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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자기개발

편견이거나 선입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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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은 생활환경 속에서 사회적으로 학습되어 간다. 타당한 증거나 직접적인 경험과는 비교적 무관하게 특정 대상에 대하여 갖게 되는, 지나치게 호의적인 또는 비호의적인 감정적 태도이다.

특징으로는 첫째, 불충분하고 부정확한 근거에 기초하고 있으며 특정의 선입관에 강하게 영향을 받는 태도이다. 편견은 그 뒷받침이 되는 근거 등에 관심을 두지 않고 새로운 정보 등의 영향도 부정하고 고집적이다. 둘째, 대상에 가치 판단이 포함되어 있다. 즉, 어떠한 가치기준에 기초한 상태에서 실제보다 긍정적으로 높게 평가하거나 부정적으로 낮게 평가하는 태도가 나타난다. 셋째, 비논리적이고 감정적인 태도이다. 넷째, 집단적 현상이다.

최재천의 모든 책이 싫은 게 아니다. 그저 《통섭적 인생의 권유》라는 제목이 싫다. 제목이 주는 느낌과 몇 가지를 읽어보니 더 싫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싫다기보다 맘에 들지 않는다.

먼저, 한때 신선하다고 느꼈던 '통섭'이 거북하다. 장터의 약장수가 외치는 만병통치약처럼 모든 것을 통섭으로 해결하려 한다. 아직도 단어 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통섭'이다. (芝河의 '애린' 투로) 그저 통섭이어라.

다음으로, 통섭'的'이 거슬린다. 的이 만능이 아닐진대 마치 통섭을 그렇게 사용하듯 모든 것에 갖다 붙인다. (물론 최재천의 뜻이 아니라 편집자의 뜻이라 이해해도)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싫다.

다음은 인생'의'가 맘에 안 든다. '의'를 쓰니 의미 전달이 어렵다. 통섭적 인생이 나에게 권유하는 것인지 통섭적 인생을 살라고 하는 것인지. '의'를 남발하면 의미를 상쇄시키는지 잘 알고 있는 저자가 (물론 이것도 저자보다는 편집자의 뜻이라 생각해도) 별 생각 없이 사용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

또, '권유'라 쓰여 있지만 '강요'라 느껴진다. 완곡한 표현이지만 받아드리고 안 받아드리는 것은 내 맘이다.

그리고 알라딘이 '인문'으로 분류했다. 왜 '인문'일까? 자기계발이라면 몰라도. 마지막으로 책 소개에 "지난 15년 동안 그가 발언해 온 어젠다 중에서 공감의 기록으로 남길 만한 것을 골라 정리한 것"이라 싫다.

그저 타당한 증거나 직접적인 경험과는 비교적 무관하게 특정 대상에 대해 갖는, 지나치게 비호의적인 감정적 태도이다. 혹자는 편견이라 말하기도 한다. 아니면 선입견이다.

그나저나 2013년 나온 책이 절판이다. 왜?



통섭적 인생의 권유
최재천 지음/명진출판사


덧붙임_
편견은 생활환경 속에서 사회적으로 학습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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