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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린 간행에 붙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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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린 간행에 붙여


  애린의 실제 인물이 누구냐고 묻는 사람이 많은데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만해더러 님이 누구냐고, 어떤 여자냐고 묻는 바보짓처럼.

  구태여 그리움이니 목마름이니 잃어버린 민주주의니, 분단된 조국 따위 뱀발을 붙여 섣부른 설명을 가할 필요가 무엇 있으랴. 구태여 말하라면 모든 죽어간 것, 죽어서도 살아 떠도는 것, 살아서도 죽어 고통받는 것, 그 모든 것에 대한 진혼곡이라고나 할까. 안타깝고 한스럽고 애련스럽고 애잔하며 안쓰러운 마음이야 모든 사람에게, 나에게 너에게, 풀벌레 나무 바람 능금과 복사꽃, 나아가 똥 속에마저 산것 속에는 언제나 살아 있을 것을. 그리고 그것은 매순간 죽어가며 매순간 태어나는 것을. 그러매 외우 이문구형은 『애린』을 일러 인물시뿐 아니라 만물시라고 하였것다.

  아직도 바람은 서쪽에서 불고, 아직도 우리는 그 바람결에 따라 우줄우줄 춤추는 허수아비 신세, 허나 뼈대마저 없으랴. 바람에 시달리는 그 뼈대가 울부짖는 소리 그것이 애린인 것을. 몹시도 티끌 이는 날, 두견꽃이 죽어간 날 누군가 태어났다. 술상 밑에서, 애기파 속에서, 겨울 얼음강에서 새로운 얼굴로.

  나는 그 죽고 새롭게 태어남을 애린이라 부른다. 앞으로 이 글이 얼마나 계속될지 여기서 끝이 날지 잘라 말 못한다. 생명은 이렇게 이 순간에도 죽고 또 태어나기에. 다만 이제까지 발표된 것을 이문구형의 청에 따라, 또한 죽고 다시 태어나는 실천문학을 위해, 내 사랑하는 후배 시인 송기원을 위해 책 한 권으로 묶는다. 애린은 이 한 권의 시묶음이기도 하다. 부디 모두 애린이어라!

  1986년 2월 9일
  해남에서

  김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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