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1주 새로 나온 책

2014.06.10 09:00 行間/새로 나온 책

“이윤을 내지 않겠다”고 선언한 빵집이 있다. 일주일에 나흘 문을 열고 일년에 한달 장기휴가를 간다. 이 빵집은 지속가능할까? 와타나베 이타루가 한 손에 <자본론>, 다른 손에 천연효모를 들고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을 시작한 것은 2008년이다. 햇수로 7년째니 지속가능함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와타나베는 이 책에서 시골에 빵집을 내게 된 사연과 이윤을 내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유, 천연효모와 천연누룩균으로 빵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재치있게 소개한다. 특히 제빵 기술을 배우기 위해 취업한 한 빵집의 노동 착취 현실을 고발하는 대목에서 시작되는 ‘시골 빵집의 마르크스 강의’가 인상적이다. 아버지의 소개로 마르크스를 읽게 된 그는 자본가가 가져가는 이윤의 비밀이 ‘노동자가 만들어내는 상품의 교환가치를 넘어서는 만큼의 초과노동시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와타나베의 마르크스주의 실천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생명운동 차원으로 격상된다. 원래 일본 도쿄에서 가까운 지바현에서 빵집을 열었던 와타나베 가족은 깨끗한 물을 찾아 혼슈 서남부 지방인 오카야마현 마니와시의 산골마을인 가쓰야마로 빵집을 옮긴다.

이곳에서 와타나베는 농약은 물론 비료도 쓰지 않는 자연재배 농법으로 밀과 쌀, 채소를 키우는 농가, 대나무로 소쿠리 등을 만드는 전통 죽세공 장인 등을 만나 순환하는 지역경제를 만들어가고 있다. 카를 마르크스와 레이철 카슨이 시골에서 <오래된 미래>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혁명을 외치지 않는다. 낮은 목소리로 ‘체제 밖으로의 탈출’을 권한다.

초과노동시간이 이윤의 원천임을 알게 된 그는 이윤을 내지 않는다. 자연재배한 좋은 재료를 이용해 인공 배양균(이스트)을 쓰지 않고 제대로 만든 빵을 제값 받고 팔아 빵집을 꾸려간다. 일주일에 나흘 문을 열고 일년에 한달 장기휴가를 가도 빵집이 유지되는 비결이 여기에 있다.

이 책을 쓴 와타나베 이타루는 1971년생이다. 그는 자칭 ‘별 볼일 없는 청춘’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삿짐센터 아르바이트로 이따금 돈을 벌어 폭주족 흉내나 내며 살았다. “딱히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달리 할 일도 없었다.”

변화가 찾아온 것은 1994년, 그의 나이 스물세살 때였다. 학자였던 아버지가 안식년을 맞아 헝가리로 가게 됐는데, 어머니가 그의 등을 떠밀어 함께 가게 됐다. 그곳에 사는 일본인들의 모임에서 그는 심한 열등감에 빠지게 된다. 리스트음악원에 다니는 사람, 올림픽 대표선수, 발레리나 등 다들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에 돌아온 그는 대학에 들어가기로 했다. 의사였던 할아버지처럼 의대에 가고 싶었지만 중학교 1학년 교과서부터 다시 공부해야 하는 그에겐 언감생심이었다. 대신 농학부에 합격했다. 경제발전이 늦었지만 전통 식문화가 풍성했던 헝가리에서의 경험이 그를 농업의 길로 이끌었다.

대학 졸업 뒤 유기농산물 도매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나 말이 유기농산물회사지 부도덕하기 짝이 없는 “블랙기업”이었다. 원산지 위조를 예사로 하고, 직원들은 거래업체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아 나눠먹었다. 상사의 리베이트 유혹을 뿌리치고 더 윗선에 사실을 보고했지만 돌아온 건 ‘왕따’였다. 자본주의의 모순과 부도덕함을 절감한 그는 2년 만에 회사를 때려치웠다.

“시골살이나 농사를 여전히 동경했지만 눈앞에는 거대한 유통 시스템에,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의 논리에 농업이 좌지우지되는 현실이 있었다. 농업을 다시 살리려면 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스템 ‘밖’으로 나가야 했다.”

문제는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잠결에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타루, 너는 빵을 만들어보렴.” 신기한 일이었다. 제빵 기술은커녕 평소 빵을 좋아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홀린 듯 그는 빵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제빵 기술을 배우기 위해 취직한 빵집에서도 그는 자본주의의 추악한 본질에 맞닥뜨려야 했다. 새벽 1시45분부터 시작된 노동은 다음날 오후 5~7시까지 이어졌다. 주먹밥을 먹을 시간도 따로 없었다. 일하는 도중에 선 채로 먹어야 했다. 오로지 화장실 가는 시간만 허락됐다.

생산한 만큼 노동자에게 돌려주면 이윤은 발생하지 않는다. 동일 규모로 경영을 지속하는 데는 이윤이 필요하지 않다.
팔수록 지역경제가 활성화되고 환경이 다양성을 되찾는 빵, 균과 작물이 넉넉히 자라는 경제, 그것이 시골빵집의 자본론이다.

여기서 그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묘사하는 19세기 런던의 빵집을 소개한다. 지금의 모습과 거의 다를 바 없다. 마르크스가 살던 시절로부터 150년이 지났지만 자본주의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노동력을 얻기 위한 교환가치가 하루 6000엔(6만1100원)이고 이 노동력을 쓰면(노동자를 부리면) 1시간당 1000엔의 교환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치자. 자본가가 됐다고 가정하고 이 조건에서 이윤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 6시간 넘게 일을 시키면 나머지는 죄다 이윤이 된다.”

그렇다면 기술이 발전하고 물자가 넘치는데도 왜 노동의 현실은 변하지 않는가. “노동력의 교환가치(임금)는 생활비와 기술습득 비용, 자녀 양육비의 합계액”으로 정해지기 때문이다. 기술 발전으로 상품의 가격이 싸지면 생활비와 양육비까지 모두 낮아지기 때문에 결국 임금까지 떨어진다. 임금이 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물가인상으로 인한 착시다. “(기술 발전에 따라) 노동자는 기계의 부속물로 전락하고, 부속물로서의 그에게는 오직 가장 단순하고 가장 단조로우며 가장 손쉽게 획득할 수 있는 기술만이 요구된다.”(<공산당 선언>)

이윤의 원천이 노동자의 초과노동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와타나베는 “절대 이윤을 남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직원들에게 현금흐름을 공개하고 있다. “이윤은 노동자가 월급보다 많이 생산하고 그만큼을 자본가(경영자)가 가로챌 때 발생했다. 그 말은 곧, 노동자가 생산한 만큼 노동자에게 정확히 돌려주면 이윤은 발생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 ‘다음번 투자를 위해 이윤은 꼭 필요하다’고들 하는데 그것은 결국 생산규모를 키워서 자본을 늘리려는 목적 때문에 나온 말이다. 동일한 규모로 경영을 지속하는 데에는 이윤이 필요치 않다.”

그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자본주의가 좋아하는 방향의 정반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상품과 노동력의 교환가치를 높게 유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제대로 된 빵을 만들어 제값 받고 파는 방법을 택했다. 인근 농가에서 자연재배 방식으로 기른 통밀을 직접 제분해 인공 이스트가 아닌 천연효모와 천연누룩균으로 빵을 만든다.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재료는 가급적 같은 지역 것을 쓴다. 덕분에 빵 가격이 보통 빵집의 4배나 되지만 에스엔에스(SNS)와 인터넷을 통한 마케팅 덕분에 판로 걱정은 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역통화 같은 빵을 만들고 싶다. 만들어서 팔면 팔수록 지역경제가 활성화되고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 지역의 자연과 환경이 생태계의 풍요로움과 다양성을 되찾는 빵. (…) 사람과 균과 작물의 생명이 넉넉하게 자라고 잠재능력이 충분히 발휘되는 경제. 그것이 시골빵집이 새롭게 구워낸 자본론이다. 빵을 굽는 우리는 시골 변방에서 일어나는 조용한 혁명의 태동을 오늘도 느끼는 중이다.”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와타나베 이타루 지음, 정문주 옮김/더숲

자본주의 시스템에 반기든 시골의 경제혁명
이윤 내지 않는 시골빵집 7년째 지속가능한 이유

+

미국의 한 탁아소에서 부모들이 정해진 시간보다 10분 이상 늦게 아이들을 데리러 올 경우 3달러의 벌금을 물리도록 하는 규칙을 만들었다. 그러자 늦게 오는 부모들이 늘어났다.

왜 그랬을까. 이전까지는 지각하는 부모들이 탁아소 원장과 교사들에게 미안함을 느꼈지만 벌금을 내게 하자 ‘서두를 필요 없이 벌금만 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미안함과 죄책감을 벌금이 지워버린 것이다. 다른 탁아소 10군데에서 같은 방법을 시행해봤지만 결과는 모두 같았다. 탁아소는 지각에 대한 벌금을 채찍이라고 생각했지만 교사들의 초과 근무는 부모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상품’이 돼 버렸다.

사람의 모든 행동에는 동기가 있다. 그 동기는 경제적인 이유일 수도 있고 남에게 칭찬받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무엇이 행동하게 하는가》는 행동경제학자인 두 명의 저자가 사람들의 행동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이뤄지는지를 분석한 책이다.

저자들은 사람들이 실제로 생활하고, 일하고, 노는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경제현상들을 관찰하며 인간 행동의 숨은 동기를 찾았다. 이런 식의 접근을 통해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인센티브’가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탁아소 사례처럼 인센티브는 미묘하고 복잡한 도구여서 항상 생각대로 작용하지는 않는 것이 문제다. 따라서 저자는 “인센티브의 작용 원리를 이해해야 사람들의 행동방식도 파악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어떤 인센티브가 더 강력하게 작용하는지 알려주는 실험도 있다. 미국 이스트캐롤라이나대 학생들이 자연재해 관련 연구를 진행하는 연구센터 설립을 위해 기금 마련에 나섰다. 이들은 두 가지 다른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하나는 기금을 낸 사람 가운데 한 명을 뽑아 1000달러짜리 기프트카드를 주는 ‘복권제도’다. 다른 하나는 매력적 외모를 지닌 학생이 모금을 받으러 갔다. 두 가지 모두 인센티브가 없을 때보다 50% 이상 기부금을 많이 모았다. 하지만 복권제도를 통해 기부했던 사람들이 장기적으로 꾸준히 기부할 확률이 높았다. 오래전 모금자의 예쁜 얼굴에 끌려 기부했다고 해도 같은 행동을 계속 할 가능성은 낮았던 것. 반대로 복권제도는 기부자들에게 ‘얻는 것이 있으면 주는 것도 있다’는 메시지를 준다. 단체의 기반이 튼튼하다는 점도 나타낸다.

이런 사례도 있다. “10%를 초과 생산할 경우 모든 사람에게 보너스를 주겠다”는 말과 “10% 초과 생산에 실패하면 누구도 보너스를 받을 수 없다”는 말 가운데 무엇이 더 효과적일까. 중국의 한 전자제품 공장에서 실험해본 결과 ‘긍정적 인센티브’는 생산량을 4~9% 늘렸고, ‘부정적 인센티브’는 16~25% 증가시켰다. 상여금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상여금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보다 크게 작용했다는 얘기다.

저자는 인센티브의 작동 원리와 사람들의 행동과정을 잘 이해한다면 사회를 더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자신한다. “학업 성적을 올리고, 법을 준수하고, 직장에서 더욱 좋은 성과를 내고, 자선단체에 내는 기부금을 늘리고,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태도를 점차 버리도록 사람을 이끄는 단서와 방법을 더욱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행동하게 하는가
유리 그니지 & 존 리스트 지음, 안기순 옮김/김영사

사람의 생각 · 선택 · 행동을 결정하는 미묘한 인센티브 효과
‘현장’과 ‘실험’ 에서 간파하라

+

선거 철이다. 흔히들 대의 민주주의 체제에서 선거는 정치를 발전시키고, 미래를 바꿀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진다.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까지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투표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궁금증도 생긴다. 과연 이 한 표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4~5년 만에 한 번 있는 선거로는 '달라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직접 거리로 나서기도 한다. 이라크전 파병, 대통령 탄핵, 미국산 쇠고기 수입 등 굵직굵직한 이슈가 터질 때마다 시민들은 광장에 나가 촛불을 들었다. '촛불 민심'이란 말까지 생겨났다. 그렇다면 이 같은 시민운동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문학자 오구마 에이지(52) 게이오대 역사사회학 교수는 신간 '사회를 바꾸려면'에서 이에 대한 해답을 내놓았다. 이 책은 동일본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가 난 이듬해인 2012년 출간돼 일본 내 인문학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2013년에는 일본 신서대상(新書大賞)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현재 일본 사회운동의 주요 의제로 떠오른 '원전' 문제를 주요하게 다루지만, 이를 위해 고대 그리스 사상과 근대 정치철학, 사회운동의 역사 등 방대한 배경지식을 찬찬히 끌어들인다.

오구마 교수는 2011년 아사히신문사의 여론조사를 인용함으로써 책 서문을 연다. '대지진 후 세상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고 답한 사람은 71%, '데모에 정치를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44%였다. 하지만 '데모 참여에 저항감이 든다'는 사람 역시 63%, '정치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답한 사람 중 '세상이 간단히 바뀌지 않는다'고 이유를 댄 사람은 67%나 됐다. 이 같은 현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현재의 사회를 바꾸고 싶은 마음은 있다. 그리고 정치가에게 맡기면 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렇지만 정치에 관여해도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데모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 어쩌면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망설이고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오구마 교수가 전하는 메시지는 간단하지만 단호하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행동하라!" 앞서 언급한 '선거'는 세상을 바꾸는 데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이 되지는 못한다. "오늘날의 사회는 어딘가에 중앙제어실이 있어서 거기를 점령하면 사회 전체를 조작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투표를 통해 대표가 선출되는 체제는 유력자나 대규모 조직을 등에 업은 사람만이 승리하게 된다. 루소가 말한 대로 '선거가 끝나면 노예로 돌아가는 제도'인 셈이다. 선거기간에는 유권자를 주인처럼 극진히 대접하다가도, 이후에는 '나몰라라'하는 정치인들을 우리는 많이도 보지 않았던가. '선거'도 중요하지만,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가 '직접 민주주의'를 실천에 옮기자는 게 오구마 교수의 주장이다.

'데모'라는 말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있는데, '데모'는 원래 '데모스 크라토스(demos cratos)', 즉 '민중의 힘'이란 뜻이다. 한 번 권력을 향해 구호를 외치고, 변화를 요구해본 이 '경험'은 후에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주춧돌이 된다고 한다.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 불만이 있어도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면 그 또한 사회를 바꾼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뀌도록 행동하든가,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바꿔버리고 마는 행동을 계속 취할 것인가 하는 선택이 남을 뿐"이다. 그렇다고 기존의 폭력적이고, 투쟁적이었던 운동 방식을 그대로 따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축제의 장을 열고, 콘서트를 개최하는 식으로 모든 이들이 "즐겁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오구마 교수의 지론이다. 실제로 오구마 교수는 2012년 탈원전 데모에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참가했고, 그의 옆에는 각종 악기를 연주하며 거리를 행진하는 시위대들이 있었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는 일본 사회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2012년 6월 일본 수상관저 앞에는 최대 20만명으로 추정되는 시민들이 몰려와 '원전 재가동 반대'를 외쳤다. 3040세대들이 주축이 된 이 평화 시위는 일본에서는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이들은 원전 사고가 단순한 자연재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본 내 정경유착, 안전문제, 정부의 정보통제 등이 얽히고설킨 '종합적인' 문제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아무도 내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게 되었다', '나는 무시당하고 있다'라는 현대인들이라면 누구나 공유하는 문제의식도 깔려있다.

매일 신문과 뉴스를 보며 불평하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이들이 쉽게 내뱉는 말이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지겠어?'이다. 하지만 '데모를 해서 무엇이 바뀌냐'는 질문에 오구마 교수는 "데모를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 울리히 벡, 위르겐 하버마스 등의 이론들도 저자의 주장을 든든하게 받쳐준다. 무엇보다 원전에 대한 고민, 시민운동의 방향성, 탈공업화에 접어든 사회, 고용과 가족의 불안정화 등 일본과 많은 면에서 닮은꼴인 우리 사회에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그렇지만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의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에릭 홉스봄)

사회를 바꾸려면
오구마 에이지 지음, 전형배 옮김/동아시아

데모하면, 데모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

+

영국 밴드 ‘비틀즈’하면 존 레논이 먼저 떠오른다. 폴 매카트니는 오랜 세월 레논의 뒷줄에 서야 했다. 매카트니가 비틀즈의 명곡에 기여한 지분이 막대했음을 고려하면 이상한 일이긴 하다. 레논에게는 매력적인 요소가 많았다. 극적인 죽음, 오노 요코와의 사랑, 신혼여행 침대서 벌인 반전 시위 등은 끊임 없이 회자됐다. 반면 매카트니는 밝고 무난하다는 오해 섞인 이미지를 가져가야 했다. 대중은 성실함보다 신격화된 천재에 매료된다. 문제는 매카트니가 결코 무난하고 보수적인 예술가가 아니라는 데 있다.

이 책은 비틀즈 해체 이후 10년간 매카트니의 삶을 통해 그의 인간됨을 조명한다. 음악 저널리스트 톰 도일이 여러 차례 매카트니를 인터뷰한 뒤 시간 순으로 그의 삶을 재구성했다. 매카트니가 “지옥을 지나면서 치료를 받는 것” 같았던 비틀스 해체 소동과 첫 솔로앨범 녹음, 밴드 윙스를 결성해 이룬 성취, 레논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힘겨움까지 다룬다.

비틀즈 해체 후 멤버들의 아내가 비난받았지만, 분열을 표면화한 장본인은 매니저인 앨런 클라인이었다. 1969년 9월20일 조지 해리슨을 제외한 세 멤버는 애플사에서 캐피톨 레코드사와 계약하기 위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수다를 떨던 중 매카트니를 노려보던 레논은 갑자기 말했다. “넌 얼간이 같아.” 그리고 선언했다. “난 그만둘래. 갈라서자.”

이때까지 매카트니는 밴드를 탈퇴한 적 없는 유일한 멤버였다. 그럼에도 역설적으로 그는 비틀즈 해체 과정서 악역을 감당했다. 이후 레논과 매카트니는 불화를 반복했지만 차츰 관계를 회복했다. 그는 1974년 메이 팽과 불륜관계였던 레논을 요코와 다시 결합시키는 데 한몫하기도 했다.

저자는 “매카트니의 1970년을 요약하는 한 단어가 ‘고난’이라면, 또 다른 단어는 ‘탈출’”이라고 요약한다. 이 시절 매카트니는 “비틀즈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분투하며 보냈고” “그 과정에서 범법자이자 히피인 백만장자”가 되었다. 인터뷰 중 매카트니는 1970년대를 돌아보며 “불가능한 일을 해냈죠, 진짜로요”라고 말한다. 무얼 하든 비틀즈 황금기에 미치지 못하리라는 의구심을 넘어섰다는 의미다.

폴 매카트니
톰 도일 지음, 김두완.이채령 옮김/안나푸르나

레논에 가려졌던 매카트니, 비틀즈이후 홀로서기

+

이 댓글을 비밀 댓글로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