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주 새로 나온 책

2014.04.10 07:30 行間/새로 나온 책

역사적 예수의 실체를 꾸준히 쫓아온 독자에게 레자 아슬란의 <젤롯>(와이즈베리, 2014)은 복습이다. 그런데도 이 책은 흥미롭고 충격적이다. ‘열심’을 뜻하는 젤롯(zealot)은 원래 토라(모세5경)와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하고 이방신을 섬기지 않으며 하느님의 주권에 무조건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열심’은 유대가 로마의 속주가 된 기원전 63년부터 이스라엘 땅에서 로마인과 로마에 빌붙은 유대 지배층을 무력으로 물리치는 것으로 바뀌었다.

예수는 하느님의 땅인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방 군대와 부정한 권력을 몰아내겠다는 예언자 겸 혁명가들이 속출하던 시기에 태어나고 자랐다. 기원후 1세기 동안 유대인이 살던 땅은 종교적 열망과 정치적 변혁이 합쳐진 ‘메시아 운동’으로 들끓었고, 메시아를 자처하는 숱한 혁명가들이 십자가형을 받았다. 예수에게 세례를 준 세례 요한도 메시아 운동을 벌이다가 헤롯에게 참수되었고, 곧 그 뒤를 예수 자신이 따를 터였다. 마가복음·마태복음·누가복음·요한복음에서 가장 극적인 대목은 성전 정화 사건으로, 대제사장 무리에게 체포된 예수가 폰티우스 필라투스(본디오 빌라도)에게 넘겨져 재판을 받는 장면이다. 네 복음서의 기자는 필라투스를 예수와 진리를 논한 사람, 예수를 살리기 위해 힘껏 애를 쓴 사람, 마지막엔 자신은 이 일에 아무 책임이 없다고 선언한 정의롭지만 의지가 약한 사람으로 묘사한다.

지은이는 필라투스와 예수, 필라투스와 산헤드린(유대 최고 의결기관) 사이의 ‘밀당’은 아예 없었다고 말한다. 잔학하고 무자비했기에 어느 총독보다 오랜 기간 동안 유대를 다스릴 수 있었던 필라투스가 굳이 또 한 명의 흔하디흔한 메시아 운동가를 대면할 이유도 없었으며, 복음서 외에는 유월절 축제 기간 중에 죄인 한 명을 특별히 사면해 주는 관례에 대해 증언하는 어떤 역사 문헌도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 처형은 로마제국에 대항한 반역자에게 국한되는 로마의 처형 방식이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의 십자가 꼭대기에 ‘유대인의 왕’이라 쓰인 패를 붙였다. 이것을 죄 패(titulus)라고 하는데, 예수의 죄목은 로마제국에 대한 구체적인 반역죄를 가리키지 결코 야유하기 위해 붙인 게 아니다. 예수의 양쪽에 그리스어로 레스타이(lestai)로 불리는 두 명의 범죄자가 함께 처형됐는데 흔히 ‘도둑’으로 번역되는 레스타이는 실제로는 강도(bandits)이며, 이 단어는 로마에서 봉기나 반란을 일으킨 사람을 가리킨다.

네 복음서의 기자들은 유대 민족주의자였던 예수의 혁명적 성격을 누그러뜨리고 혁명에 실패한 역사적 예수를 천상의 존재로 바꾸는 일에 고심했다. 예수가 죽은 지 40년이 흐른 기원후 70년부터 예수의 행적을 전승한 이들은 유대 땅에 사는 정통 유대인이 아니라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하면서 그리스-로마 문화와 교육을 받은 외지인들이다. 기원후 66년에 일어난 유대인의 반로마 폭동을 알고 있었던 이들은 유대 고유의 ‘열심’을 유지하면서 로마의 증오를 감내하는 길과, 과격한 유대민족주의와 결별하고 예수를 평화주의 설교자로 윤색하는 길 가운데 후자를 선택했다.

이들이 예수의 죽음에 대한 로마 총독의 책임을 벗겨주고자 한 것은 순전히 효과적인 로마 선교를 위한 것이었으나, 바로 그것이 이천년에 걸친 반유대주의 토대가 되었다.

젤롯
레자 아슬란 지음, 민경식 옮김/와이즈베리

예수가 평화주의 설교자로 윤색된 사연
“세상을 뒤엎어야 한다!” 인간 예수의 민낯 핍박에 맞선 혁명가
예수, 신의 아들인가 사회혁명가인가
당신은 혁명가가 맞습니까
예수는 열정의 정치적 혁명가였다"
이슬람교도가 ‘편견 없이 쓴 예수’
무슬림이 본 예수…"그는 혁명가였다"
[김환영의 글로벌 인터뷰] '예수 전쟁' 부른 책 『젤롯』의 저자 레자 아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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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희망’이라는 제목의 문구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저자는 사회주의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자유와 정의를 위한 희망’이라고 믿는다. 물론 예상되는 반론은 ‘백 년도 더 된 낡은 이념’이 어떻게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있겠느냐는 것인데, 저자는 두 가지 전략을 통해 이에 답하고자 한다. 하나는 과거 사회주의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사회주의에 대한 그릇된 인상을 교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사회주의의 비전과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이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라는 현실적 조건 속에서 다시 사회주의를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본주의가 ‘자유와 정의’를 위한 체제가 아니며 따라서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굳이 마르크스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성취이고 급진적이고 혁신적인 체제”이다. 자본주의는 그 이전의 권위주의 시대를 해체하면서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울 수 있는 공간과 권리”를 가질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하지만 자본주의자들은 이 가능성에 저항하면서 그것을 파괴하는 정치사회적 환경도 만들어냈다. 자본주의적 사회화에 맞서서 해링턴은 이와는 다른 방향의 ‘사회주의적 사회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라는 또 하나의 약속이라고 할까.

물론 20세기에 우리가 경험한 역사적 사회주의 혹은 현실 사회주의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자본주의적 국가주의화를 ‘잘못된 사회주의’라고 비판했지만, 옛 소련으로 대표되는 ‘독재적 공산주의’ 역시 ‘자유와 정의의 걸림돌’이었던 건 마찬가지였다. 무엇이 문제였던가. 저자는 ‘사회화’의 의미에 대해서 정작 사회주의자들이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과 대표적 사회주의 이론들이 근본적인 오류를 포함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잘못된 이론적 기초 위에 세워진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적이지 않은 사회’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그럼 사회주의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해링턴은 현실 사회주의를 “생산수단은 국유화되어 있지만 민중은 이론적으로만 경제를 지배할 뿐”인 집산주의 체제였다고 규정한다. ‘가짜 사회주의’라는 것인데, 핵심 원인 가운데 하나는 민주주의에 대한 과소평가에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 아래서는 민주주의가 완벽하게 구현될 수 없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정치적 평등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꾸로 사회주의 아래에서만 민주주의가 제대로 존립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하지만 레닌은 민주주의 그 자체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취급했다.” 이러한 생각이 필연적으로 옛 소련을 볼셰비키 독재와 스탈린의 일인 독재로 몰고 갔다. 소비에트 모델이 몰락한 이유다.

이러한 과오를 딛고 우리가 준비해야 할 새로운 사회주의는 어떤 것인가. 해링턴이 제안하는 사회주의는 민주적 지배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주의적 사회화다. 이것은 단기간에 가능하지 않은 장기적인 변화이자, 다수의 지지가 꾸준히 확보될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사회적 힘을 결합시킬 필요가 있으며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와 문화의 영역에서도 장기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도덕적 · 지적 개혁을 포함하는 사회주의적 전환은 “마르크스를 포함해 다른 사회주의자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리고 근본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반사회적인 사회에 맞서는 사회주의적 사회화는 불가피하다. 개인과 공동체의 자유를 구현할 수 있는 공간을 우리가 여전히 꿈꾼다면, 현실 사회주의의 패배와 배신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는 아직 우리의 희망이다.

오래된 희망, 사회주의
마이클 해링턴 지음, 김경락 옮김, 김민웅 감수/메디치미디어

20년전 美 운동가의 외침 "사회주의의 몰락, 그럼에도…"
사회주의는 아직 우리의 희망이다
자유와 정의, 빨갱이 덕분…마이클 해링턴 ‘오래된 희망 사회주의’
암 투병하며 쓴 한 사회주의자의 유언장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와 정의 사회주의 있었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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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저술가 정지우는 '분노사회'를 통해 모두가 알고 있지만 깊이 생각해본 적 없는 분노에 관한 심층 분석을 시도한다. 우리 속에 가득하지만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분노라는 감정으로부터 출발해 한국사회에 접근한다. 사회와 연계한 감정은 자연적인 반응이라기보다는 사회라는 관념에 상응하는 감정이다. 분노는 기쁨, 슬픔, 두려움, 당혹감 등 다른 감정들과 달리 관념에서 촉발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원래 분노란 생존과 자기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감정이지만, 현대인은 더 이상 생존과는 거의 관련 없는 방식으로 분노를 생산한다. 분노가 발생하는 조건이란, 자신이 가진 관념이 현실과 어긋날 때 혹은 자기 내부에서 관념이 이미 어긋나 있을 때다. 이러한 불일치는 인간에게 부적절감을 만들어내며, 이 어긋남과 부적절감이야말로 분노의 원천이다. 분노에 관한 이러한 명확한 개념 규정은 이후 분노사회의 문제를 분석할 때 가장 중요한 전제로 제시된다.

나아가 정지우는 게일린의 '증오' 개념을 통해 분노가 증오로 발전하는 현상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분석을 한다. 특히 여기에서 저자는 집단 정체성과 시기심의 문제를 제기하는데, 이는 사회의 분노를 규명하는 데 핵심적인 준거 틀이 된다.

한병철 교수(베를린예술대)의 '피로사회'는 철학적 관점에서 독일 사회를 '피로'로 진단한 독창성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그 영향으로 한국에서도 '사회'라는 이름을 붙인 많은 책이 나왔지만, 한병철이 독일 사회를 철학적으로 분석한 것처럼 한국 사회를 하나의 철학적 테마로 분석한 경우는 보기 드물었다. 정지우는 한국 사회의 핵심적 면모를 '피로'가 아닌 '분노'로 파악하면서 우리 사회의 모습과 그 속의 인간상을 풀어냈다.

그는 분노가 관념에서 촉발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한국 사회의 가장 문제있는 관념으로 '집단주의'를 꼽는다. 일제 강점기와 독재 정권의 유산으로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집단주의는 갈등과 병폐, 분노를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는 주장이다. 한편, 그에 대항하며 출현한 개인주의도 많은 경우 폐쇄적으로 퇴행해 새로운 증오 현상을 나타낸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진정한 개인주의가 사회에 정립돼야 함을 강조하면서 이처럼 집단주의와 퇴행적 개인주의 사이에서 압사당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한다.

분노사회
정지우 지음/이경

집단주의, 한국 망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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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중반 변호사인 존 그린은 돈 문제 때문에 아내와의 불화가 심하다. 그는 아들의 양육권을 잃을까봐 이혼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 이혼하면 아내에게 줘야 할 위자료도 아깝다고 여긴다. 비참한 결혼 생활이지만 마음만은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 이런 행복한 기분은 행복한 삶이 아니라 항우울제인 프로작 덕분이다. 약을 먹고 불행감은 사라졌지만 불행의 원인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린은 최악의 결혼 생활 속에서도 행복감을 느끼는 자신이 묘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이렇게 말한다. “제 아내는 여전히 나쁜 X이죠.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어요. 뭐 어쨌든 기분이 좋아졌거든요.”

40대 중반의 앨런 클라크는 실직 상태다. 하루 종일 일하는 여자친구가 집에서 뒹굴고 있는 그에게 화를 낼 때마다 수치심을 느끼곤 했다. 자책하는 일이 잦았고, 밤에 도통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프로작을 먹은 이후 그는 애인의 비난에 무덤덤해졌고, 실업에 대한 걱정도 많이 줄었다. 직장을 구하는 일도 전보다는 덜 열심이다. 클라크의 삶은 투약 여부를 빼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는 행복감을 느낀다.

마취과 전문의이자 정치학 박사인 저자는 그린이나 클라크가 ‘인공행복’(Artificial Happiness)을 느끼는 전형적 사례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저자가 만든 용어인 인공행복은 프로작이나 졸로프트 같은 항우울제나 대체의학, 강박적 운동(피트니스)으로 만든 행복을 뜻한다. 인공행복의 특징은 삶을 부정하는 힘이다. 앞선 사례처럼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도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나쁜 일이 일어나도 여전히 유쾌하다.

앨리스 허드슨의 사례에서 인공행복의 어두운 측면을 더 들여다볼 수 있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그녀는 결혼 뒤 성격 때문에 남편에게 업신여김을 당했다. 남편은 아내를 깔보면서 냉소적 태도로 일관했다. 소심한 그녀에게 짜증을 내며 종이뭉치를 집어던지기도 했다. 주치의는 항우울제를 처방했다. 약을 먹고 기분이 나아진 그녀는 심리적 학대가 지속되는 결혼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저자는 “항우울제가 가져온 인공행복은 그녀를 폭력적인 관계 속에 가둬버리고 삶을 변화시킬 의지를 앗아가버렸다. 졸로프트가 그녀 주위에 인공행복이란 견고한 요새를 구축하자 굳이 남편의 행동을 변화시키려는 고단한 과정을 겪을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부부간의 분노-미안함-화해의 건강한 순환과정은 사라졌다. 남편의 공격과 아내의 무시만이 남은 것이다.

여러 사례에서 보듯 인공행복은 변화 욕구 자체를 ‘치료’해버린다. 저자는 “심각한 우울증 환자가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이 경험하는 일상적인 불행감에 인위적인 행복감을 덮어 씌우는 것은 그들의 삶을 더 이상 반전의 동기를 상실한 무덤덤한 안락감으로 채워버릴 수 있다”고 말한다.

예전 의사는 슬픈 환자를 상담하며 위로를 건넸다. 1960년대 후반 의사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환자들이 먼저 변했다. 그들은 의사를 더 이상 자기들의 행복을 위해 일하는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환자를 놓치기 싫었던 의사들, 특히 일차 진료의는 대중의 요구에 부응해 삶의 불행에 보다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른 방법이었다. 즉 불행에 대해 ‘기술공학적’ 접근을 한 것이다. 이들에게 삶의 불행은 목의 통증이나 감기같이 약으로 고칠 수 있는 생화학적인 문제일 뿐이었다. ‘불행은 질병의 일종’이란 신념은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신념 속에서 항우울제 및 기타 치료적 개입을 공격적으로 시도하곤 한다. ‘불행은 병이다’라는 개념은 의사의 일방적 처방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런데 미국 현실에서 일차 진료의가 환자 한 명에게 투자한 시간은 평균 13분이다. 의사는 짧은 면담 시간에 환자의 토로를 듣고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 때문”이라고 말한 뒤 처방전에 항우울제를 써준다. 처방은 자동반사적인 게 되어버렸다. 대중의 요구에 부응한다는 그들의 애초 이상도 사라졌다.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환자에게 투약을 강요하는 세태로 변한 것이다. 저자는 이를 두고 ‘정신작용약물 스캔들’이라고 부른다.

냉전 시대 구소련의 정신과 의사였던 안드레 스네즈네브스키는 ‘나태성 조현병’이라는 정신장애를 고안했다. 현재 자신의 처지에 불만을 갖거나 사회의식 철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또는 세상을 개선하겠다는 ‘과대한’ 생각이 이 병의 주 증상이었다. 모스크바에서 높은 유병률을 보였다. 스네즈네브스키는 관계 당국과 공모해 반체제 인사에게 나태성 조현병이란 진단을 내리고 병원에 감금했다. 의학이 이데올로기로 변한 사례다.

저자는 불행과 슬픔이 질병이라는 미국 의사들의 신념도 명확한 이데올로기라고 말한다. 이데올로기의 태동에는 의사들의 위기의식, 이상적 의료행위에 대한 새로운 세계관, 변화를 정당화하는 과학적 이론 등 세가지 필수 요건이 작용했다. 1960년대 후반 의사들의 직업적 위기감은 ‘불행은 병’이라는 세계관을 만들었고, 이는 정신작용약물 이데올로기로 이어졌다. 이들은 단기아민 가설이라는 과학적 이론을 제시했다. 1980년대 후반 등장한 대체의학의 세계관은 ‘마음이 몸을 치료한다’였다. 이들은 정신신경면역학 이론의 지지를 받았다. 경증 우울증 환자에게 처방하는 허브요법, 명상요법, 자기요법, 향기요법 같은 일상적 행복에 관한 치료법은 환자의 삶을 그대로 둔 채 기분만 좋아졌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인공행복’이었다.

엔도르핀 가설에 입각한 운동요법은 불행감을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의 강박적 운동 이데올로기였다. 엔도르핀 가설은 체내에서 분비되는 내인성 마약을 통해 행복감을 얻는다는 것으로 ‘러너스 하이’가 대표적인 사례다. 사람들은 또 피트니스 목표를 정한 뒤 그 목표를 달성하면서 뿌듯한 기분을 느낀다. 삶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피트니스 문화에서는 뱃살이 빠지면 성공한 삶이다. 저자는 이를 대안적 행복일 뿐이라고 했다. 자신의 목표가 다른 사람에게 주목받거나 존중받지 못한다면, 제 아무리 운동광이라도 흥미를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70~1990년대 정신작용약물, 대체의학, 강박적 운동이라는 세 유형의 이데올로기는 속도를 내며 성장했다. 이 와중에 관리의료가 지배적 세력으로 성장했다. 관리의료의 주체인 의료보험회사는 의료계가 경시하던 예방의학과 웰니스(wellness)를 끌어들여 대중의 주목을 모았다. 관리의료는 대중에게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 것이라는 희망과 꿈을 선전했다.

저자는 “인공행복이 사람들을 비참한 현실이라는 지옥에서 꺼내주었지만, 연옥에 다시 가둠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위해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변화를 막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가 인공행복을 비판하는 가장 큰 이유다. 인공행복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거나 행복하려고 하는 욕망을 제거한다. 삶의 중요한 변화를 외면하게 만들면서 최악의 현재 상황에 안주하게 만든다. “인공행복은 거짓에 대한 반감을 잠재우며 저물어가는 특정 삶의 단계가 훨씬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는 “삶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잘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인생의 보편적 목적은 행복이지만, 이는 불가능한 목표다. 변화와 지루함, 병듦, 죽음과 같은 것을 피할 도리가 없다. 지속적 행복은 환상”이라면서 “두려움과 불행 같은 느낌은 육체적인 고통만큼 건강한 삶에 있어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뜨거운 접시를 만질 때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화상을 입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두려움과 불행은 삶의 보호막 역할을 할 수 있다. 또 불행은 더 행복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한 기회를 주기도 한다. 불행은 고통스럽지만 필수적인 부분인 것이다.

저자는 인공행복을 만드는 정신작용약물, 대체의학, 강박적 운동의 모든 측면을 부정하지 않는다. 대체의학을 비판적으로 다룰 때 백인 의사의 우월주의로 접근하지도 않는다. 그가 제시하는 대안은 사회적이다. 약을 먹고 비참한 현실에 침묵한다면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양심까지 침묵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삶과 상관없이 행복할 수 있다면 우울할 때 위로해줄 사람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우선 인공행복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의료 교육이나 의사의 직업적 소명의식도 바꾸어야 한다. “약물처방만 하는 게 아니라 불행한 환자에게 따뜻한 위로와 사려 깊은 조언을 해주어야 한다. 단순한 의료기술자가 아니라 한편으로는 의사이자 한편으로는 사회복지사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목사나 신부의 자질을 두루 갖추어야 한다.” 의사는 환자를 이해할 수 있는 보통사람이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저자의 결론적 대안은 난도 높은 철학적 성찰과 실천이다. 그는 “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를 위해 세계의 위대한 신념과 철학에 대한 책을 몇 권 사서 한 달만 열심히 읽어보라고 조언한다. “인류가 지금까지 고민해 온 문제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발견한 수 있다. 그렇게 얻은 답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며 행동을 변화시켜 나가면 된다. 그리고 양심에 맞게 살아가면 된다.

행복의 역습
로널드 W. 드워킨 지음, 박한선.이수인 옮김/아로파

‘불행’을 덮어씌우는 ‘인공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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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거나 과중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면 1000가지 부탁을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스티브 잡스의 말로 유명한 이 주장은 다른 이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시간에 쫓기거나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기도 하다. 우리는 왜 수많은 상황에서 거절하지 못하는가.

거절의 큰 의미는 ‘단호함’이며 ‘변화의 시작’이다. 책은 사람들이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와 그들의 심리, 삶에서 거절이 갖는 의미 등을 폭넓게 다뤘다. 현명하게 거절하는 방법도 소개했다. 공공 비즈니스 분야에서 25년간 활약해 온 저자에 의하면 ‘거절하기’는 곧 가장 나답게 살기 위한 기초적인 권리다. 단 거절을 할 때는 그것이 진심이어야 한다. 저자는 ‘한마디로 거절하라’ ‘능력 이상의 일 맡지 않기’ 등 자신을 위한 삶을 위해 어떤 거절이 좋은지 오랜 세월 연마한 통찰력으로 풀어냈다.

친한 친구가 부탁을 할 때 거절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능력 여부와 상관없이 죄책감이 따르기 때문.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 때는 그가 정말 중요한 존재지만 이번에 한해선 거절해야 한다는 걸 주지시켜야 한다. 가끔은 “미안하지만 당장은 도와줄 수 없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가족의 부탁을 거절하는 일은 훨씬 더 어렵다. 하지만 결코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실속있는 인생을 위해서라도 이제 내 것이 아닌 ‘거절’의 짐을 조심스럽게 내려놔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왜 거절을 못하는가
마리자 만레사 지음, 이진원 옮김/아비요

단호하게 현명하게 거절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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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즘 국민TV에서 '을아차차'라는 프로그램에서 우리 사회 각계각층의 '을'들이나 '을'들과 함께 하는 인사들과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3월 27일에는 전태일 열사의 동생인 전순옥 의원과 대화를 나눴는데요, 너무나 찡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문제의식은 이런 것입니다. 누가 그 험난했던, 그 고통스럽던 시절의 경제발전과 가난 문제의 해결을 박정희의 공으로 돌리는 것이냐? 그때 60년대, 70년대 하루 17~18시간까지 노동했던 사람들의 피눈물과 피땀은 왜 이야기되지 않고 있느냐?

전순옥 의원은 본인이 직접 봉제노동자로, 시다로 밥 먹을 타이밍을 놓치고 잠을 애써 쫓고 일하다보면 온 몸이 하늘에 붕 뜬 느낌이 든다는 경험담을 들려주었습니다. 화장실도 못 가게 하는 사실상의 강제노동에 시달리다보니, 당시 10대 소녀 노동자들이 서서 소변을 보면서 (말도 못하면서) 일을 한 것이 바로 산업화이자 경제발전의 과정이었다고 담담하지만 힘주어 강조하였습니다. 이 대목에서는 서로 눈시울이 붉어졌지요.

한국의 경제 발전이 순전히 박정희의 공이라고 떠들어대는 것은 실재도 근거도 없을 뿐 아니라, 누가 진정한 경제발전의 주역이었는지를 이 이야기를 통해 금세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박정희가 경제발전을 이끌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조작'이고 '허위'이며 '환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미국에서는 대형마트와 유통대기업이 자유 시장 체제에서 자유롭게 이윤을 추구한다는 한국의 일부 '신자유주의자'들이나 '시장만능주의자'들의 주장 역시 조작이고 허위이고 환상임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요?

저는 대형마트와 SSM 저지 운동, 경제민주화 운동, 지역경제 및 중소상공인 살리기 운동을 10여 년간 전개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각종 소식과 정보를 통해서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 나라들에서 유통 대기업의 탐욕과 폐해를 규제하고, 작은 경제 주체들의 생존을 위해 크고 작은 각종 사회적 규칙을 적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자리에서 소개할 <지역경제와 대형마트>(하라다 히데오 지음, 김영기·김승희·강성한 옮김, 한울 펴냄)를 통해 결정적으로 그런 점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대형마트가 국민들에게 여러 가지 사회적 비용을 요구하고 있다면?

요 즘 동네를 걷다 보면, 문구점, 꽃집, 서점, 공구상 등 동네에 꼭 필요한 가게들이 거의 없어졌거나 쇠락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많던 가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동네 슈퍼마켓이나 전통시장이 아예 통째로 문을 닫은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 많던 가게들이 없어진 자리에는 어김없이 대형마트와 대기업 프랜차이즈들만 넘쳐나고 있는데, 이는 정말 좋은 일일까요? 그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일일까요?

한국만 유독 중소상공인 살리기니 지역경제 활성화니, 또 경제민주화니 운동을 하고 캠페인을 하고 '중소상공인 살려 달라'고 야단법석을 떠는 것일까요? 그런데 시장 자본주의의 상징이라고 하는 미국에서도 대형마트(big box)의 출점에 대한 다종다양한 사회적 논란과 적절한 규제와 노동계와 지역사회의 저항이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지역경제와 대형마트>에서는 월마트의 사례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월마트의 폐해로 이야기되고 있는 것만 봐도 10가지가 넘습니다. 이것은 2004년 2월 당시 미국 하원의 교육노동위원회 소속인 조지 밀러(캘리포니아 주) 의원이 주도한 '밀러보고서'를 통해 공론화됐는데, 이 보고서의 제목이 "매일 낮은 임금, 우리는 숨겨진 가격을 월마트에 지불하고 있다”로 매우 인상적입니다. (95~96쪽)

이 보고서의 타이틀은 월마트의 캐치프레이즈인 "매일 낮은 가격"을 비꼰 것입니다. 즉, 매일 낮은 가격이라는 것의 실체는 매일 낮은 임금과 매일 낮은 세금으로 이어지고, 그를 통해 월마트가 국가와 지역사회에 막대한 비용을 전가하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밀러보고서는 구체적으로 종업원의 단결권, 저임금, 불평등한 임금과 처우, 시간외 노동, 아동노동 및 휴식과 관련된 위반행위, 종업원과는 거리가 먼 보건의료, 납세자에게는 높은 부담을 의미하는 저임금, 불법노동자의 사용, 노동의 해외 이전으로 인한 미국 내에서의 실업 발생, 장애인 차별, 종업원의 안정성을 문제점으로 뽑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당연히 미국의 정치권, 시민사회, 지역경제의 구성원들이 월마트와 대형마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저항과 규제를 시도하고 있는 상황을 이 책은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저자는 미국에서 대형마트의 개발과 개점 등이 매우 자유롭다는 해석은 완전히 잘못 알려진 것임을 강조합니다. 개발토지·이용규제제도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조닝(ZONING) 제도를 통해 영업시간 규제나 업종·업태 규제, 체인점 규제, 빈 점포 대책의 의무화 등 경제활동, 영업활동에 대한 규제를 하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책 4장)

그래서 저자는 적어도 소매업에 관해 미국은 정부 개입이 없는 자유로운 시장과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하고 있고, 그런 잘못된 환상이 저자의 나라인 일본에서 널리 퍼져있다고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중소기업청 등에서 일하는 이 책의 번역자들도 그것이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가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책 당국이나 거짓을 일삼아온 신자유주의자들이 이 책을 반드시 읽어봤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지역경제와 대형마트>에서 지적하는 대형마트들의 문제점들이 한국의 유통 재벌·대기업들의 폐해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대형마트의 문제점은 세계적인 차원의 이슈라는 사실을 또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다만 대형마트의 반노동, 저임금, 노동통제, 시간외노동, 지역경제 황폐화, 중소상공인 생존권 파괴, 다른 노동자들에 대한 악영향 등에 대한 비판은 거의 동일한데, 한국의 시민사회에서 크게 비판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언급이 눈에 띕니다. 그것은 "납세자에게는 높은 부담을 의미하는 저임금", "매일 낮은 세금"이라는 미국사회의 지적입니다.

즉 미국에서도 매우 낮은 임금을 받고 있는 월마트 종업원들은, 미국 대기업의 평균 기업보험 가입률이 66%인 것에 비해 41~46%로 매우 낮은 가입률을 보이고 있습니다. 보험에 가입하고 있지 않아서 병에 걸릴 경우 종업원만의 문제가 아니라 월마트 종업원이 생활하고 있는 지역 및 지자체에도 부담을 전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험에 가입할 수 없는 종업원이 병에 걸렸을 때 가장 많은 경우 공립병원의 응급실로 갑니다. 공립병원의 응급치료 시스템의 유지 및 운영비의 상당부분은 세금으로 충당됩니다. 그래서 기업보험 유지에 필요한 비용에서 월마트가 절감하고 있는 그 금액만큼을 세금에 의한 공적부담으로 전가시키고 있다는 것이죠. (127쪽)

그뿐만 아니라 월마트 자체가 각종 꼼수를 부려 세금을 덜 내고 있거나 덜 내려하고 있고, 미국이 정한 최저빈곤선과 비슷하거나 그것보다 못 받는 월마트 노동자들 역시 세금을 덜 낼 수밖에 없어서 결국 월마트의 낮은 가격은 다른 국민들의 높은 세금 부담으로 연결된다는 것도 대형마트의 엄청난 폐해라는 지적입니다.

예를 들어 펜실베니아 주 정부가 공표한 자료에 의하면, 2005년 7월부터 9월까지 주의 공적의료보험인 메디케이드에 가입한 사람의 총수 중 월마트 종업원이 무려 15.8%(7577명)을 차지해 가장 높았고, 그로 인한 주의 부담은 월마트 종업원만으로도 1년간 1500만 달러 이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129쪽)

또 이 책은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 미국인은 디스카운트(discount)에서 쇼핑을 하는 것이 자신들의 생활을 보다 윤택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헤어 드라이기를 구입하는 데 7달러를 절약하는 것이 미국을 더 좋은 나라로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틀린 것이다. (…) 어쩔 수 없이 폐점한 지역 경영자들은 지역의 경제적·사회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중류계급층이었다. 그들은 지역 여러 조직의 주역이었다. 그들은 병원이나 도서관의 이사를 역임하고 있었다. 어린이 야구단의 운영비를 부담하고 있었다."(267쪽)

참으로 탁월한 비평이라 할 것입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평론가로서 뉴어바니즘(New Urbanism) 주창자의 한 사람인 쿤스틀러의 말인데, 쿤스틀러는 이것을 "헤어 드라이기 7달러의 거짓말"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길 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는 우리가 한국 여러 지역에서 확인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사회적·지역적 대책이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지역 점포의 존속은 커뮤니티의 성격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그들이 쏟고 있는 개개인에 대한 주의와 관심은 질 높은 서비스뿐만 아니라 커뮤니티의 토대가 되는 사람과 사람과의 연결을 창출해내고 있다"(268쪽)는 이 책의 언급은 매우 설득력이 높습니다. 쉽게 말해서 동네가 동네답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지역 중소상공인들의 생존과 유지는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 책을 읽고서도, 이런 문제의식과 지적을 접하고서도 계속 우리는 대형마트를 다녀야 할까요? 진지하게 여러분의 생각을 여쭤보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시 장 시스템은 그것이 어느 정도 다양한 선택의 여지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선택의 여지에서 매우 중대한 것이 배제되거나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들의 선택을 결정해버리기도 한다. 우리가 하는 선택은 결국 시장 시스템이 지배하는 가치관에 의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선택의 대부분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413쪽)라는 이 책의 말과, "우리들은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지 경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421쪽)라는 밥 오르테가의 말을 소개하면서 글을 맺습니다.

지역경제와 대형마트 - 10점
하라다 히데오 지음, 김영기 외 옮김/한울(한울아카데미)

자유 경쟁은 자유로운 선택? 아니, '환상'이다!
월마트 때문에 美제조업 망쳤다?‥'지역경제와 대형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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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제학 분야에서 유명한 말이 있다. 200여년 전, 애덤 스미스가 자원 배분의 효율성을 이루는 시장 기능을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자유경쟁시장에서는 재화에 관련되어 계획하고 조정하는 사람 또는 시스템의 존재가 불필요하며, 시장 스스로가 조정을 한다고 보았다. 이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작은 정부론의 중추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보이지 않는 손'이 경제학 분야의 시장을 설명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세계 역사를 설명하는 데에도 통용되고 있다면? 더군다나 그것이 버젓이 실체를 띠고 있다면? 그럼에도 '보이지 않는 손'이라 칭하는 이유는, 이것이 실체를 띠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실체를 알아차린 몇몇 사람들이 역사를 바꾼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극작가, 어부, 항만 노동자, 법률가 보조원, 요리사, 제빵사의 직업을 거쳐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 활동 중인 '마크 쿨란스키'는 <대구>(RHK)라는 책을 통해서 인간의 역사를 변화시킨 주인공이 바로 대표적 어류 중 하나인 '대구'라고 밝혀내고 있다.

작년에 <멸치 머리엔 블랙박스가 있다>(부키)를 펴낸 물고기 박사 황선도에 따르면, 대구(학명 Gadus macrocephalus. Cod)는 명태와 더불어 우리나라 대구과 어류를 대표한다. 참고로 명태에는 '왕눈폴락대구'라는 다른 이름이 있다.

대구는 최대 크기가 1미터가 훌쩍 넘는 대형 어종인데, 2000년대 들어 어획량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본래 제일 흔한 어류임에도 맛이 일품이라 많은 사랑을 받았었는데, 어획량이 1990년대에 급감해서 침체기를 겪었다고 한다.

마 크 쿨란스키의 <대구>는 바로 이 대구의 어획량이 급감했던 1997년에 출간되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어획량이 급감한 1990년대 현재의 비루한 어부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들은 더 이상 예전의 자유경쟁시장으로서의 어업을 행하는 어부가 아니다. 이제는 정부의 보조를 통해, 대구를 잡아 파는 것이 아니라 대구를 잡아 정부 소속 과학자들에게 보고함으로써 대구 어족의 발달 여부를 측정하도록 보조한다. 잡아도 잡아도 끝없이 잡힐 것만 같았던 대구. 이들은 지난 1000년간 흥청망청 이어진 대구 어업에서 하필이면 제일 끝물에 있었다.

이 책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책에 나오는 모든 것들은 결국 대구와 연관이 있다. 즉, 지난 1000년간의 세계가 '대구'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그 안에는 인류의 역사를 바꾼 순간을 연출한 위인들, 전 세계를 호령했던 강대국들,  그리고 인류의 진보를 이끈 세기적 기술들까지. 보다 많은 대구를 낚기 위해 나선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고, 보다 많은 대구를 낚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다 보니 항해와 관련된 기술이 수직으로 상승 발전했다. 또한 이 '대구' 때문에 전쟁과 혁명까지 일어나기도 했다.

"중세 내내 유럽인이 막대한 양의 고래 고기를 먹을 때, 바스크 인은 머나먼 미지의 해역으로 나가 고래를 잡아왔다. 이들이 그처럼 멀리까지 다녀올 수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들은 엄청난 대구 어족을 발견했고, 그걸 잡아서 소금에 절였다. 그래서 긴 항해에도 불구하고 상하지 않고 영양가도 높은 식품을 먹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바스크 인이 사상 최초로 대구를 소금에 절인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여러 세기 전에, 노르웨이에서 출발한 바이킹이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거쳐 캐나다에 도착했는데 이 경로가 대서양대구의 서식 범위와 정확히 같았던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본문 중에서)

대구와 관련된 대표적 전쟁으로, 20세기 중반 영국과 아이슬란드는 대구 어업권을 둘러싸고 벌였던 일명 '대구 전쟁'이 있는데, 그 결과 아이슬란드가 승리 아닌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18세기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미국 독립혁명의 예를 들 수 있다. 당시 미국 식민지는 본국 영국의 과도한 세금 수탈 등으로 인해 불만이 터졌고, 이를 결정적 계기로 독립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미국 식민지가 영국에 대해 불만을 가진 점 중에는 과도한 세금 수탈 말고도 '대구 무역 제한 법'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결정적인 사항은, 독립 전쟁이 끝나고 협정을 맺을 때 가장 중점적으로 논의했던 사항이 바로 '대구잡이 권리' 였다는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살아가는 데 일자리가 세금보다 중요하지 아니한가? 그들에게 있어 대구 어업은 생존과 직결된 사항이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

"아이슬란드의 200마일 영해가 전 세계의 승인을 얻은 이후로 대부분의 국가는 저마다 200마일 영해를 선언하고 나섰다. 전 세계의 기존 어장 가운데 90퍼센트는 최소한 한 나라의 해안에서 200마일 범위 안에 속했다. 이제 어민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야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법률에도 따라야 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물고기를 가능한 한도 내에서 많이 잡는 것이 아니라 허락된 범위 내에서 많이 잡는 것으로 바뀌었다." (본문 중에서)

결국 이 책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즉, 대구의 위상이 땅바닥으로 떨어진 현실로 돌아와 1000년 왕국의 끝물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며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영원할 것만 같은 자연에 대한 재인식. 한 마리가 수백만 마리의 새끼를 낳을 정도로 엄청난 개체 수를 자랑하는 대구가 멸종을 향해 가고 있다면, 이 세상 어느 누가 멸종을 면할 것인가 하는 명확하고도 섬뜩한 메시지인 것이다.

또 한 인간에 의한 일방적인 자연에의 수탈 다시 보기. 끝물에 와서 비로소 인식하고 보호를 하려 하지만 이미 때가 늦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제 와서 자연과 소통하려 해보았자,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은 자연이 받아줄지 의문이다. 대지의 어머니 답게 언제든지 와서 모두 가져가고 언제 그랬냐는 듯 도움을 청하고 그 품 안에서 마음껏 뛰어 놀다가 무한으로 주는 것들을 받고... 그런데 고마워할 줄은 모르는 인간들.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대구
마크 쿨란스키 지음, 박중서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대구(cod)가 미국 독립혁명을 야기시켰다?
세계사를 바꾼 보이지 않는 손은 '대구'?
바이킹 대이동·노예무역…세계사 휘저은 생선 '대구'
대구-세계의 역사와 지도를 바꾼 물고기의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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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섭은 과학과 인문학을 어떻게 배신했는가'라는 도발적인 부제부터 눈에 띈다. 웬만한 영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어려운 단어 'consilience'를 번역한 통섭(統攝ㆍ큰 줄기를 잡다)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합쳐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범학문적 연구를 뜻하는 말로 자리잡았다.

미국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저서 <컨실리언스>(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ㆍ1998)를 제자인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원효 대사가 쓴 말인 '통섭'으로 번역하면서 국내에 본격적으로 알려졌는데, 요즘 이 말은 지식 통합이라는 보통명사가 됐다. 다른 영역 간 교류를 내포하고 있어 소통의 동의어처럼 쓰이기도 한다.

<통섭과 지적 사기>는 박근혜 정부가 내세운 창조경제의 핵심 키워드의 하나로 부상한 바로 그 개념, 통섭을 비판했다. 통섭의 오류를 꾸준히 지적해 온 학자와 전문가 13인의 논문과 에세이를 모았다.

개 별 학문 간 간극과 장벽이 너무 높았던 국내 학계 현실에서 통섭이란 화두는 경계를 허물고 학제 간 협력을 이끄는 순기능적인 역할을 해왔지만 저자들은 불투명하고 다의적으로 쓰이는 통섭의 오류를 지적한다. 우선 미국 물리학자 앨런 소칼이 도발한 '지적 사기' 논쟁부터 소개한다. 지적 사기 논쟁은 라캉, 들뢰즈 등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이 자연과학 개념을 오용한 사례를 들춰냄으로써 자연과학자와 인문학자 간에 존재하는 지적 사기를 제기한 사건이다.

저자들은 윌슨이 말한 통섭에 대해서도 선언적인 외침보다 자연과학과 인문ㆍ사회과학이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더 많이 기울이는 게 먼저라고 강조한다. 특히 윌슨의 발상이 인문학을 자연과학에 종속시키는 '환원주의적 통섭'이라고 비판한다. 김상현 전 동국대 명예교수는 "윌슨의 컨실리언스는 통합과 융합의 치료제가 아닌 종속과 포섭으로 가는 위약(僞藥)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박준건 부산대 교수는 "윌슨의 사회생물학은 인간의 자기이해를 위한 참고사항일 뿐이며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무반성적으로 자연과학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했다. 그는 또 "인간은 생물학 존재이면서 역사적, 사회문화적으로 대단히 역동적인 존재라 복잡하고 역설적이며 어떤 경우는 모순적"이라며 "따라서 성급한 단순화는 문제를 일으킨다"고 덧붙인다.

이남인 서울대 교수는 학제적 연구가 통섭 프로그램에만 국한되면 이는 현실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학제적 프로그램이 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국 사회에서 통섭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대학가에서 통섭학과, 통섭대학, 통섭대학원 등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철저한 학문적 성찰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일상에서 개념의 모호성은 용납되지만 학문세계는 사정이 다르고, 특히 대학, 대학원 등에서 관련 기관을 신설할 때에는 연구와 교육목표뿐만 아니라 그 기관의 사명을 명확히 기술돼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저자들은 범학문적 접근에는 동의하지만 과학이 다른 학문의 우위에 있다는 자연과학 만능주의를 우려하며 편파성을 경계한다. 동시에 지식 융합을 실질적으로 실천하라고 강조한다. 구호를 넘어서는 학제적 협력이나 환원주의와 비환원주의를 적절히 배치하는 메타적 통합 프로그램이 아직 부족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학문 간 소통, 협력, 경계 넘나들기, 통합 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뚜렷해졌지만 주제에 관한 엄밀한 사고와 비판적 토론은 아직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제 통합 개념을 명확히 세우고 실현 가능한 통합의 그림을 그리며 이를 위한 효율적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연구와 토론을 진행해야 한다." 이 같은 고인석 인하대 교수의 말은 통섭에 대한 찬반논쟁과 상관 없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남긴다.

통섭과 지적 사기
이인식 기획, 김지하 외 지음/인물과사상사

통섭이라는 미명으로… 과학에 포섭되는 인문
통섭, 제대로 알고 쓰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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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나는 효소 만드는 것에 '필'(feel)이 꽂혔다. 지난 해 5월 무렵부터 7월 가까이 유달산을 오르락내리락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산 속에 자생한 비파며, 개복숭아며, 복분자를 따서 효소를 담그고자 말이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1년은 못 미치지만 6개월은 충분히 넘은 것 같다. 하여 엊그제 너무나 궁금한 나머지 밀봉한 걸 뜯어내고 맛을 봤다. 와우, 얼마나 새콤하고 달콤하고 맛나던지. 마치 온 몸이 힐링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언론을 통해 새로 접한 소식이 있었다. 효소보다 더 한 단계 위의 건강관리법 말이다. 이른바 식초가 그것이었다. 식초는 발효시킨 효소에 초산균을 넣어 숙성시킨 것으로 사람 몸에 너무나도 이로운 것이었다.

" 일본의 흑초,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포도식초, 미국의 사과식초 등 각 나라에는 그 나라 고유의 전통식초가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그 근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라 수백 년의 식초 역사를 이어온 이웃 나라들을 볼 때 마냥 부러운 마음이 든다."

한상준의 <한상준의 식초독립>에 나오는 말이다. 이 책은 100년 동안 끊긴 한국의 전통 곡물식초를 여러 발품을 팔아 복원한 식초복원기라 할 수 있다. 그는 전통식초를 만들고자 경기도 양평의 농장을 비롯해 경상남도의 현미식초 공장, 전라북도의 현미식초 공장, 경상북도의 감식초 공장 등 전국 방방곡곡을 돌고 돌아 홀로 그 비법을 터득했다.

그 를 통해 알게 된 것은 그나마 우리나라에는 현미식초를 생산하는 곳이 몇 군데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관심을 갖고 있던 '오곡식초'를 만드는 곳은 없었다고 한다. 하여 그가 독기를 품고 오진 마음으로 연구에 몰입하여 만들어 낸 게 오곡식초였다.

왜 하필 오곡식초였을까? 오미자식초는 피로 회복에 좋고, 고혈압 예방엔 현미식초가 좋고, 신경통 예방엔 율무식초가 좋고, 기관지에는 도라지식초가 좋고, 중풍을 예방하는 데에는 삼백초식초가 좋다지만, 오곡식초는 현대병이나 성인병 예방에 정말로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식초는 소화를 촉진하고 변비를 개선하는 효과는 물론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해 조직 세포를 활성화시키고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돕는다. 고혈압이나 동맥경화 예방에도 효과적인데, 이런 사실을 종합해보면 식초는 몸의 독소를 밖으로 배출시켜 피를 맑게 하고 스트레스로 인한 각종 피로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126쪽)

그 는 우리나라의 식초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에틸알코올을 주원료로 하여 강제 발효시켜 만든 '주정식초', 둘은 빙초산 또는 초산을 음용수로 희석하여 만든 '합성식초', 그리고 마지막 셋은 자연 그대로의 과일과 곡물을 이용한 '천연식초'가 그것이라고 한다.

물론 주정식초나 합성식초는 그다지 식초라고 부를 수도 없다고 단정한다. 왜냐하면 그것들 대부분이 석유에서 공업용 빙초산을 추출하는 것들이고, 거기에서 중금속을 제거한 아세트산이 99% 이상을 차지하는 합성식초가 대부분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식당에서 김밥을 만들 때나 피자를 시킬 때 함께 배달되는 오이피클도 모두 그런 종류라고 한다.

그 에 비해 그가 고집스레 연구하여 만든 우리의 전통식초는 어떨까? 그것은 원료자체만으로도 발효와 숙성을 거치기 때문에 아미노산을 비롯한 각종 유기산이 풍부하고, 비타민과 칼슘 성분도 넘쳐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더욱이 맛 자체나 향기면에서도 다른 식초들과 비교할 수 없이 탁월하다고 한다.

식초가 그렇게도 좋다면, 이제는 효소를 넘어 식초의 세계에 홀릭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식초만큼 좋은 만병통치약도 없다고 하니 말이다. 간의 해독작용에서부터 폐의 기능도 활성화시키고, 천식이나 기관지염에 걸릴 확률도 적게 하고, 폐경기 여성의 골다공증도 막을 수 있고, 망막도 깨끗하게 유지시켜 백내장까지도 예방한다고 하니, 그가 일러주는 방식대로 한 번 해보면 어떨까.

한상준의 식초독립
한상준 지음/헬스레터

효소보다 좋다는 식초... 나도 만들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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