며 우유, 달걀조차 먹지 않았던 그는 이 책을 통해 "속았다"고 절규한다. 그리고 마치 사교(邪敎) 집단에 빠졌다가 탈출한 사람의 고발장처럼 '채식주의의 신화'를 고발한다. 때론 감정 조절이 안 된다 싶을 정도다.

저자가 소녀 시절 채식주의를 택한 것은 정의감, 연민 그리고 이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절박한 갈망에서였다. 한마디로 '지구를 구하겠다'는 정치적 채식주의였다. 하지만 몸엔 변화가 왔다. 채식주의를 시작한 지 6주쯤 되자 저혈당증이 왔다. 3개월 후엔 생리가 멈췄고 20년간 50번 정도밖에 하지 않았다. 2년이 지나자 이번엔 퇴행성 관절 질환이 찾아왔다. 우울증, 초조감도 밀려들었다. 항상 배가 고팠다.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 손과 발이 1년에 아홉 달은 아렸다. 의사를 찾아봤지만 속 시원한 답을 듣지 못했다. 의사들은 아무리 증상을 설명해도 10대 소녀의 척추가 내려앉았을 거라곤 생각을 못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의사는 "무엇을 먹느냐?"고 묻질 않았다. 원인은 거기에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의로움과 정의가 자신을 지탱하는 영양분이라고 믿고 버텼다.

저자가 채식주의를 탈출하게 된 건 한 기공(氣功) 치료사를 만난 게 결정적 계기가 됐다. 치료사는 거의 맥이 안 잡히는 그를 진맥하고 "좀 빨리 왔으면 좋았을걸"이라며 물었다. "뭘 먹나요?" 저자가 안 먹는 걸 이야기하자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먹는 건 자연의 이치"라고 일러준다. 20년 채식주의에 기진맥진한 저자는 그 길로 가게에 가서 참치캔을 사온 것이다.

채식주의를 탈출한 저자는 온갖 자료를 섭렵해 채식주의의 정치적·영양학적 '무지'를 공격한다. 먼저 '농업이 지구를 구한다'는 주장부터 비판한다. 오히려 그는 농업이 지구를 망쳤다고 주장한다. 쌀, 밀, 콩, 옥수수 같은 일년생 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인간은 땅(표토층)을 파괴했다는 것. 경작과 함께 표토층과 숲에 살던 수많은 동식물 종이 사라졌다. 그녀는 채식주의자와 환경주의자가 '쇠고기 1파운드를 얻기 위해 소에게 4.8파운드의 곡물을 먹이는 관행'을 비판하는 데 대해 "왜 소가 곡물을 먹어야 하느냐"고 묻는다. 싼 옥수수를 먹여 더 많은 고기와 우유를 얻는 기업형 목축 때문에 더욱 많은 지구의 표토층이 사라진다는 것. 방목이라면 이런 문제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묻는다. "왜 동물은 (인간이 먹으면) 안 되고, 식물은 되느냐"고.

요컨대 이런 논리는 모두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라는 그릇된 인간 중심주의라는 것이다. '생명은 죽음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자'고도 한다.

영양학적으로도 저자는 여러 학설을 통해 지방과 콜레스테롤을 변호한다. '포화지방→체내 콜레스테롤 수치 상승→심장 질환'이란 인과관계는 엄밀히 증명된 바 없으며 오히려 곡물 즉 탄수화물에 기초한 식단은 포도당 공급을 너무 많이 했다, 너무 적게 했다 하는 사이클을 만들어 장기와 혈관 상태를 악화시킨다고 주장한다. 콩에 대한 '환상'도 지적한다. 제대로 발효되지 않은 콩을 지나치게 섭취할 경우, 복통과 설사를 일으키는 트립신 억제 인자, 갑상선종 유발 물질로 알려진 고이트로겐, 호르몬을 교란시켜 여성 암을 일으킬 수 있는 식물성 에스트로겐을 지속적으로 너무 많이 섭취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채식의 배신
리어 키스 지음, 김희정 옮김/부키

콩고기 버거 먹는 것으론 몸 건강에도 좋지 않고 지구도 구할 수 없다
‘채식’이 건강 대명사? 몸과 마음 망치는 주범!
극단적 채식주의자의 극단적 채식비판론
어느 골수 채식주의자의 ‘전향’
육식이 악하다고? 채식주의에 체하지 마라
두부 먹으면 두뇌 노화 가속화… 채식의 `불편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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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는 본래 사악하지 않았다. 그들은 공동체 내에서 출산이나 질병치료 같은 의료 기능을 담당하거나 점을 치고 묘약을 만드는 주술적 기능을 수행한 집단이었다. 기독교 성서도 마녀를 우호적으로 묘사했을 정도다. 인간 한계를 초월하는 능력을 지닌 신비로운 존재로 여겨졌던 그들은 어느 날 졸지에 악마와 놀아나면서 신앙을 해치고 공동체에 해악을 끼친다고 낙인찍히기 시작했다. 14세기부터 불어닥친 유럽의 ‘마녀사냥’은 17세기까지 대략 20만~50만명의 사람을 처형대에 올렸다.

현대인은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뽐내지만 오늘날에도 마녀사냥은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마녀’라는 이름만 ‘된장녀’ 혹은 ‘빨갱이’로 바뀌었을 뿐이다. 인터넷에서는 1초에도 수십 번씩 한 인격을 죽였다 살려놓기를 반복한다. 마녀를 만들어내는 원리, 즉 ‘마녀 프레임’은 왜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을까. 저자는 “마녀사냥은 특정 시기의 역사적 사건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 정치적 문제를 해명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현상으로 파악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마녀가 악의 화신이 된 건 도미니크회 수사의 영향이 컸다. 그들은 타락하고 부패한 교회를 질타하기 위해 예수와 대립된 존재로 마녀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무엇보다 “마녀사냥이 가장 극심했던 때는 가톨릭교회가 가장 약했을 때”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근본주의의 창궐은 특정 체제에 위기가 닥쳤음을 반영하는 증상”이라는 것이다. 13세기에 이르러 시작된 자본과 화폐경제의 성장은 교회 중심의 중세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마녀사냥 이전의 종교재판은 믿음을 잃어버린 신자의 회개와 전향을 이끌어내면 족했다. 그런데 이제는 “도무지 알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해야 했다. 마녀사냥은 “권위 또는 권력의 공백이 발생했을 때 폭발할 수 있는 종교적 광기를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상하다. 가톨릭교회가 힘이 약해졌는데 어떻게 강력한 마녀사냥이 가능했을까. 중세의 몰락으로 시작된 근대 또한 계몽주의와 합리성으로 포장돼 있었지만 실제로는 마녀 프레임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마녀식별법을 담은 <마녀의 해머>란 책은 인쇄술이라는 최신 기술 덕분에 대량으로 제작돼 불티나게 팔려나가면서 마녀사냥을 가속화했다. 수많은 사람이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프레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요소가 된 셈이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마녀사냥이 더 잦아진 것도 기본적으로 같은 연유다. 더구나 변화에 직면한 공동체의 가치관이 요동치고 도덕적 경계가 흐려지자 대중은 “마녀만 제거하면 과거처럼 평온을 찾을 것”이란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고통받는 대중은 요즘의 야구·축구경기에서 얻는 희열을 마녀사냥에서 찾았다.

지식과 과학이 발달했지만 그만큼 지식과 과학에 포섭되지 못하는 사물이나 현상을 악마화하고 소멸시켜 버리려는 메커니즘도 활발히 작동했다. 의사조직이 전문화되면서 비슷한 일을 하던 마녀집단을 악마로 몰아붙인 것이 그 예다. 나아가 저자는 “근대국가를 지탱하는 논리 자체가 마녀 프레임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동일성과 규격화를 요구하는 잘 짜여진 근대국가의 톱니바퀴를 굴려가기 위해서는 ‘정상이 아닌 것’을 가혹하게 몰아붙일 필요가 있다. 과거 마녀사냥의 대상이 여성이었고, 유대인이었다면 오늘날에는 무슬림이고, 동성애자이며, 이주노동자로 변모하고 있을지 모른다. 언젠가는 다름아닌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마녀가 될 수도 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마녀사냥은 ‘종교적 신앙심’과 ‘합리적 지식’의 합작품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합리성은 비합리성을 옹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다. 한국사회에서도 1987년 민주화 이후 ‘중세적’ 냉전 질서가 무너지자 ‘알 수 없는 적’들을 상대해야 했던 극우 세력들이 색깔론과 빨갱이 사냥에 나섰던 것을 상기해 보자. 천안함 침몰이나 성폭행 사건을 둘러싸고도 그 근본적 원인을 규명하기보다 북한이나 김길태라는 ‘적’에 집착해 팩트를 꿰맞췄던 일부 언론의 행태도 자연스레 마녀사냥의 작동 원리와 겹쳐진다. “마녀 프레임은 박물관에 남겨진 유물이라기보다 지금 현재 진행형으로 우리 곁에서 의사소통에 간섭하는 요소”다. 결국 마녀사냥이 미신을 타파한 과학에 의해서가 아니라 근대 사법체계의 확립에 의해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참고할 만하다.

마녀 프레임
이택광 지음/자음과모음(이룸)

마녀사냥은 언제든지 ‘부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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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출간된 '나홀로 볼링'은 미국 공동체가 붕괴하고 있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던졌다. 미국 사회에 혼자 볼링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는 현상에 주목해 미국의 사회적 자본이 줄어들고 공동체가 와해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로버트 퍼트넘 하버드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10년 뒤 자신의 주장에서 미묘한 균열을 발견한다. 미국인의 시민 활동 참여가 줄어드는 틈과 부작용을 종교인이 메워주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의심할 필요 없이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기술문명과 세속적인 문화가 꽃핀 나라다.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종교적이다. 미국은 국민 중 75%가 기독교도인 21세기의 멸종동물 같은 국가다. 미국인 중 83%는 특정 종교에 속해 있으며, 40%는 매주 혹은 그 이상으로 예배에 참석한다. 59%는 매주 한 번 기도하며 33%는 적어도 매주 한 번 이상 종교 경전을 읽는다. 심지어 미국인 중 80%는 신(God)이 존재한다고 확신한다. 이처럼 미국은 성(聖)과 속(俗)이 공존하는 보기 드문 나라다.

퍼트넘과 데이비드 E 캠벨 노트르담대 정치학과 교수는 지난 50년간 미국의 종교적 지형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증명하기 위해 표준 미국인 5700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미국인의 종교에 관한 '킨제이 보고서'라 할 만한 방대한 연구에 도전한 것이다.

연구를 통해 그들은 50년간 미국 사회에 큰 변화가 있음을 발견했다. 바로 종교의 극단적인 양극화였다. 무종교인과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동시에 증가한 것이다. 반면 중간 지점의 온건한 자유주의 종교인은 줄어들었다.

1960년 존 F 케네디는 국민에게 개신교인도 가톨릭 신자에게 표를 던져도 좋다고 간곡히 설득해야 했다. 가톨릭 신자 대통령을 반대하는 국민이 30%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2004년 미국은 또 한 명의 가톨릭 대권 후보자를 배출했다. 퇴역군인 출신 존 포브스 케리다. 가톨릭에 반하는 정치적 입장을 보였음에도 케네디는 신자의 압도적 지지를 얻은 반면 케리는 그렇지 못했다. 미사를 드리는 신자는 낙태 문제에 모호한 태도를 보인 '온건한 종교인' 대신 '독실한 개신교도인'인 조지 부시에게 더 많은 표를 던졌다. 2000년대에는 어떤 종교를 믿는가보다 종교 생활에 얼마나 열심인가가 더 중요한 정치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40여 년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걸까. 지난 20년 동안 종교는 미국 정치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작용했다. 종교와 보수적 정치가 하나로 뭉치면서 뚜렷한 당파적인 색깔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그 기점이 된 것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사이의 종교 우익(Religious Right) 등장이다. 복음주의를 배경으로 한 종교적인 보수 세력과 정치적인 보수 세력이 손을 잡게 돼 낙태ㆍ동성애 등 종교 윤리 문제가 정치ㆍ사회적 이슈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 때문에 애국ㆍ전쟁ㆍ경제 등 사회ㆍ정치적 문제는 종교 이슈로 탈바꿈하게 됐다.

대통령 선거 등 정치 영역으로까지 확대된 종교 이슈는 급기야 복음주의적인 개신교 근본주의를 더욱 전투적으로 만들었고, 보수적인 종교인으로 하여금 공화당 중심의 정치 우익과 결합하게 했다. 1990년대 이후 종교의 정치화, 종교와 보수 정치의 끈끈한 결합에 염증을 느낀 많은 젊은이가 제도화된 종교를 완전히 버리고 떠나는 사태가 일어났다.

하지만 신앙을 가진 미국인 사이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부모로부터 전수되던 종교는 개인에 의해 결정되기 시작했고, 종교 간 이동이 빈번해졌다. 다른 신앙을 가진 이와의 결혼과 친구 맺기도 증가했다. 게다가 신앙이 없는 이에게 더 나은 시민과 이웃 역할을 했다. 기부와 자원봉사, 지역 선거 등에 비종교적인 사람들보다 3~4배 더 많이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민활동은 신학이나 종교적 신념에 의한 것이 아니고, 지도자의 권고를 통해서도 아니었다. 교회나 성당 등에서 다른 신도와 맺는 사회적 관계망 때문이었다. 종교는 미국 사회에서 가장 탄탄한 SNS였다. 저자는 종교 공동체를 통해 '특별히 깊은 우정'을 나눌 친구를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은 시민공동체 활동에 참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자기가 속한 '도덕공동체'의 누군가가 어떤 일에 자원봉사를 요구하면 거절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 사회에서 종교적 양극화가 진행되면서 동시에 종교적 다원주의가 수용되고 있다는 진단은 일견 모순돼 보인다. 저자는 신학이나 철학이 아니라 방대한 데이터를 통해 이를 증명해낸다.

분명한 건 미국에서 종교는 '유연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를 가진 미국인들 간의 적대감과 이질감은 많은 부분 우호감 내지 관용으로 바뀌고 있다. 분열을 조장한다고 믿어왔던 종교가 사실은 통합을 이끌어낸다는 이 점진적인 변화를 저자는 '신이 미국인에게 내려준 축복(American Grace)'으로 봤다.

아메리칸 그레이스
로버트 D. 퍼트남 외 지음, 정태식 외 옮김/페이퍼로드

미국을 분열시킨 것도, 통합한 것도 종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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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어렵고 일자리가 부족할수록 창업의 열망은 커진다. 출범을 앞둔 박근혜 정부도 벤처기업 지원 등을 통한 ‘제2 창업혁명’을 내세우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신설된 법인은 7만4162개. 처음으로 7만개를 넘어섰다. 창업 지망생이 늘면서 그럴듯한 조언도 쏟아진다.

그런데도 막상 창업한 사람의 성공률은 낮다. 국내에서 창업 후 10년을 버티는 기업은 30% 남짓. 미국에서도 창업 기업의 25%는 1년 내에 사라지고 5년 후에는 45%만 살아남는다고 한다. 미국 하버드경영대학원(HBS)의 노암 와서먼 교수는 《창업자의 딜레마》에서 그 원인을 시장 상황 같은 외부 요인이 아니라 기업 내부에서 찾는다.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 하나의 전쟁이라면 사상자는 대부분 아군의 포격이나 스스로 자초한 부상에 따른 결과”라는 것. 창업자와 신생 기업을 괴롭히는 것은 창업 전부터 성장하기까지 도처에서 불거지는 바로 ‘사람’의 문제이며 이 딜레마를 지혜롭게 해결하는 것이 성공의 관건이라는 얘기다.

저자는 창업자와 신생 기업이 직면하는 딜레마를 조사하기 위해 2000년부터 10년 동안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창업한 3,607개 기업의 창업자 9,900명을 직접 조사해 데이터베이스(DB)를 만들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초점을 맞춘 것은 기술과 생명과학 분야의 신생 기업들이다.

저자는 자신이 구축한 DB와 40건에 가까운 사례연구를 통해 창업자가 처하는 딜레마를 8가지로 요약한다. 우선 창업 전에는 어느 시기에 창업할지 ‘경력 딜레마’를 겪는다. 창업을 결심한 뒤에도 딜레마는 꼬리를 문다. 혼자 시작할지 공동 창업자를 찾아야 할지의 ‘1인창업 대 공동창업 딜레마’, 공동 창업자로 누구를 끌어들일지의 ‘관계 딜레마’, 창업 팀원의 역할 분담에 관한 ‘역할 딜레마’, 지분을 비롯한 경제적 보상에 대한 ‘보상 딜레마’, 기업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창업팀의 역량이나 자원이 부족해 외부 인력과 자원을 투입할 때 나타나는 ‘채용 딜레마’와 ‘투자자 딜레마’, 기업의 발전을 위해 최고경영자(CEO)의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할 경우 생기는 ‘CEO의 직위승계 딜레마’까지.

저자는 방대한 자료 분석과 사례 연구를 통해 창업자에게 딜레마 대처법을 제시한다. 우선 창업자의 열정은 새 기업 설립에 필수적이지만 자칫 열정이 편향적으로 작용하면 자신을 겨눈 화살이 돼 돌아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가령 창업 전망에 대한 지나친 믿음과 낙관을 바탕으로 가족과 친구를 직원이나 투자자로 끌어들이면 인간관계와 기업 모두를 해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창업 시기에 대해 저자는 “성공에 대한 의지가 있다면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회사에서 지위가 올라 고액 연봉을 받는 ‘황금수갑’을 차게 되면 창업 의지가 약해지거나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함께 창업할 사람으로는 과거 직장동료를 선택하는 것이 가장 안정적이라고 분석한다. 서로 장단점을 잘 알고 적당한 위계질서가 있으며 목표를 향한 열정도 공유하기 때문이다. 가족이나 친구는 동업 대상자에서 빼는 게 좋다. 그들과는 좌천시키거나 해고하는 등의 불편함을 감수하기 어려워서다.

창업 초기의 지분 분배도 중요하다. 저자는 각 구성원의 과거 기여도와 예상 기여도를 최대한 정확하게 반영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불공정해 보이지 않도록 각자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보상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충고한다.

창업자의 딜레마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것은 회사가 성장하면서 불가피하게 직면하는 투자 유치와 관련된 것이다. 인력이든 정보든 돈이든 외부 자원을 끌어들일 경우 지분이나 자리를 양보해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창업자 자신이 세운 회사를 떠나는 경우까지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

저자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기업과 창업자들의 사례를 통해 이런 딜레마를 설명한다. 판도라의 창업자 팀 웨스터그렌, 통신업체 GTE에서 25년 동안 일하며 경력을 쌓은 뒤 메이저지를 창립한 배리 널스, 스마스틱스의 창업자 비베크 쿨러, 트위터의 CEO이자 PR회사 피드너버의 창업자였던 딕 코스톨로 등이 겪은 딜레마와 대처 과정이 책 전반에 걸쳐 상세하게 나와 있다.

창업자의 딜레마
노암 와서먼 지음, 이형욱 옮김/에코리브르

창업이 전쟁이라면 적은 내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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