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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인간이 되기 위한 인문

필요에 따라 달리 해석하는 미국 노예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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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항상 잘못 기록되기 때문에, 항상 다시 기록될 필요가 있다. _조지 산타야나


歷史觀
역사관은 간단하게 정의하면 '역사의 발전 법칙에 대한 체계적인 견해'로, 사관이라고도 하며 다양한 역사관이 존재한다. 역사관은 역사가의 역사에 대한 이해, 해석원리, 가치관, 관념 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역사관은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상과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역사관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관은 역사연구로 확인되고, 발전하게 된다. _위키백과


19세기 후반 민족주의 역사가는 남북전쟁과 이에 따른 노예제도 폐지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미국의 숭고한 건국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마땅히 거쳐야 했던 과정이라고 보았다. 이에 따라 사가의 눈에는 북부의 노예제 폐지론자는 이상에 불타는 개혁가로, 남부의 노예제 옹호론자는 시대에 역행하는 한낱 지각이 없는 무리로 비쳤다.

1920년대는 미국에서 지나온 발자취를 미화하는 전통적 역사서술을 비판한 혁신주의 역사서술이 전반적으로 유표되던 시기였다. 학계는 사회를 계층 간의 갈등 구조로 파악하는 새로운 사회경제적 연구방법론을 수용하였다. 이는 볼셰비키 혁명 후 경제적 결정론이 세계 학계를 풍미하던 것과 궤를 같이했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도 남북전쟁은 노예제도를 둘러싼 도덕적 대결이 아니라 북부 산업세력이 남부 농업사회를 정복한 것에 불과하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했다. 역사의 궤도가 경제적 요인에 따라 귀결된다고 보는 시각에서는 역사의 진행을 담당하는 주체측의 도덕성은 부정되고 그들이 가진 냉정한 경제적 지배욕만 드러날 뿐이었다. 이에 따라 패망한 남부 노예주의의 부도덕성은 면죄부를 받은 셈이고, 이 시대의 대중은 '바람과 함께 사라진' 남부의 환영에 매료되었다. 결국, 혁신주의 사조는 미국 전체의 역사와 더불어 남부역사에 대한 재평가를 가져왔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대제국으로 떠오르자 다시금 미국의 탁월함을 예찬하는 합의주의 역사가가 부상했다. 냉전구도하에서 공산주의와 대결하기 위해, 미국인은 원래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숭고한 가치관을 갖고 나라를 건설했다는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나, 다양한 이민은 미국이라는 용광로에서 동질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용광로 이론(Melting Pot)을 내세우며 미국인 사이의 대동단결을 강조했다. 그 결과 다시 한번, 미국의 통일성과 응집력을 해치고 지역적 특성을 고집, 고수하던 지난날 남부 노예제 옹호론자는 역사적 의식이 없고 비도덕적 타락한 군상으로 전락했다.

1960년대 반문화와 신좌파의 대두는 또 한 번 거듭해서 이러한 역사해석을 뒤엎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시기에는 1920년대 남부 사가의 학문적 업적을 재평가하는 노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 결과 지금은 학계 흔히 알려진 이론, 예를 들면 북부의 노예제 폐지론자도 남부인과 마찬가지로 인종주의자였다는 설이 유행처럼 퍼졌다. 이 이론을 더욱 밀고 나가면, 북부인의 노예제도 반대는 결국 위선적이며, 다른 지역의 문화를 존중할 줄 모르는 자기중심적인 처사에 불과하였다는 설이 된다. 이를 더욱더 확대하여 해석한다면, 노예해방과 같은 큰 개혁도 결국은 북부의 이기주의에 따라 영도되었으므로, 미국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건국이념을 위해 한 일이 전혀 없으며, 그러한 개념은 미사여구에 그치는 신화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이 혹독한 자기 비판적 역사서술은 미국의 건국이념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기보다는 그것을 올바르게 실현하기 위해서 여태껏 소외되었던 흑인을 미국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끌어안아만 한다는 긍정적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다.
 
이렇게 한 세기 동안 번복에 번복을 거듭한 노예제도에 대한 시각 변화는 결국 이 논쟁에 다양한 해석을 가져다주면서 풍성한 논의의 장을 마련해 주었다.


신은 과거를 바꿀 수 없지만, 역사가는 그럴 수 있다. _새뮤얼 버틀러


그 시대의 역사적 인식이나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역사관은 바뀔 수 있다. 또한, 그 시대 안에서도 생각의 차이 때문에 충분히 다양한 관점이 나올 수 있다. 이런 다양한 관점이 모여 역사를 만들어 간다. 이렇게 생각하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어떤 역사적인 사건이나 설명이 교묘하게 위장되거나 거짓말로 포장되면 이를 알아차리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매번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하지만 역사가는 자신의 말이 아니라 '사실'이 말하고 있다고 말한다.

사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너무 많은 말을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목소리로 듣는다. 그리고 그것이 참된 목소리라고 너무 쉽게 믿어버린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하지 않을까. 사실 뒤에서 누가 말하고 있는가. 왜 그렇게 말하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_고병권,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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