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1주 새로 나온 책

2014.11.10 09:00 行間/새로 나온 책
중국사를 다룬 역사책이 원과 명을 한 권으로 묶는 예는 거의 없다. 원은 오랑캐 몽골족이 세웠고 명은 원을 무너뜨리고 등장한 한족의 나라여서 단절과 차이를 강조하곤 한다. 하지만 원과 명의 역사에는 분명 연속성이 있다.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전6권)의 다섯번째 권인 이 책은 원-명의 연속성과 변화상을 검토하고 있다. 이 시리즈의 책임편집자인 티모시 브룩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교수가 썼다. ‘쾌락의 혼돈’ ‘베르메르의 모자’ ‘근대 중국의 친일 합작’ ‘능지처참’ 등의 번역서로 한국 독자에게도 잘 알려진 역사학자다.


원-명 교체와 멸망에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 기후변화와 자연재해를 주목하는 게 여느 중국사 책과 크게 다른 점이다.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400여 년 동안 중국에서 일어난 가뭄, 홍수, 기근, 메뚜기떼, 한파, 전염병 등이 정치적 변동이나 농민 반란과 상관 관계가 있음을 설명한다. 기후결정론을 주장하는 건 아니다. 역사의 굵직한 사건을 설명하려면 날씨가 설명의 일부분을 차지해야 한다는 조심스런 입장이다.

중국사를 지구사적인 관점에서 서술하는 것도 특징이다. 남중국해를 중심으로 펼쳐진 명의 국제무역이 유럽까지 뻗으면서 세계경제와 통합되는 과정을 중국이 초기 근대(15~18세기) 형성에 참여한 것으로 파악한다. 근대는 서구만의 발명이 아니라는 얘기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저자는 황제 중심의 이야기보다 일반 서민의 삶과 경험을 보여주려고 했다. 정사, 실록, 지방지, 문집 등 각종 사료에서 찾아낸 에피소드와 시, 그림 등을 곳곳에 배치해 시대상을 생생하게 그려 보인다.

하버드 중국사 원.명 : 곤경에 빠진 제국
티모시 브룩 지음, 조영헌 옮김/너머북스

원-명 교체 뒤에 기후변화 있었다
龍(쓰나미·홍수·토네이도)이 나타나자 제국이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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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2000년 동안 단순한 나라가 아닌 제국(帝國)이었다. 그것도 매우 개방적이고 유동적인 경계를 가진. 최근까지도 중국인은 자신의 모습이나 핏줄이 아닌 문명으로 자신의 경계를 구획지어 왔다. 한자를 읽고 쓸 것. 한문에만 정통하다면 중국 문화 안에 있건, 밖에 있건, 외국인이건, 노예이건, 정복된 민족이건 그들의 울타리 안으로 포섭됐다. 동시에 중국은 자손대대로 선행하는 역사에 의존하며 세계에서 중국의 위상에 대한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해 왔다. 인(仁)이라는 개념, 예법(禮法), 그리고 중화(中華), 즉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사고방식이 중국인을 이해하는 열쇠다.

현대사의 거장인 런던경제대 세계사 교수 오드 아르네 베스타는 이러한 중국에 대한 이해에 기초를 두고, 한 가지 관점을 더 접목한다. 250년에 걸친 ‘외교관계의 격변’에 집중해 중국을 들여다보고 미래의 행보를 결정할 동력을 찾아낸다.

중국의 가장 극적인 팽창은 청 왕조로부터 시작됐다. 1644년부터 1911년까지 300년간 중국을 통치한 청 왕조는 유가 경전에 설계된 대로 고대의 지혜에 따라서 통치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외부인인 만주족은 중국을 바로잡기 위해 상륙했고 위대한 다문화적 왕조국가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중국을 재건했다. 그들의 조직 형태는 근대적이었고, 경제적·기술적·사상적 자원을 적절히 활용했다. 청의 군대는 명 왕조보다는 오스만제국이나 러시아, 심지어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오히려 비슷한 점이 많았다. 고도의 기동력을 갖춘 기병, 화기와 대포, 발달된 병참선이 그랬다. 그들 의도는 다양한 배경과 신앙을 가진 모든 민족이 순종할 수 있는 초국가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네팔에서 조선까지 국경을 맞댄 국가들에 조공을 받았고, 제국 러시아와는 국경을 긋는 협정을 맺었다. 강희제는 쯔진청(紫禁城) 안에 아시아의 섬사람, 인도인, 아랍인, 페르시아인을 두었고 학자들에게 외국 영토에 관한 지식을 확장시키라고 명했다. 천문학, 건축, 회화 부문 지식 확충을 위해 유럽 예수회 선교사도 총애했다.

청의 수도 베이징은 동아시아의 중심이었다. 그 사상과 취향, 유행에 모든 외부인은 매혹됐다. 1750년 국력이 정점에 달한 청이 베이징 북서부에 만든 거대한 원명원은 쯔진청의 5배 크기에 달했다. 이곳엔 다양한 왕조의 중국풍 건물과 조선 및 동남아에서 온 구조물과 풍경화가 전시됐다. 원명원 뒤편에는 이탈리아 건축가가 바로크 양식으로 설계한 건물마저 있었다. 하지만 1860년 2차 중·영전쟁으로 영국군에 의해 이곳은 약탈되고 파괴된다. 다시 중국이 부상하기까지 2세기에 걸친 중국의 고립은 이 시기의 상처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18세기 청 제국의 전성기 때부터 외부 세력과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중국의 세계관은 지배와 종속, 경쟁과 저항이라는 극단을 정신없이 오갔다. 1760년 미얀마 침공에서부터 20세기 초 의화단운동, 2001년 추락한 미국 정찰기를 둘러싼 대립에 이르기까지 외국과의 수많은 접촉은 중국인들에게 치욕과 분노를 떨치지 못하게 했다.

공산주의 혁명과 중화인민공화국 시기를 거쳐 중국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빗장을 풀고 경제를 개방했다. 중국이 고립에서 벗어나 굴기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

저자는 “지난 250년간 중국의 변화는 국제화의 일환이었다”고 설명한다. 폐쇄적이고 과거에 집착하는 듯 보이지만 중국은 19~20세기에 세계적으로 일어난 일련의 변화를 받아들여 현재 중국의 일부로 삼고 있다. 중국이 극단적 고립에서 벗어나 250년 만에 가장 적극적으로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 등 많은 국가와 경제협력을 최우선에 놓는 새로운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중국의 미래를 점치려면 중국이 직접 통치하지 않는 중국 사회인 싱가포르 대만 홍콩 마카오를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다. 대만에서는 국가가 방향을 정할 수 있었는데 이는 국가가 신용대출과 자본 흐름을 통제했고 국가만이 외국 시장에 대한 접근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외국인 투자가 산업화의 주요 과정을 이끌어왔고 외국계 은행이 중국에서 영업하고 있다. 중국의 발전은 시장에 작용하는 다양한 힘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의해서 이뤄졌다.

결론적으로 “중국이 세계 자본주의를 망치기보다는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갈 것”이라고 전망한다. 몇몇 중국인들은 중국의 역사를 순환하는 것으로 본다. 수천 년에 걸쳐 중국은 태평성대에서 쇠퇴로, 다시 부흥으로 나아갔다. 중국인은 현재 부흥의 초기에 있다고 믿는다. 중국이 더 중추적이고 강력해질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 서구 역사학자는 그 믿음이 실현되기 위해선 내부의 불협화음에 주의하라고 충고한다. 청나라의 통치가 길었던 이유는 다원적인 사회를, 다양성을 존중해 이끌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거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느냐가 중국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는 역사학자다운 조언이다.

잠 못 이루는 제국
오드 아르네 베스타 지음, 문명기 옮김/까치글방

中이 언제 이렇게 컸냐고?… 원래 세계 최강국이었다
淸 제국의 전성기, 중국 미래의 열쇠는 그 속에 있다
龍(쓰나미·홍수·토네이도)이 나타나자 제국이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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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좀 재미있는 일 없어?”

아마 사람들이 달고 사는 말 중의 하나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질문의 바탕에는 “나는 지금 재미가 없다”는 속뜻이 숨어 있을텐데,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가할 틈조차 없이 살고 있지 않은가? 학생들은 공부하느라, 젊은 세대는 취업 준비하느라, 직장인들은 일하랴, 노부모들은 돈벌랴 손주봐주랴 바쁘니 말이다. 그런데도 때때로 인생이 지루하다는 느낌이 엄습한다. 그래서 피곤한 눈을 비비면서도 휴대폰과 컴퓨터를 끼고 살고, 퇴근하면 술집에서 목을 축이고, 틈만 나면 대형마트를 다니고, 주말이면 들로, 산으로, 공원으로, 극장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쉬고 싶다, 피곤하다!”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정작 시간만 비면 채우지 못해 안달이다.

그렇게 시간표를 메우며 살아도 인생은 늘 심심하고 재미없고 공허하다. 시국을 한탄하고 재해를 걱정하고 불의의 희생자들을 안타까와 하고 흉악사건을 끔찍해하지만 오늘도 “화끈한 소식”을 찾아 인터넷을 서핑한다. 마음의 허기를 달래려 인터넷 쇼핑몰을 들락날락하고 장바구니에 잔뜩 담아 택배를 받지만, 기분 좋은 것도 잠깐 뿐이다. 인터넷을 들여다보면 살 것이 왜 이리 많은지. 클릭을 마구 하다가 퍼뜩 정신이 들면, “물건을 사기 위해 쇼핑하는 건지, 쇼핑하기 위해 물건을 사는 건지” 헷갈린다.

일본의 젊은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다카사키경제대 준교수)라면 아마도 “나는 지루하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을 지도 모른다.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이라는 부제를 단 그의 저서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는 ‘지루함’을 현대인들의 존재 조건이자, 철학의 근본 물음으로 삼고 이를 성찰한 책이다.

저자는 “‘음식과 집을 얻을 수 있는 수입’과 ‘일상의 신체활동이 가능할 만큼의 건강’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을 엄습하는 일상적 불행”이라고 버트런드 러셀이 지적한 현대인의 역설로부터 출발한다. 즉 “인류가 지향한 풍요로움이 달성되면 인간은 거꾸로 불행해진다는 것”이 현대인이 당면한 역설적인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는 경제학자 존 갤브레이스가 말한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상황이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지적한 바, 문화산업이 소비자의 감성 자체를 ‘생산’하는 상황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사회주의자 윌리엄 모리스는 “혁명으로 얻은 자유와 한가함을 어떻게 장식할 것인가” 물었고, 알렌카 주판치치라는 철학자는 목숨을 건 행위에만 사람들이 흥분과 자극을 받는다는 요지의 주장을 폈다.

‘지루함’에 대한 가장 인상적인 표현은 파스칼로부터 나왔는데, 그는 “인간의 불행은 누구라도 방에 꼼짝 않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몰두하고 열중할 것”을 찾고 이를 통해 ‘기분 전환’을 추구한다. 그러나 몰두할 것이 과연 ‘욕망의 대상’이고 ‘욕망의 원인’일까. 저자는 이런 예를 든다. 토끼 사냥에 나서는 사람에게 토끼를 가져다주면 기꺼이 사냥을 포기할까? 도박하는 이에게 도박으로 딸만한 돈을 미리 주면 그는 도박을 멈출까? 아니다. ‘욕망의 대상’(토끼, 돈)이 ‘욕망의 원인’(사냥, 도박, 즉 기분전환)과 다르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지루함으로부터의 탈피, 즉 기분전환을 추구하는 인간은 흥분을 원하며, 그 자극은 괴로움과 부담을 감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2차 대전 파시즘의 광풍이 저자가 말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 렇다면 인류는 원래부터 지루함을 안고 사는 존재였을까? 저자는 ‘지루함’의 기원을 역사적ㆍ논리적으로 따진다. ‘지루함’은 수백만년에 걸친 인류사에서 비교적 최근인 1만년전에야 나타난 현상이다. 이리 저리 떠돌며 유목생활을 하던 인류는 지루할 틈이 없었다. 옮겨간 낯선 지역에서 끊임없이 정보를 탐색하고 신호를 해석하며 위험과 위협을 극복하며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후와 생태계의 변화로 정착을 강요받은 인류는 청소와 쓰레기ㆍ배설물처리 등의 반복 생활을 익혀야 했고, 유목생활에서는 필요없었을 금기와 규율을 생성ㆍ수용해야 했으며, 물품의 저장과 교환으로 인한 불평등을 감수해야 했다. 결정적으로 ‘지루함을 피할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저자는 이른바 신석기혁명이나 정착혁명, 농경혁명이 노동생산성의 비약적 증가를 통해 인간 생활의 극적인 발전을 가져왔다는 서구 사회과학의 정착중심주의를 반박한다. 이 점에서는 최근 번역된 ‘석기 시대 경제학’의 마셜 살린스의 논지와 궤를 같이한다. ‘정착혁명’에 이어 ‘지루함’에 또다른 결정적 계기는 포드주의로 대표되는 근대화 이후의 노동 형태와 근로자의 여가까지 지배하고 상품화하는 소비사회이다. 저자는 헤겔부터 루소, 홉스, 마르크스, 한나 아렌트 등의 ‘소외론’을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하이데거의 ‘지루함’에 관한 이론에 집중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지루함의 형식’들을 제시한 뒤, 이를 세세히 소개하고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긴 길을 돌아, 저자가 이르는 결론은 “지루함과 공존하는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다. 첫째는 스피노자가 말하는 반성적 사유, 즉 한가함과 지루함에 대한 자각이다. 두번째는 사치스러움의 회복이다. 세번째는 즐기는 것의 훈련이다. 한마디로 다시 말해 “즐기는 것을 알고, 사고하게 되고, 기다릴 수 있는 것”이며 다른 말로는 기호나 브랜드가 아닌 먹고 마시고 입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 문화와 오락 예술을 누리면서 훈련과 사유를 거듭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지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한 자리에 도달한 다른 철학자들의 사유와 통한다.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한다”고 했고, ‘피로사회’의 한병철 교수는 ‘사색적 삶’에 ‘활동적 삶’의 자리를 내주라고 했으며, 발터 벤야민은 이를 ‘깊은 심심함’이라고 했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의 저자 피에르 쌍소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한가로이 거닐기. 다른 이의 말과 다른 소리들을 듣기. 권태에 빠지기. 꿈꾸기. 기다리기. 마음의 고향을 떠올리기. 글쓰기. 포도주에 빠져보기 등을 권유했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깊은 사색에 빠질 수 있는 시간, 게으르게 웃고 먹고 마시고 즐길 권리를 스스로에게 허하라는 것이다. 신이 허락한 제 7일째의 안식,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을 돌려주라는 것이다

그 리고 마지막으로 고쿠분 고이치로 교수는 “지루함과 마주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인간은 필시 자신이 아니라 타인과 관련해서도 사고할 수 있게 된다”며 이는 필시 “어떻게 하면 모두가 한가해질 것인가? 모두에게 한가로움을 허락하는 사회는 어떻게 가능할까?”에 대한 질문을 불러온다고 했다. 전쟁, 기아, 빈곤, 불평등, 자연재해, 노동착취로 인해 ‘한가함’이 허락되지 않는 이들을 위한 공동의 노력이야말로 저자가 말하는 한가함과 지루함에 관한 최후의 ‘윤리학’인 셈이다.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최재혁 옮김/한권의책

지루해 죽겠다는 당신 일탈하라… 탈주하라…
‘나는 지루하다, 고로 존재한다’…한가할줄 아는 법에 대하여
피치 못할 지루함과 친구 되기 나를 잊으면 행복 찾아온다
한가함도 즐기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지루해, 지루해… 그래서 자유롭다
지루함 못 견디는 인간 문화와 문명을 만들다
“뭐 재미있는 일 없어”… 지루한 당신, ‘사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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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식, 이종찬, 임채정, 이경숙, 김용준.

김영삼정부부터 박근혜정부까지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을 맡았던 인물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독실한 개신교인이다. 한국의 지도층, 특히 정치권력에 얼마나 많은 개신교인들이 포진해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10만명에 육박하는 종사자(목사)와 수백만명의 추종자(신도)들이 적어도 매주 한 차례씩 일정한 장소(교회)에 모여 학습(설교)하고 교류하는 조직이 한국에 또 어디 있는가. 더구나 그 학습 내용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신념과 믿음에 관한 것이고, 그것도 수십년간 꾸준히 해왔다. 이같이 막강한 세력을 지닌 개신교는 한국현대사의 고비고비마다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신간 ‘대통령과 종교’는 이승만부터 박근혜까지 대통령의 종교성향과 재임 기간 있었던 종교적 사건 등을 통해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국가권력과 종교가 어떻게 관계를 맺어 왔는지 살펴본다. 불교나 천주교도 언급되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는 개신교의 정치화, 권력화 과정이다. 기독교방송(CBS) 인터넷 기자를 거쳐 현재 CBSi 노컷뉴스 본부장인 저자는 “굴곡진 한국현대사가 만들어낸 권력과 종교의 유착은 서양종교인 개신교를 130년 만에 권력의 최정점에 세우는 위력을 발휘했다”고 설명한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에서 개신교는 축복받은 종교다. 잘 맞아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한국 현대사의 변화시기마다 개신교에 도약의 발판이 마련됐다. 미 군정, 6·25전쟁 등 6번의 기회와 함께 개신교 압축 성장의 배경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게 권력과의 유착이다.

1948년 5월31일 제헌국회 개회 당시 이승만은 하나님에 대한 기도로 역사적인 첫 회의를 시작했다. 1948년 5월9일로 예정됐던 첫 국회의원 선거가 ‘주일(일요일)’이라는 이유로 다음 날로 연기한 이승만 정부는 군대에서 개신교 선교를 가능케 한 ‘군종제도’까지 시행한다.

군사독재 정권의 등장은 개신교의 권력화를 가속화시켰다. 정권 기반이 취약했던 군사독재 정권은 반공을 최우선 과제로 삼을 수 밖에 없었고, 미국의 지지도 절실했다. 반공과 친미를 대표하는 집단이 바로 개신교였다. 이에 개신교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과 돈독한 유대관계를 형성하며 지속적인 성장을 추구해 나갈 수 있었다.

개신교는 막강해진 영향력을 토대로 정치권력과 대립하기도 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등 진보정권이 들어서자 보수세력을 이끌며 대정부 투쟁을 주도한 개신교는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장로’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이들은 이명박 당선을 기원하는 특별기도회를 개최하고, 이명박의 각종 비리 의혹이 터질 때마다 노골적으로 변론했다. 종교가 없는 박근혜 대통령 집권 후에도 ‘개신교인 중용 현상’은 두드러졌다.

저자가 개신교의 긍정적인 역할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반독재 민주화투쟁과 인권운동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지금 개신교는 한국사회에서 권력화된 이익집단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개신교의 이미지 추락은 2005년부터 교세 하락으로 이어졌고, 2010년 들어서는 일부 교회의 파산을 우려할 지경에 이르렀다.

종교와 정치.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워낙 민감하고 은밀한 사안이어서 양자의 유착관계가 제대로 파헤쳐진 적은 없었다. 이 책이 전하는 이야기도 빙산의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저자가 결어에 “이 책을 계기로 종교와 권력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시작되었으면 한다”고 적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대통령과 종교
백중현 지음/인물과사상사

권력이 된 교회… 등 돌리는 신자들
한국의 대통령들이 그 종교를 택한 이유는
종교는 어떻게 권력이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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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競爭)’을 미덕으로 여기는 시대다. 기록과 점수 경쟁이 생명인 스포츠 경기는 말할 것도 없다. 학계와 기업, 예술계 종사자들도 남보다 앞서야 살아남는다. TV에서는 연일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내보낸다. 가수, 댄서, 패션모델, 패션디자이너는 물론 순수미술을 하는 예술가까지 ‘최후의 1인’ 자리를 놓고 경쟁한다. 열띤 노력의 결과에 대한 보상과 찬사는 대개 경쟁의 승자에게만 돌아간다.

경쟁은 과연 ‘최고’를 가려내는 최선의 방법인가. 저자는 반기를 든다. 오히려 무자비한 경쟁이 어떻게 개인과 조직을 망가뜨리고 있는지 다양한 사례를 들어가며 웅변한다.

2013년 초 하버드대학교의 얘기다. 100명이 넘는 학생에게 자퇴 권고를 내렸다. 집에 가져가서 풀도록 한 시험에서 똑같은 내용의 답안지가 수두룩했다. 학교는 학점 경쟁이 학생에게 더 많은 동기를 유발하고 성취도를 높일 것으로 기대했지만, 학생들은 경쟁 압박을 견디다 못해 커닝의 유혹에 빠진 것이었다. 저자는 예일대 졸업생 알렉산드라 로빈스의 말을 인용한다. “(지금의) 교육은 아이들이 서로 상대방을 물리치고 교육제도를 이리저리 빠져나갈 전략을 짜는 생존게임이다.” 지나친 경쟁이 학생의 동기와 창의성을 오히려 갉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경쟁의 부작용은 기업에서도 일어난다. 작가 커트 아이켄월드가 마이크로소프트사 직원을 대상으로 인터뷰한 결과, 사내에서 가장 파괴적인 제도로 ‘스택 랭킹(Stack Ranking)’을 꼽았다. 임직원을 성과에 따라 서열을 매겨 하위권은 강제 해고하는 제도를 말한다. 저자는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십 년 동안 진정 혁신적이라고 할 만한 기술을 개발하는 데에 실패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지적한다. 직원 모두를 지속적으로 위협한 나머지, 뛰어난 사람이 되겠다는 야심보다는 안전해지려는 욕망만 불어넣었다는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결국 2013년 이 제도를 폐지했다.

하버드대 총장을 지냈고 한때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OMC) 의장 후보로 유력시됐던 래리 서머스의 경험담도 소개된다. 그가 헤지펀드 D.E.쇼에서 근무하면서 만난 동료들에 대한 얘기다. “회의실에는 똑똑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데 아무도 얘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어요. 상세히 설명하는 순간 그 아이디어는 회사 소유가 되니깐, 괜찮은 아이디어가 있을수록 입을 다물죠.” 지나친 경쟁이 오히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죽이는 사례다.

경쟁의 역효과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한 저자는 “차라리 경쟁에서 패하라”고 말한다. 사람의 경쟁 본능이란 패하기 전에는 멈출 줄 모르니, 차라리 경쟁에서 지고 대가를 치르는 게 낫다는 것이다.

대안으로는 ‘협력’을 제시한다. 인간의 경쟁심과 욕심을 부인할 순 없지만, 함께 힘을 모아 일하는 것도 인간의 엄연한 본성이라는 설명이다. 저자는 과열 경쟁 대신 협력이 성공한 사례 중 하나로 스티브 잡스를 든다. 그가 홀로 넥스트를 이끌었을 때에는 실패했지만 스티브 워즈니악(애플), 존 라세터(픽사), 조나단 아이브(애플) 같은 똑똑한 조력자를 만났을 때에는 성공을 거뒀다는 얘기다.

저자는 경쟁보다 협력과 상호의존을 통해 더 큰 보상을 얻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친구와 연인들은 서로에게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발견할 수 있고, 이것이 사회적 유대를 풍부하게 하고 이어주고 또 새로이 만들어 준다. 게임과 스포츠를 재미로 즐기면 공정성과 도덕성, 지구력, 자제력, 공동체 의식을 가르쳐줄 수 있다. 이것들이야말로 누구에게나 평생 열려 있는 더 큰 보상이다.”

너무 쉽고 이상적인 결론 아닌가. 그런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BBC 프로듀서 출신 저널리스트이자 기업가인 저자가 제시하는 사례가 꽤나 실감나게 다가온다. 과학, 언론, 기업, 교육, 결혼, 스포츠, 종교, 영화,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경쟁의 실패와 폐해의 진상이 설득력을 더한다.

경쟁의 배신
마거릿 헤퍼넌 지음, 김성훈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북리뷰] 경쟁의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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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공매도자들이 승리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주식시장에서는 종종 이런 소리가 나온다. 공매도 대상이 된 기업 측의 말이다. 공매도란 주식을 빌려서 먼저 판 뒤 나중에 주식을 되사서 갚는 투자 방식이다. 주가가 떨어지면 싼값에 사서 상환할 수 있다. 공매도 투자자로서는 투자한 종목의 주가가 큰 폭으로 떨어질수록 그 만큼 더 큰 차익을 챙기게 된다. 이 때문에 공매도 대상이 된 기업은 공매도 투자자가 주가를 떨어뜨려고 일부러 루머를 퍼뜨리는 등의 ‘작전’을 구사한다고 비판한다. 실제 그런 경우도 왕왕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우리가 공매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회사에 비판적인 것이 아니다. 그 회사에 비판적이기 때문에 공매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의 헤지펀드인 그린라이트의 설립자이자 최고경영자인 데이비드 아인혼(David Einhorn)이다.

이 책은 그가 얼라이드캐피털사(이하 얼라이드)에 공매도를 주장하면서 주가를 폭락시키기까지 과정을 그렸다. 6년이 걸린 싸움이었다. 얼라이드는 메릴린치증권이 방어에 나서고, 월스트리트 투자은행 와코비아(Wachovia)까지 ‘강력 매수’를 권하며 목표 주가를 29달러로 설정했지만 결국 0.59달러까지 추락했다.

얼라이드는 보유 자산의 가치를 시장가격 이상으로 부풀리거나 여신 손실률을 지나치게 축소하는 식으로 회계를 운영했다. 심지어 손실조차 영구적인 것으로 판단되기 전까지는 장부에 넣지도 않았다. 저자는 이런 문제를 들어 얼라이드가 지나치게 고평가돼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이 책을 쓴 목적이 비단 얼라이드의 부정행위를 입증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미국 정부를 필두로 한 부정행위 규제 당국자들의 무관심한 태도도 겨냥했다고 쓴다. 규제당국과 증권거래위원회, 의회, 검찰, 회사 감사와 이사회, 이를 취재하고 고발해야 할 기자와 편집자들도 비판의 대상이다.

얼라이드전(戰)의 결말을 아인혼은 이렇게 설명한다. “얼라이드는 그렇게 된 건 신용시장의 붕괴 때문이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내 대답은 얼라이드가 그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건 역사적인 신용거품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거품 경제를 포함해, 규제당국의 책임 방기가 얼라이드의 잘못된 관행을 키웠다는 얘기다.

이 싸움의 과정을 통해 독자는 기업의 회계 부정을 찾아내는 방법을 알 수 있다. 회사 측의 화려한 변명에도 불구하고 어떤 점이 잘못됐고, 무엇이 부족한지 의문을 품을 수 있는 기초지식을 얻을 수 있다.

이 밖에 투자자를 위한 조언도 있다. 저자에 따르면, 너무 많은 신규 자금이 몰리는 펀드는 늘 경계해야 한다. 갑자기 많은 자금이 투입되면 펀드는 새로운 투자 대상을 찾아야 하거나, 기존 투자 대상을 확대해야 하는 압력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직업 펀드매니저들은 습관처럼 신규 자금을 기존 포지션에 투입하는데 이후 수익률은 목표치보다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주식 투자를 하기 전에 그 종목에 어떤 기회가 있는지 분명히 알고, 매매 상대방보다 더 많은 분석을 바탕으로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주식시장은 비인격적인 곳이다. 주식시장에서 어떤 종목을 매수할 때 우리는 상대방 매도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상대방이 정보가 부족하다거나 투자능력이 떨어진다고 막연히 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무심코 매수 버튼을 누르려는 주식투자자는 저자의 다음과 같은 말에 손을 거둘 수도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오늘 우리에게 어떤 주식을 매도한 사람은 우리보다 더 오래 그리고 더 밀접하게 그 주식과 관련된 상황을 주시해 온 사람이고 일찍이 그 주식을 매수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지금 마음을 바꿔 주식을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상대방은 해당 기업 내부인일 수도 있다.”

주식투자자들에게 생생한 사례를 통해 정확한 정보 습득과 신중함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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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아인혼 지음, 김상우 옮김/부크온(부크홀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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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교양서적을 읽는 것은 지식을 쌓기 위함은 아니다. 정보를 얻기 위해 읽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해당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아닌 일반 독자들은 과학 지식을 통해 지적 영감을 얻거나 그냥 읽는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과학서적을 읽는다.

과학적 지식의 지적 영감은 세계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진화론을 인정하는 사람이 세계와 사람을 바라보는 눈은 그와 대척점에 있는 창조론을 인정하는 사람과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철학의 주춧돌인 세계관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진화론, 창조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 세상에 존재하거나 소멸한 다양한 생명체의 탄생과 변화를 설명하는데 진화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고등학교 때까지 생물 시간에 배운 피상적인 지식 이상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진리, 과학적 진실은 단순한 문장으로 표현될 수 있기에 피상적인 지식만 가지고 있어도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세상의 생명체는 단세포 생물에서 시작해 생명체가 자연에 적응해 가는 ‘자연선택’ 과정을 통해 복잡다기한 영장류까지 나타났다. 진화론에 대해 이 정도만 알고 있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생각의 연결고리를 좀 더 촘촘히 하고, 진화론을 다른 생각에 적용하려면 진화론의 핵심 문제들에 대한 과학자들의 고민과 사고의 과정을 들여다 보아야 할 것이다.

다윈의 식탁. 현대 진화론의 여러 논쟁점들을 진화론의 대가들이 마치 서로를 눈 앞에 두고 논쟁을 펼치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서울대 장대익 교수가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진화론의 핵심 문제들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이런 서술방식을 사용했다. 저자의 유려한 글솜씨와 적절한 비유는 책읽기의 즐거움을 준다.

먼저 저자가 다윈의 아바타가 시청자들을 향해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푼 ‘이것이 진화론이다’라는 내용을 보자. 생명체의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한다. 진화는 ‘변화를 동반한 계승’이다. 생명체의 종의 변화는 더 고등한 생명체로 진보하는 ‘생명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나무의 줄기에서 가지가 뻗어나가는 것처럼 생명체는 한 두개의 공통 조상에서 출발한 생명이 다양하게 분기해왔다는 것이다. ‘생명의 나무’론이다.

종의 변화와 분기에 작용하는 힘은 ‘자연선택’이다. 즉 생명체가 자연에 적응하고 생존하는 과정에서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진화가 항상 최적의 상황으로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진화가 만들어낸 어이없는 신체구조도 있다는 것이다. 척추동물의 눈에서 시신경이 망막 앞으로 나온 것, 남성의 요도가 전립샘 중앙을 통과하는 것 등을 예로 든다.

저자가 일반 독자를 위해 쉽게 풀었다지만 책 전체는 배경 지식이 많지 않으면 충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어떤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논쟁하는지 아는 것만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논쟁의 주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자연선택의 힘은 얼마나 강력한가. 자연선택의 산물인 ‘적응(adaptation)’과 적응이 아닌 것을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강간도 적응인가.

둘째, 자연선택이 과연 어느 수준에서 작용하는가. 개체인가, 유전자인가. 아니면 집단인가. 즉, 각 생명체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연에 적응하는데 협동하는 행동이 어떻게 진화할 수 있는가. 도덕성, 이타심은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가.

셋째, 진화의 과정을 설명하는데 핵심으로 등장하는 유전자란 무엇인가. DNA 염기서열인가, 아니면 세포분자인가. 같은 DNA 염기서열을 가졌어도 주변 환경에 따라 달리 생명체의 외양이 달리 표현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넷째, 진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나, 아니면 계단을 오르듯 급격하게 이루어지나. 진화의 속도와 양상에 대한 문제다.

다섯째, 생명은 진보(progress)하는가. 진화를 진보와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정당한가. 생명체 구조의 복잡성의 증가는 진보적 진화의 증거는 아닌가.

저자는 이런 논점에 대해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정리하고 마지막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인다. 그리고 책의 뒷부분에 진화론 자체의 논점이라기 보다는, 진화론을 둘러싼 사회적 논점인 진화론과 종교에 대해 진화론내 대척점에 있는 두 학자의 입을 빌려 설명한다.

저자는 2008년 처음 쓴 ‘다윈의 식탁’에 설명을 덧붙이고 출판사를 바꾸어 이번에 개정판을 냈다. 이 책을 읽기 전이나 읽고 난 후, 저자가 올해에 낸 ‘다윈의 서재’와 이 책에서 언급된 책 서너권을 읽으면 진화론을 둘러싼 논쟁과 사고의 과정을 머리 속에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다윈의 식탁
장대익 지음/바다출판사

나와 궁합이 맞는 저자는 어디에?
[북리뷰] 다윈의 식탁
선한 사람이 악한 짓 할 땐 종교가 개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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