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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새로 나온 책

2013년 6월 3주 새로 나온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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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 서설> <경제학 철학 초고> <선성가족> <독일 이데올로기> <철학의 빈곤> <임금노동과 자본> <공산당 선언> <프랑스의 계급투쟁 1848~50>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영국의 인도 지배의 장래의 결과>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포그트 씨> <임금, 가격, 이윤> <자본 1,2,3권> <프랑스 내전> <고타강령 초안 비판> <잉여가치 학설사>...

사회과학 지식이 있는 사람은 이 저작들을 쓴 사람이 누군지 단박에 알 것이다. 바로 카를 마르크스(맑스). 그런데 뜬금없이 왜 목록을 나열했냐고? 이 목록은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가 읽은 마르크스의 저작 목록이다.

지난 5월 오월의봄 출판사에서 출간된 체 게바라의 저서 <공부하는 혁명가>의 부제는 '체 게바라가 쓴 맑스와 엥겔스'다. 체 게바라는 1966년에 볼리비아로 가서 반독재 혁명군에 가담을 했고 이듬해인 1967년에 사망했는데, <공부하는 혁명가>는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로 떠나기 전 해인 1965년에 쓴 책이다.

대중에게 '체 게바라'는 젊은이의 티셔츠에 새겨진 흑백 얼굴 사진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중남미 전역을 다니며 여행을 떠나는 낭만적인 이미지. 배우 뺨치게 잘 생긴 얼굴에 시가를 삐뚜룸하게 깨문, 그야말로 간지가 좔좔 흐르는 모습은 젊은이들의 선망이 될 만하다. 게다가 총을 들고 불의에 맞서 싸운 체 게바라의 비타협적 삶은, 그 자체로 젊은이의 맥박수를 두 배로 증가시키는 아드레날린이다. <공부하는 혁명가>의 역자 한형식은 책 말미에 쓴 해제에서 체 게바라에 대한 이런 통상적 이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일침을 놓는다.

"많은 이들이 체 게바라를 존경하고 찬양하고 사랑하며 그리고 소비한다. 하지만 모두가 자신들의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대중들이 생각하는 체는 각각의 경우마다 너무나 다른 모습이어서 체가 실존했던 인물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바람을 체라는 이름에 투사한 가공의 인물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진짜 체는 누구인가?"

<공부하는 혁명가>는 우리에게는 무척 생소한 '마르크시스트'로서의 체 게바라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책은 원래 체가 출간하려고 계획했던 정치경제학에 대한 책의 초고에 해당한다. 책의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비범한 두 인물의 역사적인 만남
지칠 줄 모르는 힘찬 인간성
혁명의 물결, 공산당선언의 탄생
고달픈 삶, '자본'을 쓰다
제1인터내셔널과 파리코뮌
거대한 정신의 죽음
엥겔스, 최초의 맑스주의자

목차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일대기를 간략하게 압축해서 서술한 입문서 성격의 책이다. 예전에 체 게바라가 게릴라 활동을 할 때 틈나는 대로 게릴라 대원들에게 마르크스의 <자본>을 가르쳤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책은 그런 맥락에서 일반 대중들에게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삶을 쉽고 친절한 문체로 전달하려는 체 게바라의 교육자로서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체 게바라가 화이트보드에 판서를 하며 독자에게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삶에 대해 요악 설명해주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이 책은 독자에게 그런 흔치 않은 묘한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이 책의 또 하나의 장점은 번역자 한형식이 쓴 해제다. <맑스주의 역사 강의>의 저자이기도 한형식은 '체 게바라가 들려주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이야기'라는 재료에 마르크스주의자 체 게바라의 면모를 알 수 있는 해설을 곁들여 책의 완성도를 한층 끌어올렸다. 한형식의 해제에 따르면 체가 온전히 마르스크주의자가 된 때는 1954년 과테말라에서 활동하던 시기라고 한다. 체는 당시 과테말라의 마르크스주의 운동 세력과 그 일원이었던 첫 번째 부인 일다 가데아Hilda Gadea의 영향으로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이 시기에 체를 알았던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체는 마르크스의 저작들을 상당히 많이 읽었고 그 결과 마르크스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과테말라에서 쿠데타가 일어난 후 체는 멕시코로 거점을 옮겼는데 그곳에서는 체는 더욱 공고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멕시코에서 만난 쿠바의 '7월 26일 운동'의 구성원들에게 마르크스의 저작들로 공부하기를 권한 것도 체 게바라였다. 그는 처음부터 쿠바혁명을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발전시키려 했다.

하지만 체는 마르크스주의를 교조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다.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라틴아메리카 독립 영웅인 볼리바르에 대해 했던 평가나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당대의 멕시코에 대해 행했던 분석이 부적절했다고 평가한 점에서도 체의 그런 면모를 알 수 있다. 체는 마르크스주의가 무오류의 교의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체는 마르크스주의의 정통 노선과는 달리 조직 노동자가 아니라 가난한 농민들을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혁명적 계급으로 설정했다. 이것은 라틴아메리카의 구체적 실상을 반영한 것이고 체의 사상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이 변증법으로 만나는 지점이었다.

마르크스주의자 체에게 또 하나 중요했던 것은 바로 휴머니즘이었다. 그가 쿠바혁명을 통해 실현하려고 했던 마르크스주의도 휴머니즘에 입각한 것이었다. 체는 쿠바의 산업부 장관 시절인 1964년에 했던 어느 대담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쿠바 혁명이 건설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이 중심에 놓이고, 혁명의 핵심 요인으로서의 인간의 인격이 중요하게 고려되는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다."

체는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넘어가는 이행기로서 사회주의 단계에서는 생산력 발전만큼이나 공산주의 사회에 필요한 인간 의식과 사회관계를 정착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체는 당시 소련의 노선이 "'성공'이냐 '실패'냐를 재단하기 위해 성장률이나 생산성에만 초점을 둘 뿐 철학적 또는 정치적 측면들에는 무관심하다"고 보았다.

그는 1963년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공산주의적 도덕, 사기, 의욕이 없는 경제적 사회주의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는 가난과 싸우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소외와도 싸우고 있다.…… 만약 공산주의가 의식으로부터 분리된다며 그것은 분배의 한 방법일 수는 있지만 더 이상 혁명적 도덕은 아니다."

<공부하는 혁명가>에서는 체 게바라가 풀어주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강의에 이어 한형식이 풀어주는 마르크스주의자 체 게바라 강의가 이어진다. 이런 멋진 두 개의 강연을 한 권의 책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공부하는 혁명가
체 게바라 지음, 한형식 옮김/오월의봄

너무 다른 체 게바라 모습, 진짜 체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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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2월 8일 오후 5시께, 존 레넌은 집을 나선다. 늘 그렇듯 사진을 찍거나 사인을 받으려는 작은 무리의 팬들이 기다리고 있다.

한때 그의 절대적 팬이었던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도 거기 있다. 그의 주머니에는 제롬 D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이 들어 있다. 몇 시간 뒤 존 레넌이 집에 돌아오자 채프먼은 기다렸다는 듯 그를 불러 세우고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댄다. 그리고 스타를 정조준해 다섯 발을 발사한다. 그중 네 발이 명중한다. 뒤따라오던 요코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오줌을 삐뚤게 갈기기만 해도 신문 1면에 대서특필되는' 자칭 '예수보다 인기가 많은' 세계적인 빅 스타 존 레넌은 그렇게 마흔 살 나이에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다.

지금까지 수없이 변주된 존 레넌의 삶과 음악을 이제는 독특한 소설로 만날 수 있다. 그가 죽기 전 5년 동안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받는 상황을 설정해 그의 내면을 재구성한 것이다. 화자(話者)가 레넌이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상처, 소년 시절 치기로 결성한 그룹 비틀스, 독일 함부르크 유흥가에서 보낸 무명 시절, 마약과 섹스에 탐닉, 유부녀 요코와 만남, 이별, 재회 등 레넌의 삶을 관통하는 수많은 일화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흡입력이 뛰어나 단번에 읽힌다. 프랑스 젊은 작가 다비드 포앙키노스(39)가 썼다.

레논
다비드 포앙키노스 지음, 이상해 옮김/열린책들

예수만큼 유명한 레논의 삶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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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12년 11월 5일 <한겨레21>을 통해 5공 비리 청문회 당시 이순자의 소유임이 드러나 논란을 불렀던 토지가 이순자의 남동생 이창석을 거쳐 전두환의 딸 전효선에게 2006년 12월 증여된 사실을 특종 보도했다.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 산 127-2번지 임야 2만 6876제곱미터(8,062평) 토지가 바로 그 은밀한 재산이다. 이 관양동 땅은 이른바 '5공 비리'로 수천억 원의 비자금을 모은 전두환 일가의 대표적인 은닉 재산으로 추정된다. (37쪽)

1997년 대법원의 확정 판결로 전두환에게 부과된 추징금은 2205억여 원이다. 하지만 2013년 현재 집행률은 24.2%에 불과하다. 미납 금액은 1672억 원. 추징 시효는 올 10월이다. 10월 이후가 되면 안 내도 된다. 끝이다. 하지만 명의 신탁 재산이 드러나면 추징할 수 있다. 저자가 위의 관양동 땅에 대한 철저한 검찰 수사를 촉구하는 까닭이다.

전두환의 재산은 왜 여전히(?) '29만 원'일까. 저자는 전두환 재산 문제의 원죄 세 가지를 든다. 야당의 무능과 검찰의 봐주기식 수사, 보수 정당의 장기 집권이 그것들이다. 여기에 더해 전두환과 이런저런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의 측면 지원이 있다.

7년간 민주주의에 맞선 전두환은 누구인가

지금도 전두환에게 명의를 빌려준 수십 명이 채권을 현금으로 바꿔 전두환에게 주거나, 전두환에게서 돈을 받아 채권을 매입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2004년에 비자금 수사를 담당한 수사 검사는 입이 무겁다. 당시 대검찰청 중수부장으로 비자금 수사를 이끈 안대희 전 대법관은 2012년 새누리당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정치쇄신특별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대검찰청 중수1과장으로 실무 수사를 맡은 유재만 변호사는 2012년 4· 11 총선 때 민주통합당의 공천을 노렸으나 공천받지 못했다. (52쪽)
이 책은, '아직' 살아있는 자 전두환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 고나무는 <한겨레>의 사회부 기자다. 부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철저히 '사람' 전두환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자 했다. 일상인의 시각으로 5공화국 시대를 조망하려고 시도했다거나, 조야하지만 일상사 혹은 구술사적 역사 기술을 시도했다는 취재 후기의 말(313쪽)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런데 왜 전두환이었을까. 저자가 보기에, 대다수 사람들은 전두환을 "박제된 악마"이거나 "한물간 개그맨"으로 보았다. 저자는 의문이 일었다. 저자는, "그(전두환)는 연구할 가치가 없는 평범한 악일 따름"이라는 진보주의자들의 목소리가 클수록 반항심처럼 "민주주의가 1979년의 시대정신이었다면 7년간 성공적으로 시대정신에 맞서 싸운 그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반문했다.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안지다. 학위논문이나 일간지의 정치 단신과는 다른 글을 쓰려 했다. 행동과 문장의 주어 자리에서 추상적인 단체와 기관, 조직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직책과 기관이라는 '가짜 주어' 뒤에 숨은 '진짜 주어'를 포착하려 했다. 요컨대 철저히 사람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14쪽)

저자가 전두환을 선택한 이유는 또 있다. 이는 제1부의 두 번째 꼭지인 '전두환 영구 집권 계획'에서 보인다. 저자는 1988년 11월 17일자에 <한겨레>에 특종으로 실린 '전두환 장기 집권 시나리오 문서' 공개 관련 기사를 소개하면서 한국의 보수를 '질기다'고 묘사한다. 그 문서에 있는, "민정당이 최소한 2000년까지 집권을 계속하도록" 한다는 내용의 한 문장에서 가슴이 서늘해진다는 심정도 피력한다. 저자가 보기에 한국의 현대사는 1984년에 만들어진 예의 '전두환 장기 집권 시나리오가 기획한 대로 진행되었다.

진보는 늘 보수를 비웃는다. 비웃음은 무기력하다. 진보는 토론에서 이기고(혹은 이겼다고 착각하고) 현실에서 패배한다. 나는 보수가 두렵다. (26쪽)

단 세 줄로 이루어진 26쪽의 이 문장들을 보면서 한참 동안 작년 대선 전후를 떠올렸다. 문장들이 가슴을 하비었다. 쓰라렸다. 저자처럼, 나 또한 보수가 두렵다. 선거가 있을 때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흔들리지 않는 대오는 나를 떨게 만든다. 그들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뜨거운 반공주의와 국가주의가 차고 넘친다. 저자가, 두려운 보수를 이해하기 위해 "아직 살아 있는 자 전두환"을 선택한 이유다.

잔정 많은 조폭형 리더이자 죄책감 없는 냉혈한

전두환은 저자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 저자의 붓끝을 따라가면서 살펴보자. 전두환은 서민적이다. 참외나 수박 껍질이 들어간 시골식의 구수한 된장찌개를 좋아한다. 그런 서민의 입맛을 가졌으면서도 그는 광주의 서민들 수백 명을 죽이는 데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전두환을 '의리의 사나이', '정 많은 남자'로 생각한다. 가령 그는 후배들을 직책이 아니라 '희도야', '운택아' 등의 이름으로 불렀다. 위계 서열이 분명한 한국의 남성 문화에서 이름을 부르는 화법은, 그 후배의 자발적 복종과 결합하게 되면 친밀감을 극대화한다. 그의 부하들은 그와 함께 근무하고 싶어했다. 그는 '자기 사람'을 인간적으로 확실해 챙기는 데 분명히 탁월한 감각이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에서 멈춰야 한다. 이쯤에서 저자가 3년 가까이 발로 뛰어다니며 탐구한 "나의 전두환"에 대한 '판정'을 들어보자.

그는 가난에 주눅 들지 않는 생도였고, 사병들이 좋아하기 어려운 권위주의 타입의 지휘관이었다. 냉혹하게 권력과 돈을 추구한 군대 사조직 하나회의 핵심이자 지지자의 충성을 물질적으로 보상해야 함을 잘 아는 실용주의적 조직가였다. 역사 인식은 천박했지만, 권력의 진공상태에서 본능적으로 대담하게 행동할 줄 아는 남자였다. 잔정이 많은 조폭형 리더였지만 동시에 광주 시민을 학살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냉혈한이었다. (309쪽)

전두환은 '아직' 살아 있다. 그것도 아주 잘 살고 있다. '일베충'들은 그를 '전땅크'라며 떠받든다. 그를 챙겨주는 '의리의 사나이'들이나 그가 믿는 보이지 않는 구석도 있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1979년 당시 그 부친인 박정희 대통령의 총격 사망 후에 전두환으로부터 생활비(?) 조로 6억여 원의 돈을 받았다. 그만큼 그는 '돈'으로 사람들을 다루는 법을 잘 알았다. '돈'의 힘을 그 누구보다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이다.

풍자도 필요 없고 자살도 필요 없다. 29만 원짜리 수표를 든 전두환 포스터를 만들어도 그는 아파하지 않는다. 그를 아프게 만드는 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숨은 재산을, 현실적으로 추징하는 것뿐이다. 풍자와 자살은 저항의 스타일이다. 문제는 전두환은 더 이상 저항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2013년의 한국 행정부와 사법부에게 전두환은 숨은 재산을 추징할 범죄자다. 그러므로 다시, 풍자도 필요 없고 자살도 필요 없다. 선한 권력이 제대로 작동하면 된다. 국세청과 검찰, 경찰이 움직이도록 시민들이 강제해야 한다. (36쪽)

아직 살아있는 자 전두환
고나무 지음/북콤마

전두환을 '아프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29만원 재산' 전두환 그는 여전히 살아있는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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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덩굴에 달린 포도를 따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결국 따지 못한 여우가 '저건 신포도일 거야'라고 중얼거린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유명한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다.

국내 그리스 로마 고전 번역의 권위자로 꼽히는 천병희(74) 단국대 명예교수는 '신포도'라는 표현이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그리스어 'omphax'는 맛과 관계없이 '덜 익었다'라는 뜻으로, 영어 표현 'sour grapes'(신포도)는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여우와 신포도'가 아니라 '여우와 덜 익은 포도송이'로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 교수가 '이솝 우화' 그리스어 원전을 완역해 펴냈다. 이솝의 전 작품 358편을 모두 우리말로 옮기고 주석을 달았다.

그는 "수천 년 동안 묻혀 있다시피 했던 보물에 붙은 흙이며 군더더기를 털어내고 최대한 본래 모습으로 생동감 있게 복원해야겠다는 심정으로 번역해보았다"고 했다.

'이솝 우화'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힌 책으로 꼽힌다.

이솝은 전쟁 포로였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4-5세기에 산문으로 쓴 우화들은 대개 이솝의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다.

천 교수는 "이솝의 우화들이 그 무렵 가장 재미있고 가장 인기가 좋아서 모두 그의 이름으로 우화를 발표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서양에서 기독교 윤리가 지배하면서 '이솝 우화'는 약육강식의 냉혹한 현실세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이유로 '가위질'을 당한다. 많은 이야기가 목록에서 빠지거나 첨가되면서 수많은 판본이 생겨났다.

천 교수는 "우리나라에서도 일어 번역본이나 영어 번역본을 거쳐 소개되는 과정에서 그런 '가위질'이 다반사가 되는 바람에 이솝은 본래 모습과는 다른 오히려 딱딱하고 근엄한 도덕 교사로 변해버렸다"면서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서너 편 정도만 읽어봐도 우리가 알고 있던 이솝이 그의 본디 모습과는 얼마나 다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이솝 우화'는 '재미와 교훈'을 모두 갖춘 "서양 교훈 문학의 진수"라고 평가했다.

이솝 우화
이솝 지음, 천병희 옮김/도서출판 숲

여우와 신포도' 아닌 '여우와 덜 익은 포도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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