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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새로 나온 책

2014년 10월 3주 새로 나온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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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청년’이나 ‘20세 소년’이라는 표현은 어색하다. 누군가 이런 말을 쓴다면 기본적인 지적 능력을 의심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100여년 전만 해도 ‘소년’과 ‘청년’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았다. 이기훈 목포대 사학과 교수는 1900년대 초에는 “운산군 남면 제인리 거주 이종준씨를 20여세의 소년이라고 하고, 도쿄 유학생 최남선씨를 18세의 청년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 교수가 쓴 <청년아 청년아 우리 청년아>는 190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이 땅에서 ‘청년’의 개념이 어떤 식으로 변했는지 살핀 책이다. 책에 따르면 ‘청년’은 근대의 발명품이며 당대 지배권력의 의도와 정치적 상황에 따라 역할과 의미가 달라졌다.

조선시대에는 나이가 어린 사람을 ‘소년(少年)’이라 부르는 게 일반적이었다. 청년(靑年)이라는 표현은 있었지만 세대적인 의미는 없었다. 이제마는 <동의수세보원>(1894)에서 인간을 연령별로 유년-소년-장년-노년으로 구분했는데, 17세부터 32세까지를 ‘소년기’로 봤다.

아동과 성인 사이의 과도기적인 개념으로서 ‘청년’은 근대 유럽의 발명품이다. 메이지 시대 일본 지식인들은 유럽의 청년 개념을 수용해 젊은 세대를 가리키는 일반 명사로 ‘청년(세이넨)’이란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경우 1890년대 중반 무렵 일본에서 유학한 젊은 조선 지식인들을 통해 일본의 근대적 청년 개념이 도입됐다. 이는 성리학 중심의 전통 지식의 권위가 약해지면서 신학문을 수용하는 주체로서 젊은 세대의 역할이 강조된 것과 맥을 같이한다.

근대적 청년 개념이 완전하게 정착한 것은 일제 식민지배와 관련돼 있다. 황성신문의 경우 1904년 이전까지는 지면에 ‘청년’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빈도가 한 해 서너 건에 불과했으나 을사조약이 맺어진 1905년에는 12건, 1908년에는 93건으로 늘어난다. 일상의 언어관행을 반영하는 소설에서도 1917년 이광수의 단편 ‘소년의 비애’에 이르면 ‘청년’과 ‘소년’의 구분이 명확해진다. 이처럼 1905년 이후 ‘청년’이란 표현이 급속히 확산된 것은 나라의 운명이 위기에 처하자 조선 지식인이 젊은 세대에게 애국계몽의 전위대 역할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일본 유학생 집단이었다. 근대화 이후 일본 사회에서 ‘청년’은 국가의 훈육과 통제의 대상이었으나 유학생들은 청년을 “민족의 근대화 과정에서 독자적인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는 주체”로 파악했다.

식민지배가 본격화한 1920년대 민족주의 진영은 청년을 “민족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통합적 주체”로 등장시킨다. 3·1운동 이후 민족주의 정서가 급격하게 고양되면서 1920년대 초반 민족주의 운동의 주류는 ‘지·덕·체’를 갖춘 청년이 조선 민족과 사회를 선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단순한 연령 구분에 의한 개념이 아닌 동질적 경험을 공유하는 ‘세대’로서의 청년 개념도 형성됐다. 국내에서 또는 일본 유학을 통해 신학문을 공부한 이들이 20대 중후반에 이르러 왕성한 활동을 할 때가 된 데다 이들이 3·1운동이라는 강력한 경험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역적·신분적·계급적 차이를 넘어서서 민족을 이끌어나가는 새로운 통합적 주체로서 청년보다 더 적합한 것을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청년을 “혁명적 감수성과 실천성”을 갖춘 사회주의 계급투쟁의 전위로 파악했다.

1920년대까지의 청년 개념이 민족의 관점에서 형성된 것이라면, 1930~1940년대 청년 개념에서 눈여겨 보아야 하는 것은 조선총독부라는 정치권력이 청년 개념을 규정해나간 방식이다. 조선총독부와 그 기관지들은 ‘청년’ 개념을 재구성했다. 당시 총독부의 관제 청년단은 초등교육을 마친 12~13세를 청년으로 규정했다. “자발적인 계몽활동이 가능한 ‘성인’”이 아니라 “철저히 훈육돼야 할 성장기의 젊은이”로 파악한 것이다. 총독부는 또 서양 발달심리학의 개념을 끌어와 청년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로 규정했다. 청년기의 정서적 미숙함을 강조함으로써 주체성을 박탈하려는 시도였다. 결국 총독부의 이상적인 청년상에 부합하는 것은 착실하고 순종적인 젊은이들로, 이는 “조선인 사회운동의 청년상을 무력화시켜 정치적 저항의 가능성을 봉쇄”하려는 목적이었다. 일본이 전쟁을 시작하는 1930년대 말에 이르면 조선 청년은 일본제국의 군사적 자원으로서 일본제국이라는 전쟁기계에 완벽하게 부속된 존재가 된다. 총독부는 1941년부터 청년등록제도를 실시하고 각 학교에서 군사훈련과 체력단련을 의무화했다.

1930~1940년대는 청년이 문제 해결의 주체에서 문제 그 자체가 된 시기이기도 하다. 식민지배가 공고해지면서 사회변혁의 전망은 쇠퇴하고 청년실업이 증가해 청년들은 심각한 ‘청년 문제’의 주체가 됐다. 불투명한 진로로 고뇌하는 청년들의 반대편에는 개인적인 ‘입신출세’를 열망하는 청년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해방 이후 활짝 열린 정치 공간에서 ‘청년’은 우익 폭력의 주체가 된다. 1945년 말부터 등장한 우익 청년단체들은 청년을 “애국의 정열과 우국의 순정에 넘치는 존재”로 규정하고 “시국의 부름에 응하는 정열적인 투사형 인간을 청년 주체로 상정”했다. 우익 청년단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월남한 청년들이었다. 사상적 이유로 월남한 청년들은 남한에 특별한 연고가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지역별 청년단에 소속됐다. 서북청년단은 당시 서울에만 50여개 합숙소를 운영하며 숙식을 제공하고 단원들의 취직과 대학 진학을 알선했다.

그러나 국가폭력의 주체였던 청년은 1960년 이후 4월혁명과 5·16쿠데타를 거치며 또다시 저항의 주체로 살아나게 된다. 저자는 “1960년대 이후 민주주의와 민족자주라는 근대적 가치의 체현자로 등장한 ‘청년’ 또는 ‘청년학생’은 1920년대 다양한 사회운동에서 제기된 청년 주체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말한다.

청년아 청년아 우리 청년아
이기훈 지음/돌베개

청년, 굴곡진 현대사서 그들은 무엇이었나
한국 근현대사 굴곡의 아이콘 젊은이
역사의 호명을 받고 등장한 '근대의 아이콘' 때로는 저항의 주체로, 때로는 체제의 꼭두각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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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셀러는 어느 날 갑자기 ‘터진다’. 점진적으로 상승하던 판매량이 갑자기 폭증하면서 대형 베스트셀러의 궤도로 진입한다. 그 원인은 실타래처럼 복잡하다. 저자의 공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당대의 대중이 지닌 욕망과 출판사의 마케팅 전략, 심지어 권력을 장악한 정부의 이념과 문화정책 등도 베스트셀러의 원인으로 작동한다. 그만큼 베스트셀러의 인과관계는 복잡하다. 게다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장사멸의 과정을 거치기도 한다. 음악가 쇼팽의 연인이던 조르주 상드는 당대의 베스트셀러 작가였지만 지금은 그저 ‘쇼팽의 애인’으로만 기억된다. 반면 고전으로 추앙받고 있는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은 초판 750부의 초라한 발행부수를 기록했던 책이다.

베스트셀러의 실체가 현실 속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인쇄술이 발달하면서부터다. 몇몇 작품들은 독자들을 푹 빠지게 만들었고 대대적인 구매와 여러 차례의 재판(再版)으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예컨대 16세기의 인쇄소 직원들은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를 거듭 인쇄했으며 17세기에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이렇게 발행부수의 문제를 인식하면서 ‘베스트셀러’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1889년 미국에서다. 그 용어는 곧 대영제국으로, 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전 세계로 확산됐다.

적어도 18세기까지는 책의 질과 판매량을 등가로 보는 관점이 유효했다. 독자의 이성적 감식안이 좋은 책과 나쁜 책을 구별한다고 믿었다. 책이 많이 팔리는 것은 작가가 천재적이기 때문이라는 인과관계가 통용됐다. 그러나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대중의 출현과 문화 민주화는 책의 성공(판매)과 가치의 일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 그 의문은 더욱 증폭된다. 그래서 드디어 책의 성공과 가치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관점이 등장한다. 프랑스의 소설가 루이 페르디낭 셀린(1894~1961)은 “성공은 언제나 아주 나쁜 질을 의미한다”고 거듭 말했다.

이 책의 저자인 프레데리크 루빌루아(50)의 본업은 헌법학이다. 프랑스 파리5대학 공법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시에 그는 애서가이자 독서광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프랑스에서 2011년 간행된 <베스트셀러의 역사>는 16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약 500년간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베스트셀러의 정체를 들여다보고 있다. 베스트셀러 이면의 시대상 및 사회상에 대한 고찰, 그 조건의 역사적 변천을 더듬는다.

저자는 “한 시대의 베스트셀러는 대중이 기다리던 말을 썼다는 데서 나온다”고 했다.

저자는 “판매부수, 시간, 장소 이 세 가지가 베스트셀러를 규정하는 핵심”이라고 말한다. 판매부수 10만부를 넘긴 베스트셀러는 19세기 후반부터 나타났다. 산업화와 자본주의가 책의 대중화와 인쇄업의 발달을 촉진한 결과다. 시간과 장소의 확대도 “자본주의가 단기간에 국가라는 한계를 돌파해 세계화한 현상과 일치”한다. 비교적 최근 사례이긴 하지만 67개국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에서 같은 시간에 발매된 ‘해리 포터 시리즈’의 마지막 권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은 단 하루 만에 1100만부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저자는 ‘베스트셀러를 어떻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사례를 곁들여 답한다. 당연히 작가 혼자서는 베스트셀러를 만들 수 없다. 그것은 다양한 이유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대필자의 도움 때문이기도 하고, 발행인이나 미디어, 영화산업의 영향이기도 하며, 검열이나 소송 등 국가와 법정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알렉상드르 뒤마나 쥘 베른 같은 베스트셀러 작가의 뒤에는 대필자가 숨어 있었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는 저자가 건넨 원고를 빼돌린 발행인 펠트리넬리로 인해 세상의 빛을 봤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D 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모두 검열과 소송으로 인해 열광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언 플레밍의 ‘007 시리즈’는 영화로 득을 본 대표적인 경우다. 물론 저자는 ‘만들어지는 베스트셀러’에 대해 서술하면서 광고 전략과 저널리즘의 관계도 빼놓지 않는다.

저자는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을 범주별로 나눠보기도 한다. 15위까지의 목록에 들어 있는 책은 종교서적이 네 권, 정치 관련 서적이 네 권, 실용서 혹은 교과서가 두 권, 소설이 다섯 권이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든 저 세상에서든 구원을 얻기 위해 또는 성공을 일궈내기 위해 책을 강요당한다”고 설명한다. ‘본의 아닌 강요’야말로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일등공신이라는 뜻이다. 또 남들과 구별되고자 하는 욕구, 취향이나 기분전환도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데 일조한다. 읽지 않을 책들을 장식용으로 책장에 꽂아두는 것은 일종의 구별 욕구이며, 에드거 포와 애거사 크리스티 같은 소설가들에게 쏟아지는 대중의 인기는 기분전환용 문학의 역할을 대변한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베스트셀러의 요인을 한마디로 단언하지 않는다. 다만 책 속의 한 문장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한 시대의 베스트셀러는 있어야 할 순간에 거기 있었다는 데서, 대중이 기다리던 말을 썼다는 데서 나온다.

베스트셀러의 역사
프레데리크 루빌루아 지음, 이상해 옮김/까치글방

초판 발행 750부 ‘적과 흑’, 어떻게 고전이 됐을까
성경에서 해리포터까지… 베스트셀러의 민낯 드러내다
독자는 지난 500년간 이 책들을 선택했다, 왜
톰아저씨의 오두막은 "5만부 팔렸다" 허풍으로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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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실학자 홍대용은 서른 다섯 때인 1765년 겨울 사신단의 수행원으로 청나라 수도 연경(지금의 북경)에 갔다. 서울을 떠난 지 근 두 달 만인 12월 27일 연경에 도착, 이듬해 1월과 2월 두 달간 머물다 귀국했다. 홍대용은 이 때의 경험을 한문으로 쓴 ‘연기’와 한글로 쓴 ‘을병연행록’으로 남겼다.

홍대용의 여행기는 조선 지식인 사회에 파란을 일으켰다. 북경에서 중국 선비들을 사귄 사실이 알려져 비난을 샀다. 청나라의 발전상을 긍정적으로 평한 것도 문제가 됐다. 청을 상종 못할 오랑캐로 여기던 시절이니 그럴 만했다. 이 일로 홍대용은 절친 김종후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논쟁은 승패가 갈리지 않고 끝났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여행기가 조선을 뒤흔든 문제작이라는 사실이다. 홍대용은 청의 번영과 안정을 있는 그대로 보고했다. 보수세력은 못마땅해했지만, 이를 접한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 청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싹텄다. 박지원의 북경 여행기 ‘열하일기’가 선풍적 인기를 끈 것도 홍대용의 전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문학자인 강명관 부산대 교수가 쓴 ‘홍대용과 1766년’은 홍대용의 여행기가 왜 논란거리가 됐고 조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꼼꼼히 살펴 짚어낸다. 홍대용이 어떤 인물이고, 북경에서 무엇을 봤고 누구를 만났으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따라가는 동안 뚜렷이 느껴지는 것은 그가 받은 문화 충격이다. 청의 흥성한 문물은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북경 천주당에서 시계, 망원경 등 서양 문물을 보고 그 정교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중국이라는 창을 통해 비로소 세계를 접하면서 홍대용의 사상이 성장한다.

쉽게 변한 건 아니다. 그는 북경에서 주자학을 비판하는 당대 지식의 최전선을 접했지만 귀국 후에도 주자학을 굳게 신봉했다. 명나라에 의리를 지키며 청을 오랑캐로 보는 것도 여전했다. 생각이 바뀐 것은 김종후와 논쟁을 벌이면서부터다. 이후 홍대용은 중화와 오랑캐는 본디 구분이 없으며 각 문명은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는, 당시로선 혁신적인 인식에 이른다.

저자는 조선 후기에 수많은 연행이 있었지만 홍대용의 연행만큼 큰 충격을 던진 경우는 아마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홍대용이 죽고 3년 뒤 조선 조정에서 벌어진 논쟁이 그 여파를 보여준다. 1786년 1월 22일 정조가 주재한 조회에서 보수와 개혁의 두 흐름이 충돌했다. 정조는 보수 편을 들었다. 북경에서 사오는 책들이 불경하다는 지적을 받아들여 처음으로 서적 수입 금지령을 내렸다. 사신단이 중국인과 만나는 것을 엄격히 제한하고 필담 금지, 귀국 후 선물 주고 받기 금지 등 8개항의 금지령이 떨어졌다. 그날 조회에서 박제가는 중국과 교역하고 서양 선교사를 초빙해 서양의 선진 과학기술을 배울 것을 주장했지만, 씨도 안 먹혔다.

홍대용은 북경에서 중국 선비 엄성, 반정균, 육비를 만나 깊은 우정을 나눴다. 몇 번 못 봤지만 눈물로 이별할 만큼 각별했고 귀국 후에도 편지와 선물이 오갔다. 국경을 초월한 홍대용의 사귐 이후 북경에 가는 이마다 중국 지식인과 교유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고, 홍대용의 북경 인맥이 다리가 됐다. 이는 전통시대 한중 지식인의 교류사에 특별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지금이야 흔한 게 해외여행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중국에 가는 사신이나 일본에 가는 통신사만 할 수 있었다. 저자는 세계화 시대인 오늘, 홍대용이 그랬듯이 인종과 언어, 국가를 넘어 세계인과 대화와 우정을 나누며 보고 배우자는 말로 책을 마무리했다.

홍대용과 1766년
강명관 지음/한국고전번역원

조선 학계 충격 빠뜨린 중국 여행기
조선을 뒤흔든 불온한 여행기...오랑캐땅에서 실학의 씨앗을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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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고 난 어느 날, 우연히 올려다본 시계의 시각이 12시 반이라면, 당신은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낄지도 모른다. 소설이 백 쪽을 훌쩍 넘어가도록 소설 속의 시간은 단 일분도 지나지 않은 채 여전히 12시 반이다.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마리화나에 취한 주인공은 실제와 상상의 뒤엉킨 미로 속에 갇힌 채 몸부림치고, 독자는 의식과 무의식이 혼융돼 펼쳐놓는 영겁의 찰나 속으로 속절없이 빨려 들어간다. 헝가리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나더쉬 피테르(72)가 1979년 발표한 중편소설 ‘세렐렘’이다. 프란츠 카프카 상, 뷔히너 문학상, 산도르 마라이 상 등 유럽의 주요 문학상을 이미 석권했고, 노벨문학상이 기대되는 작가로도 종종 그 이름이 언급되고 있지만, 한국에 작품이 소개되는 것은 처음이다.

헝가리어로 사랑을 뜻하는 ‘세렐렘’은 이별을 통보하러 연인의 집을 찾아간 한 남자가 환각 상태로 보내는 하룻밤을 좇아가는 소설이다. 하지만 그는 연인의 침대 위에 누워 섹스와 마리화나에 취해가면서 결코 그녀에게 이별을 말할 수 없으리라고 느낀다. 소설 속의 공간은 연인 에바의 방과 발코니로 국한돼 있고, 주인공은 물을 마시러 욕실에 가고, 가방을 찾으러 침대에서 의자 아래로 움직이는 등 몇몇 명백한 행위를 실행한다(고 믿는다). 심지어 에바와 사랑을 나누기까지 한다.

그러나 환각의 매캐한 연기 사이로 틈입하는 그의 의식은 그것이 실재하지 않은 상상에 지나지 않으며, 그러므로 자신이 미쳤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느끼지도 못하고, 어떤 것도 보지 못한 채, 나는 그저 생각의 질주일 뿐이다.”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속도를 높이고 있는데 시간이 멈춘 상태”로, “상상의 진실들”에 포획돼 있다. 그가 에바에게 반복적으로 묻는 “지금 몇 시지?”라는 질문에 에바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매번 똑같이 “12시 반이야”라고 말할 때, 그는 이 절망적인 무한반복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발코니 밖으로 몸을 던지는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나는 나라는 걸 느껴야만 해!”

철학적이고 시적인 문장은 주인공의 분열된 정신의 회로를 따라가는 작가의 탐침이다. 철학과 사유가 곧 서사임을 입증한 헤르만 브로흐와 로베르토 무질의 후예답게, 나더쉬 페테르는 환각이라는 급진적으로 자유로운 시공간 안에서 시간과 존재, 실제와 상상, 감각과 인식 같은 주제들 사이를 날렵하게 주유한다.

무한과도 같은 순간의 내시경적 묘사와 환각과 분열의 렌즈로 들여다본 철학적 주제들이 뒤섞이면서 소설 읽기는 어지간한 독자들도 탈진하게 만들 법하다.

그러나 이 난해하고 파격적인 소설은 본질적으로 사랑 이야기다. 사랑의 종료를 선언하기 위한 자리에서 비로소 자각하게 되는 사랑. 그러나 너무 늦었다. “이 사랑에 이르기까지, 나는 얼마나 긴 여정을 거쳐 여기에 닿을 수 있었나! 그 여정의 피곤함이 그녀의 사랑을 꺼버렸다.” 자기 존재의 소멸을 욕망할 만큼 고통스러운 환각의 순간은 역설적으로 사랑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나는 나를 잃어버렸고, 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당신을 잃어버렸다는 것.” 환각과 의식의 쟁투가 불러일으킨 회한의 정념이다. “두려워. 항상 순간적으로만 너를 느껴, 실제로 여기에 네가 있다는 것을 항상 몇몇 순간들로만 느껴. 그러고는 항상 잃어버려. 그러고 싶지 않아. 너를 잃고 싶지 않아!”

환각의 언어적 재현을 통해 감각과 사유의 최대 공간을 확보한 소설은 묻는다. “사랑은 왜 그 안에서 사랑 그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가?” 언제나 뒤늦은 것, 그것은 사랑이다. “에바! 내 생각엔 아직 이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것 같아. 정말로 당신을 사랑해.”

세렐렘
나더쉬 피테르 지음, 김보국 옮김/arte(아르테)

마리화나가 뿜어낸 환각 뒤에 남은 것...그것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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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니를 때우기 위해 산과 들을 헤매며 사냥을 하고 채집을 하러 다닌 신석기인이 불쌍한가. 그건 당신의 착각이다. 그들은 어쩌면 현대인보다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하루 노동시간은 길어도 4~5시간. 나머지 시간은 휴식과 수면으로 보냈다. 동물을 포획한 다음날에는 쉬었다.

식량도 부족하지 않았다. 거친 자연과 맹수와 싸워 살아남은 자만이 생존했기 때문에 인구 밀도는 낮았다.

잔인하지만 수렵채집인들은 영아와 노인 살해, 수유기 성적 금욕으로 인구를 억제했다. 그들에게 부양은 '단순히 먹여살린다'가 아니라 '데리고 다닌다'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식량 자원이 고갈되면 다른 지역으로 떠나야 했다.

현대인에게는 '고된 이동'으로 보이지만 그들은 '소풍'이라고 생각했다. 이 게으른 여행자들이 도착한 새로운 지역은 식량을 안정적이고 규칙적으로 제공해줬다.

경제인류학자인 마셜 살린스 미국 시카고대 명예교수는 수렵채집 경제를 단순한 '생계 경제'로 보지 않는다.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사유에서 벗어나 수렵채집사회야말로 원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였다고 주장한다. 주류 경제학을 뒤집는 그의 저서 '석기시대 경제학'은 이를 증명하고 본래 모습을 복원한다. 제국주의자들이 멋대로 오해하고 재단한 수렵채집사회를 바로잡는다.

그들은 활과 화살로 충분했다. 원하지 않으면 부족하지 않다. 아무도 가진 것이 없어 빈곤한 게 아니라 오히려 자유로웠다. 현대인 못지않게 다양한 식단으로 충분한 열량을 섭취했다. 자연은 풍요로운 식량을 제공했다.

저축이란 개념도 없었다. 모든 물건과 음식을 즉각 소비했다. 문명화된 관찰자들에게는 낭비벽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다시 수렵채집하면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식량이 더 풍족해진 농경사회에 접어들면서 인간은 과도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하루종일 구부린 채 일하는 바람에 몸은 더 허약해졌다. 수확물이 많아지고 더 이상 맹수와 싸울 필요가 없어 인구는 급증했다. 흉년과 가뭄에는 기아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하드자족은 여가를 누리기 위해 농경을 거부했다. 견과류가 지천에 깔려 있는데 왜 경작을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자는 수렵채집사회가 더 인간적이었다고 강조한다. 생존하기 위해서 친족과 집단의 결속과 연대가 강했다. 이를 저자는 '호혜성(互惠性)'으로 규정한다. 아무리 궁핍한 시기라도 곰 한 마리를 잡으면 골고루 분배했다.

무리를 이끄는 추장의 위세도 관대함에서 비롯됐다. 이방인이나 방문객, 추종자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줘야 했다. 이 과정에서 재화는 재분배됐고 사회의 집단적 이익은 재창출됐다. 물론 추장과 일반 주민 사이에 물질적 불균형의 은폐 도구로 호혜성이 악용되기도 했다.

갈등도 있었다. 마오리 사회 속담에 '겨울에는 친척, 가을에는 아들'이란 말이 있다. 먹을 게 없는 겨울에 먼 친척처럼 대하던 사람이 수확철인 가을이 되면 갑자기 아들처럼 행동한다는 뜻이다. 그래도 저자는 원시사회 경제가 합리적이고 효율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인간 중심적인 경제 철학과 대안적 세계관을 모색하는 데 지적 토대를 마련해준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무분별한 경제 개발이 초래한 환경 파괴와 인간성 말살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작은 것에 만족하는 단순 사회야말로 빈곤과 불평등, 폭력과 전쟁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그의 주장은 신석기시대에 대한 오해는 바로잡지만 너무 극단적으로 느껴진다.

석기시대 경제학
마셜 살린스 지음, 박충환 옮김/한울(한울아카데미)

수렵사회 아닌 농경사회서 빈곤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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