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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듣고 느낀 한마디

편견은 애초부터 비이성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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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밭을 지나며

이렇게 많은 꽃들이
그들 몰래
피어 있다니!

_송기원


다시 꽃밭을 지나며

저렇게 많은 꽃들이
그들에게 들켜
시들어 버리다니!

_송기원


그 꽃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_고은


인간은 같은 사물을 보고 각기 다르게 느낀다. 같은 ‘꽃’이란 사물을 보고 다르게 표현한 글이다. 많은 이가 송기원의 그것보다 고은의 것이 좋다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고은보다도 송기원이 더 절절하다. 아직도 송기원이 바라본 ‘꽃’이 많은 세상이다. 고은이 차라리 그 ‘꽃’을 보지 않았으면.

‘꽃’을 보고 생각한 게 아니라 송기원과 고은을 보고 ‘꽃’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글보다도 다른 편견으로 보고 있다. 편견은 “생활환경 속에서 사회적으로 학습되어 간다. 타당한 증거나 직접적인 경험과는 비교적 무관하게 특정 대상에 대하여 갖게 되는, 지나치게 호의적인 또는 비호의적인 감정적 태도이다.” 편견을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는 것은 행복하지 못하다. 행복하지 못함을 알고 있지만 편견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혹 내가 생각하는 편견이 진실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절대 이성적으로 설득해 남의 편견을 없애려 들지 마라.
애초에 편견을 갖게 된 이유가 비이성적인데, 어찌 이성적으로 설득한다고 편견을 없앨 수 있겠는가.
_시드니 스미스(영국 수필가)

이성적으로 편견을 없앨 수 없다면 감정적으로는 편견을 없앨 수 있을까? 어떻게? 하지만 답은 없다. 답도 없는 편견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하지만 피에르 마슈레가 《헤겔 또는 스피노자》에서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비록 이것이 해결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미 의미가 있는 것이다”고 했다. 나의 편견 너머 우리의 편견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_2013.02.25.
보고 듣고 느낀 한 마디


덧붙임_
편견은 생활환경 속에서 사회적으로 학습되어 간다
편견은 편견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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