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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향기로운 시와 소설

깊이 잠든 이끼의 샘 - 『꽃과 그늘』- 김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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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그늘』- 김지하

「후기」 깊이 잠든 이끼의 샘
출처 : http://www.artnstudy.com/kimjiha/Literature/Poem/Poem_form_07.asp?page=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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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에 시나 글에 관한 얘기를 처음으로 들은 것은 언제였고 또 그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몇 가지 금세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긴 있다. 그런데 그것은 과연 나의 시와 참으로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글을 쓰려거든 똑 이렇게 써야 한다. 백두산 꼭대기에서 어떤 놈이 방귀를 뻥 하고 냅다 뀌면 한라산 꼭대기에서 다른 한 놈이 ‘어이 쿠려!’ 이렇게!
또 이렇게!
영광 법성포 칠산바다에서 조기가 한 마리 펄쩍 하늘로 뛰어올라 강릉 경포대 앞바다에 가서 풍덩 하고 떨어진다.
뭐 이렇게! 알겄냐?”
내가 일곱 살 때던가, 외할아버지의 말씀이다.
직 접 시나 글을 말한 건 아니지만 깊은 관련이 있어서 얘기한다. 우리 아버지는 본디가 술고래신데 술에 깊이 취하면 간혹 잠꼬대를 하셨다. 그 중, 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몇 차례에 걸쳐 똑같은 잠꼬대를 들어서 마음에 깊이 새겨진 말이 하나 있다. 왈,
“인생은 사막이여! 술은 꽃이여!”
이뿐이다. 뻔한 얘기일 뿐인데 이 한마디가 내 시력(詩歷) 40여 년 내내 잊히지 않고 작용을 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삶 과 텍스트가 하나라는 나의 소신은 이것과도 관련이 있다. 아버지의 그 고달팠던 삶, 그럼에도 결코 좌절하거나 굴복하거나 비열하지 않았던 그 삶과 이 잠꼬대 한마디가 연속될 때 문득 그것은 승화되어 시론(詩論)이 되고 미학(美學)이 되어버리곤 하던 것이다. 여기에서 ‘꽃’은 바로 ‘그늘’로 해석되고 이해되었던 탓이다.
그래, 내 이십대의 어느 자리에선가 술, 꽃, 시라는 주제에 대해 말했던 것도 아마 그 때문이리라.
과 연 술은 꽃이요, 꽃은 시인가? 능히 그럴 수 있다. 특히 대중적 민중의 삶의 현장에서는. 알다시피 나는 시의 핵심원리를 ‘그늘’로 본다. 지난날에도 여러 번 생각했지만 나의 이 ‘그늘’과 아버지의 그 ‘꽃’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지금 또다시 고개를 든다. 아마 굉장히 재미있고 심오하면서도 매우 대중적이고 민중적인 미학과 시학의 테마가 나올 것 같다. 언젠가 한번 강의로 시도해 볼 참이다.
여기에 이르자 최근의 잊지 못할 기억이 한 가지 바로 뒤따른다. 나는 연초 4월에 일본의 경도(京都)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멋진 동포시인 한 분을 만났다. 그 험난한 일본 땅에서 어렵게 살면서도 수십 년을 내내 단기(檀紀)를 고집하는 민족시인 김이박(金理博)이 바로 그이다. 그의 필명 ‘이박(理博)’도 사실은 그의 고향 경상도 말로 ‘이바구’에서 온 것이니, 곧 ‘말쟁이’의 뜻이라 ‘문필가’를 말함이다. 그의 안내로 금각사(金閣寺)며 은각사(銀閣寺)며 다 돌고 용안사(龍安寺)에서다. 내가 한민족의 민중미학의 핵심원리를 ‘그늘’이라고 설명한 뒤, 귀명창들이 초년병 소리꾼의 소리를 다 듣고 나서 ‘그늘이 없어!’ 한마디 하면 끝난다는 얘기를 했을 때 그는 그와 똑같은 경우, 일본의 예술감식가들은 ‘하나가 나이(はなが ない)!’라 한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것은 ‘꽃이 없다!’란 뜻이다. 갖출 것 다 갖추고 온갖 기교를 다 동원하고 젖 먹던 힘까지 몽땅 쏟아붓는 데에도 충족되지 않는 최후의 그 어떤 한 가지!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되는 금척(金尺)과 같은 그 무엇! 우리 민족의 경우에 ‘그늘’에 해당하는 바로 그것을 ‘하나(はな)’ 즉 ‘꽃’이라 한다는 것이다. 왜 하필 ‘꽃’이라 할까?
김이박 시인이 가르쳐준 봄비의 일본말, ‘하루사메(はるさめ)’가 부슬부슬 내리는 4월의 그 용안사(龍安寺) 숲에서 ‘봄비’라는 한국말의 뉘앙스와, 똑같은 그 비를 ‘하루사메’라 부르는 일본말의 뉘앙스에서도 ‘그늘’과 ‘꽃’의 그 비슷함과 서로 다름을 생각했다.
꽃과 그늘!
일본미학과 한국미학!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나와 내 아버지의 삶!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또한 멀티미디어와 네트워크 세대인 내 아들의 삶과 나의 삶에 있어서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내가 젊었을 때 쓴 시 한 편이 지금 생각난다. 그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아버지의 시든 꽃에선
쉰내가 난다.
땀내도 이젠 다 지나간
환갑 진갑의
쉰내가 난다.



아마도 아버지의 그 고달픈 삶, 저녁의 술 한잔이 유일한 낙이었던 사막 같은 그의 삶에서 꽃은 이미 시든 꽃이었고 꽃의 시듦은 땀내를 지난 쉰내처럼 이미 ‘노을’이거나 ‘그늘’에 가까이 간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분에게 있어 꽃은 여전히 그늘이 아닌 최고의 빛나는 시절의 그 외로운 아름다움, 즉 ‘빛’이고 더욱이 ‘흰 빛’이었던 사정!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 사정은 기이하게도 일본의 좌파 몰락 이후 소위 ‘건담세대’의 그 ‘빛과 중력(重力)의 분열’ 상태의 한편에서 비록 환상임에도 외롭게 반짝이며 사람을 끌어들이는 그 ‘빛’의 초월적인 의미와 비슷한 것이니 일본제국주의시대에 교육을 받은 부친에게 있어 그럴 리는 없겠으나 혹시라도 그 한귀퉁이에서 ‘꽃’이란 이미지가 내 아들 또래 비슷한 소위 ‘건담세대’의 사회 중력질서로부터 완전 이탈한 초월과 환상 속의 그 ‘빛’과 똑같은 것은 아닐까? 그 ‘꽃’과 그 ‘빛’의 배후에 ‘하나가 나이’의 바로 그 ‘꽃’의 고립성, 초월성이 도사린 것이 아닌지?
그러면 묻자.
일본 파시즘과 일본 전통미학의 그 외로운 꽃의 오똑한 초월성의 관계는? 박정희 파시즘과 한국 전통미학에서의 ‘흰 그늘’의 그 초월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이중생성의 관계는?
나 는 젊을 때 유럽미학을 공부하면서 여러 경우에, 분명 서로 다른 학파임에도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바, 저 ‘장미꽃의 아름다움’이 가진 고립적이고 초월적인 현존으로서의 실체에 관련한 소위 ‘미(美)의 고독한 실체성’ 얘기에 부딪혀 깊은 혼란에 빠진 적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예컨대 1974년 유신독재의 암흑, 그 이중적 분열과 복잡한 다중적 구속에 사로잡힌 어두운 현실중력장의 캄캄한 무게에 짓밟히면서도 그리움이나 타는 목마름과 함께 그 내면으로부터 폭발하듯 생성해 나온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저 신성한 ‘흰 그늘’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다시 혹시라도 아버지의 그 ‘꽃’의 외로운 고립과 같은 내 아들의 ‘빛’, PC방 속에서의 해방, 저 혼자만의 고독한 우주의 그 쓸쓸한 이미지와 관련이 있는가? 민주주의 역시 이러한 눈부신 고립일 뿐인가?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그리고,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여기, 두 가지 빛이 있다. ‘신새벽’과 ‘외로운 눈부심’
이것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꽃’ 또는 ‘빛’인가? 아니면 ‘흰 그늘’인가?
신 새벽과 함께 있는 뒷골목, 그리고 민주주의와 그 이름을 벽에 쓰는 나의 존재가 있고, 외로운 눈부심 위에는 삶의 아픔이, 끌려간 벗들의 피 묻은 얼굴이 겹쳐지고 있으니 대답은 이미 나온 셈이다. 이 ‘신새벽’과 ‘외로운 눈부심’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금각사(金閣寺)’의 ‘꽃’이나 일본 신세대 우파의 ‘가사라키’의 고신도(古神道) 와타나베 당과, 칠지도(七枝刀)의 그 ‘빛’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미란 과연 무엇일까?
현실이라는 중력의 이중적?역설적 인력체계의 구속인 ‘그늘’로부터 그 내면에서 무궁무궁 생성해 올라오는 그 나름의 초월성의 흰 빛인가? 아니면 현실 이중성의 중력장으로부터 아예 이탈하여 고립한, 아름답고 슬프고 외로운 꽃의 저 큰 우주적인 고독한 실체성인가? 과연 무엇인가?
나의 백 편의 시들 속에 자주 나타나는 꽃이나 빛과 같은 외롭고 아름답고 초월적인 이미지들은 과연 그늘과 같은 우리의 이중생성적인 현실의 삶의 표현들에 대해 어떤 구체적이고 미학적인 역동적 관계를 갖는 것일까?
‘꽃과 그늘’
참 으로 아름답고 독살스런 주제다. ‘흰 그늘’이 아마도 그 분열에 대한 대답이 되겠지만, 백 편이나 되는 시들을 읽어갈 때에 이 말을 먼저 앞세워버리면 별로 재미가 없을 듯싶다. 시 읽기에서는 무슨 가늠자를 전제해서는 안 된다. ‘쏠라페시브’가 적당하다. 해가 움직이는 대로 뒤따라가며 무정형으로 대응하면서도 동시에 해 자체의 뜨거운 빛을 닮아 도리어 적극성을 띠는 것!

내가 문학을 실제적으로 수업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다. 국어와 한국문학을 가르쳤던 아름답고 풍요한 상상력과 큰 사랑의 품을 지닌 여선생님 한 분과, 영어를 가르쳤던 쏘는 듯한 지성의 눈빛과 현대 영문학에 대한 뜨거운 정열을 가진 남선생님 한 분이 학교에 계셨다.
이 두 분의 따뜻한 도움과 엄격한 지도로 시골서 올라온 무지렁이가 그나마 촌놈 특유의 캄캄절벽적인 ‘멍청끼’를 면하고 저만 잘난 줄로 착각하기를 버릇하는 ‘올통볼통끼’를 졸업할 수 있었다.
우 리말의 아름다움과 오묘함을 그때 처음 알았고 한용운, 김소월, 김영랑, 서정주를 줄줄 외우고 다니며 한(恨)과 불교적 허무(虛無), 현실성과 무궁성의 이중적 역설, 육욕적 세계인식과 근역(槿域) 신선도(神仙道)의 아름다움의 비밀을 조금이라도 눈치챈 것이 그때부터다. 키이츠나 셸리에서 스펜더, 오든의 모더니즘까지 소로우의 ‘월든’의 초월주의에서 비트 제네레이션의 잭 캐루악과 알렌 긴스버그 類의 이탈주의까지, 그레이엄 그린이나 엘리어트에서 또 그와는 전혀 달리 또 하나의 산맥이라 할 수 있는 딜란 토머스까지의 넓은 교양, 특히 딜란 토머스의 영적이고 우주적인 생명사상에 깊이 심취하게 된 것 역시 바로 그 무렵 고등학교 때에 시작된 일이다.
다행인 것은 소박하긴 하지만 그때 시작된 문학적 소양의 첫 틀이 한민족 우월주의나 맹목적인 서구 추종주의 어느 한쪽에도 기울지 않고 고르게 배합되었다는 점이다. 국문학을 통한 동양 이해와 영문학을 통한 서양 이해의 행복한 균형의 싹을 내게 선사해 주신 두 분 선생님께 감사하는 마음 어디에도 비할 데가 없다.
그러나 한편 그런 복잡한 영향들은 그 나이의 나에겐 통합이 불가능한 혼돈 그 자체였다. 내 머리 속은 그야말로 쓰레기통이었고 그 무렵의 시들은, 한번 저속한 표현을 써서 말한다면, 아침엔 춘향이네 사랑방이요, 저녁엔 메리네 응접실이었으며, 점심때는 ‘양복에 짚신’이요, ‘두루마기 바람에 선글라스’인 셈이었다. 그러한 내면의 혼돈과 고뇌는 당연했다. 그 무렵 무척도 가난했는데 그런 열악한 삶과 당시의 독재와 부패와 분단, 전쟁 후의 참혹함, 빈부 격차, 그리고 내면의 무정부상태……. 이런 이유들 때문에 끝없이 끝없이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되었고 생각은 늘 연옥과 지옥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지금 그 무렵의 시편들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사실은 내 스스로 몇 차례에 걸쳐, 아마 대학 초년 때였던가, 불싸질러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현대적 표현으로는 바로 ‘분열’이요 ‘이중구속’이었다.
내 머리 속엔 평화, 해탈, 완성, 초월, 초극, 해방의 단어들이 저절로 왔다갔다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림의 떡이요 소문일 뿐 내 몫이 아니었고 실제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할 만한 그 어떤 조짐이나 사례도 당시 나와 이 나라의 현실에서는 없었다.
시에도 그런 것은 없었다. 이 점은 중요하다. 이미 그때부터 사람 안팎의 통합된 완성과 초월적 성취는 나의 암묵적 숙제가 되었는데, 어디에서도 내면의 개성적이고 우주적인 평화 완성과 외면의 사회적 변혁, 빈부 평등과 자유와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진보와 민족의 통일 따위가 함께 인식되고 함께 추구될 수 있다는 단초적 사상도 없었으며, 그 표현조차 없었다.

6·25 이후 1956년, 1957년, 1958년, 1959년의 한국 사회의 포괄적 인상은 무엇인가?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가난’이다. 물질에서든 정신에서든, 개인이든 사회든, 서울이든 지방이든, 상층부든 하층민이든, 문화도, 정치도, 경제도, 과학도, 그 어느 분야에서도 모두가 여러 가지 의미로서 단 한마디, ‘가난’ 그 자체였다.
‘가난!’
그것이 내 청춘의 생각과 시의 출발점이었다. 만약 여유가 있다면, 내 시의 비트들을 한번 분석해 보라! 거기 틀림없이 어떤 허기진 영혼이 노래 부를 때 어김없이 함몰되는 음악성의 지옥인 ‘에어포켓’, ‘블랙홀’, 즉 비트의 숨가쁜 언덕 오르기가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헉헉거리며 순간순간 ‘제로’에, ‘무의미(無意味)’에, ‘침묵’에 빠져든다. 이것이 무엇일까? ‘여백’이요 ‘틈’인가? 아니다. 나는 그것을 잘 알지만 늘 외면해 왔다.
내용이 아니다. 정신보다 더 깊은 영의 가난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서, 형식보다 더 깊은 장단, 호흡에서 기어나온다―비트가 아니라 장단이긴 하지만, 비트라는 심장박동의 뜻을 비친 까닭이 있다― 이것을, 어느 때던가, 허수경 시인은 몸과 마음 사이의 ‘입술’이라고 표현했는데, 바로 그 입술이 내용과 형식 사이에 있는 영의 호흡, 가난과 배부름을 표현하는 장단이다―그것이 가난할 때 장단이 아니라 비트가 된다!― 바로 그 장단을 내 시에서 한번 분석해 보라. 그 생성체계 안에 그 무렵,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청춘의 내 삶의 내면―아니, 외면과의 복합적 삶의 내면적 반영으로서의 영적 상황―의 가난, 사랑 결핍, 눈물, 동경의 좌절과 수음(手淫)의 죄의식, 외로움, 지옥과 같은 권태의 고통, 잠 못 이루는 밤의 아편 같은 몽상과 그때의 뭇 유령들의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일본의 어느 문학평론가는 민중문학과 민중사의 미래를 원령사관(怨靈史觀)에서 찾자고 한 적이 있다. 우리 쪽에서 말한다면 ‘한문학(恨文學)’이요 ‘한사관(恨史觀)’이 된다. 칼 융 쪽에서 접근한다면 ‘그림자론(論)’이 되는데 그보다는 ‘그늘론(論)’이 한결 본격 미학이요, 더 과학적으로 들어간다면 ‘율려학(律呂學)’이 정확하다. 율려의 장단 안에 넋이 흔들리는 것, 그것이 곧 ‘그늘’이니까.
그것을 ‘입술’이, 허수경의 그 입술이 바들바들 떨면서 말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 ‘가난’을! 짐작할 수 있겠는가? 내용은, 사유와 이미지와 의미와 감각들은 다 그 위에서 춤출 뿐이다. 독단인가? 그렇지 않다. 바로 그 ‘가난’,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는 ‘입술’인 ‘율려’, 그 ‘율려’의 느낌인 ‘그늘’, 그 이전에 그 바닥에서 흔들리는 ‘제로’가 있었음을 기억하라! ‘에어포켓’ 같은 ‘침묵’과 ‘정지’의 ‘틈’이 있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
실은 초월의 흰 빛, 평화, 창조, 완성, 해탈, 초신성(超新星)과 같은 이 모든 좋은 것들이 처음 태어나 성장하는 ‘블랙홀’이 바로 이 ‘헉!’ 하고 빠져서 무너져내려 버리는 한순간의 판단 정지인 ‘무(無)’, ‘공(空)’이다. 이것이 바로 ‘가난’이고 그리고 ‘가난’의 시적 반영이다.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은 궁지에 몰리면 입을, 눈을, 감각을 닫아버린다. 방어기제인데, 동물적 생명기제다. 이것이 바로 ‘가난’의 출처다. 바로 이것을 내 시에서 찾아낼 수 있다면 이것은 이제 그와는 정반대로 ‘여백’이 될 가능성, ‘틈’으로 전환될 개연성, ‘소통성(疏通性)’으로 발전할 근거가 된다. 그래서 ‘흰 빛’의 출생지, 그 자궁은 시커먼 ‘블랙홀’이다.
만약 율려에서 이것이 밑에 없다면 그것은 그저 리듬과 그 리듬을 제어하는 메타나 라임 같은 시학적 밸런스 기능밖에 안 남는다. 그것이 중요하기는 하다. 그리고 ‘그늘’ 자체가 창조임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런 일반론으로 시가, 예술이 이 험준한 ‘빅 카오스’의 시절에 무엇을 새롭게 창조하고 무엇을 참으로 돌파할 것인가? 그리고 완성할 것인가?
바로 이 ‘가난’, 그리고 그 때문에 나타나는 텅 빈 ‘무(無)’로부터 ‘흰 그늘’, ‘신화 율려(神化 律呂)’, ‘율려의 창조적 차원변화’인 신인간의 신문화가 나타난다. 이것이 참된 초월성이요 진정한 ‘빛’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엔 인간의 용기있는 창조적 응시와 개입과 변형이 필요하다. ‘가난’을 ‘창조’로 바꾸는 것은 ‘각비(覺非)’라고 부르는 용기요 결단이다.
그 러나 나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지금에도 내 시뿐 아니라 내 영혼에 대해서까지도 아직까지도 바로 그 밑바닥의 컴컴한 기억 속의 그 귀신 모습 같은 ‘가난’을 바로 쳐다볼 용기가 없다. ‘각비(覺非)’를 못한다. 아직도 그렇다. 아아, 나는 얼마나 비겁한가! 또 운다. 이 글을 쓰는 순간 또다시 내 마음은 울고 있다.
내 어릴 적 별명이 ‘울냄이’다. 얼마나 잘 울어서 이런 별명까지 붙었을까? 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단은 도피기제다!
이것! 우는 버릇! 이게 바로 ‘가난’이다. ‘가난’은 악마처럼 이렇게 악순환한다. 지긋지긋하다!
이제 내 참 얘기가 나왔구나!
글쓰기는 이렇기 때문에 명상행위요 또 하나의 참선이다.
‘가 난’이 내면화되면 이렇게 오래 가고, 이렇게 질기고, 이렇게 기괴해지고, 이렇게 비열해진다. ‘가난’이 왜 없어져야 하는지, 왜 이 지상에서 끝끝내 사라져야 하는지 이 지점에서도 분명해진다. 내가 오늘은 전과 달리 조금 투명해지고 ‘각비(覺非)’에 접근하는 듯하다. 마음속이 울고 나서인가? 아니면 우는 버릇 자체 속에서까지 ‘가난’을 보아서인가?
오늘 글쓰기는 좀 기이하다. 문학수업 얘기하다 눈물바람까지 나갔다. 그러나 좌우간 우는 것은 좋지 않은 짓이다.
생 각나는 것이 있다. 두 가지인데 첫번째, 박정희란 자가 걸핏하면 울었다. 그것 아주 고약한 짓인데, 왜냐하면 그 자가 울고 나면 반드시 악독한 짓을 했기 때문이다. 나의 울음이 혹 박정희 패턴이 아닌가 하며 가끔 흠칫 놀랄 때가 있다. 허나 난 권력 근처에 갈 일이 없으니 안심하곤 한다.
또 하나는 ‘진국’이라는 이름을 가진 내 조카아이 얘기다. 6·25 직후인데 그 무렵 3년을 내리 흉년이 들어 굶주림이 전국에 퍼져 있었다. 아픈 얘기다. ‘진국’이는 간난아이인데 어쩌다 엄마 젖에서 일찍 떨어져 미음 같은 것을 먹여야 했다. 그 흔한 우유도 구하기 힘든 처지에서 애는 썼지만 기어이 굶어죽었다. 그 아이가 바싹 말라 해골만 남은 몸으로 밤낮없이 내내 울었었다. 내내 울고만 있었다. ‘내내’다.
이것도 도피기제일까?
한밤중 시커먼 뻘밭에 묻었는데, 내가 이 말을 하는 건 다름 아니라, 이것도 시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문득 솟아나서다.
이런 울음, 이런 죽음도 시가 될 수 있는가?
시는 본래가 ‘가난’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 점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된다. 행여라도 가난을 즐겨 시의 주제로 삼을 생각은 말라는 얘기다.
시의 밑바닥에 도사린 ‘가난’의 악마적 성격과 도리어 빛나는 창조에로 이끄는 정반대의 가능성, 그리고 시와는 거리가 먼 캄캄한 죽음으로서의 ‘가난’.
세 가지 얘기를 했다.
기 억하건대 이 세 가지 문제점이 내 초기 시 등에 약간씩 들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의 시적 여행의 목적지도 차표도 그 핵심은 역시 ‘생명’에 있었다. 이미 이때부터 서정주의 초기 ‘생명파’시대와 딜런 토머스의 전 시기가 큰 영향을 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틀림없는 이 사실에 맞대응하는 한 가지 강하고 결정적인 영향이 있었으니 대학 시절의 민족문화운동 바람과 동양미학을 내게 5년 이상 강의해 주신 김정록(金正祿) 선생님이시다.
우 선 외우(畏友) 조동일(趙東一) 형을 잊을 수 없다. ‘우리문화연구회’ 등을 비롯해서 조동일 형은 나를 민요, 무속, 판소리, 탈춤의 세계로, 민족과 민중의 전통예술과 문화의 큰바다로 이끌었으며, 젊어서 일찍 하늘로 돌아간 외우(畏友) 이돈영(李敦寧) 형으로부터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과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혜강(惠岡) 최한기(崔漢琦)와 율곡(栗谷) 이이(李珥), 김시습(金時習), 이토정(李土亭), 홍유손(洪裕孫) 등의 소위 ‘기문(氣門)’을 알게 된 것, 거의 그 무렵에 내 스스로 원효(元曉)와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선생에 희미하게 첫눈을 뜨게 된 것이 훗날 내 인생과 사상과 시에 영향을 미친 결정적인 사건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결정적인 영향은 늘 잊지 못하는 김정록(金正祿) 선생님의 동양철학, 미학, 예술사에 대한 강의였고 그 따뜻하고 엄격한 훈도였다. 칸트, 헤겔, 하이데거와 사르트르, 베르그송으로 뒤범벅이었던 유럽 일변도의 커리큘럼의 바다 속에서 파랗게 외롭게 오똑 떠 있는 섬과 같은 그 가르침으로부터 나는 끝내 어느 캄캄한 자리에서도 잊을 수 없는 진솔한 삶의 교훈들을 얻었으니, 비록 천박하지만 내 시의 배후에 이 교양이 서려 있음을 자부심을 가지고 기억한다.
한때 이런 일이 있었다.
겨울이었다. 원주 집이었는데, 끝끝내 잠 못 이루는 며칠 동안의 긴긴 불면의 지옥 뒤에 나는 선생님에게 마치 자살 직전의 청년처럼 편지를 문득 드렸으니, 내용인즉 ‘괴롭다는 것’이었고, 어찌하면 ‘벗어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자상하고 따뜻한 길고 긴 답장을 그 하얀 겨울날, 그래, 생각난다, 울타리 너머 큰 오동나무 위에 두 마리의 까치가 번갈아 우짖고 있을 때였다. 그때 그 답장을!

체관(諦觀)만이 해결의 길일세.
체관이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 용기가 필요하다네. 용기 또한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니, 어른들이나 옛사람들의 가르침이 그래서 필요한 것일세.
노 자(老子)로부터 배우게. 허(虛)라는 것은 그냥 ‘허무’가 아닐세. 그것은 참다운 용기의 근원이요, 체관의 문(門)이라네. 체관이 곧 삶의 문이니, 지금 곧 서점에 가서 『노자(老子)』를 사다가 잠이 안 올 때마다 읽고 또 읽도록! 아마도 그 책 반을 채 못 읽어 잠이 올 것일세.

잊지 못한다.
감옥에서도, 대학 시절 그처럼 내가 몰두했던 헤겔과 칸트와 하이데거가 결코 나에게 철학적 해결책을 주지 못했음을 기억할 때마다 소록소록 기억나는 것이 바로 노자였고 노자보다도 더 깊고 간절한 선생님의 바로 그 편지였다.
그러나 이런 간절한 사연이 내 시에서 느껴지던가?
안 으로부터의 청춘의 고통, 그 시절의 사회적 질곡은 그처럼 깊고도 더러웠으니 참으로 한다하는 학자들조차 그 무렵에는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파탄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으니……. 학문으로, 공부로, 이성으로, 가르침으로만 해결될 수 없는 악마적인 검은 중력장의 세계가, 그 ‘가난’이 우리를, 나를 긁어쥐고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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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없어져야 한다고 했다. 우선 이른바 ‘빵문제’부터 이 일은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도 민족은 통일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대학 시절부터 시작된 민주화와 민족통일과 사회변혁운동에 내가 뛰어든 한 가지 이유다.
그러나 대학 초기의 나의 시적 여행은 한참동안 그대로 고등학교 시절의 연장이었다. 소위 학림다방에서의 개인 시화전이란 것도 그랬다. 확고한 자기 발견을 못한 채 복잡다단한 영향들이 들쑥날쑥 혼재하는 카오스 상황이었다. 물론 생명의 생각들이 주류였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표현, 이미지 생성의 체계들, 비유나 은유들, 색채와 냄새와 울림, 그리고 그늘, 모두가 자기 삶이나 그 삶의 뿌리로부터 멀리 있었다. 허공에서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4월 혁명이 바로 고비이다. 그것이 숱한 내 세대의 고비였듯이 나의 고비이기도 하다. 우리문화연구회 등의 민족문화운동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그 뒤였고, 내가 내 뿌리, 내 고향에 돌아간 것도 그 뒤였으니…….
그 래, 4월혁명이 그때 있었다. 아니, 그보다 그때 잊기 힘들 만큼 눈부신 라일락이 교정에 피었었고 그 무렵, 그 라일락 밑에서 잊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또한 평생을 두고 사랑하는 한 여자를 만났다. 혁명보다 라일락과 여자가 기억에 더 가까운 것이 내겐 늘 재미있는 일이다. 또 이런 말을 대담하게 할 만큼 세상이 자유스러워졌고 한편 나라는 사람이 늙어가며 퍽 흉물스러워졌다는 생각도 함께 든다.
이 민족의 역사와 젊은이들과 민중의 삶에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 자체로서는 퍽이나 낭만적인 혁명이었고 내 인생의 길고 긴 터널에서 결코 잊어본 적이 없는 굴욕적이고 어두운 사랑……. 짝사랑이었지만 그 자체로서는 너무도 애틋하고 해맑고 고운 빛깔의 사랑이었다. 그러나 눈부시게 빛나던 보랏빛 라일락이 제일 먼저 가고 그 다음 혁명이 가고 그리고 끝끝내 사랑이 갔다.
나는 다 잃었다. 친구였던가 후배였던가 그 누군가의 거의 날라리에 가까운 시 한 구절처럼 그야말로 계절도, 혁명도, 사랑도 다 갔다.
나 는 그해 한여름 대낮 목포 부두에 혼자 서 있었다. 목포는 내 고향이다. 그 고향에 거의 십 년 만에 문득 혼자서 빈털터리로 돌아간 것이다. 대낮에도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입으로는 끊임없는 기침과 간혹 시뻘건 핏덩이를 내뱉으며 나는 거기 서 있었다. 내 눈은 브릿지의 한 행선지 푯말에 꽂혀 있었다.
‘땅끝 행’
땅끝, 땅끝, 땅끝이라!
지상(地上)의 끝, 이 지구의 끝이 있단 말인가? 거기가 어딜까? 거기에 가서 삶을 끝낼 수 있다면…….
그 때라고 기억된다. 눈이 가늘게 모아지고 어떤 한 지점이 흰 빛의 작은 씨앗처럼 떠올라 점점 확실한 한 점의 빛이 되어가는 것이 보였다. 흰 점이었다. 그것이 땅끝이었다. 환각이었는데 내게 있어 흰 빛은 자주 바로 이 환각의 한 흰 점의 형태로 오기도 한다. 이 땅끝 흰 점의 환각에 대한 기억이 그 뒤 어느 날 밤 남도(南道)의 어느 낯선 여관방에서 되살아나 캄캄한 어둠 속에서 점점 확대되어 어둡고 슬픈 형상들로 변하면서 태어난 시가, 그 무엇이었던가? 그 한 구절이 이렇게 나가던가?

낯선 돌부처의 얼굴에
침을 뱉던 예리한 기쁨의 날도
이끼의 샘
아아
깊이 잠든 이끼의 샘

기억이 맞는가? 대강 이런 시였는데 바로 땅끝의 흰 환각으로부터 태어난 작품이다. 어둡고 깊은 바다 한복판에 철삿줄에 묶인 채 수장(水漿)당한 시체들로부터 울려오는 신음들, 그 신음 속의 외침들, 미칠 듯한 희열의 푸른 불꽃을 피우는 반역의 폭발!
결국 땅끝이었다. 이 세상의 끝! 그것은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정치 프로그램도 없는 반란, 세계와 역사와 성스러운 모든 가치 자체에 대한 원생명의 반역이었고 바로 그 원초적 반역이 불 지피는 미친 기쁨의 세계였다. 이것이 나의 땅끝이었다. 그리고 여기 이것이 참으로 나의 詩다운 詩의 출발점인 것이다.
훗날 내가 해남에 내려가 정착했을 때에 올랐던 그 땅끝 사자봉에서 바라본 앞바다의 시적 이미지가 바로 그것이었고 거기에 6?25 직전 사전검속된 남로당원들을 해군 선박으로 무수히 실어와 큰바다에서 둘씩 둘씩 철삿줄로 묶어 수장한, 소위 ‘보도연맹사건’의 저 캄캄한 바다에서의 대살육의 이미지가 엇섞여 들었다.
이것이 나의 땅끝이었다.
땅끝! 또다시 훗날, 나는 이 땅끝까지 흘러가, 극도로 비관용적이고 군사화된 폭력적 사회변혁운동파와 난폭무쌍한 군부 파시스트들의 극악한 이중구속, 또 내 내면의 환상적 초월과 초보적 경제운동으로서의 생명운동의 생태 중력질서 속에서의 그 지리한 운동현실 사이의 견디기 힘든 이중구속, 이미 감옥에서 활짝 열려버린 상단전(上丹田:泥丸宮)의 영적 분출과 술과 불면으로 인해 흩어져버린 하단전(下丹田)의 정기(精氣)의 해체 사이에서 오는 주화입마(走火入魔)의 위험들, 그 여리고 슬프고 애틋한 ‘애린’의 갈가리 찢긴 아픈 이미지와 들소 같고 마귀 같고 육식조 같은 주변의 온갖 속물 군상들의 어지러운 노랫소리와 색정적인 속삭임 사이의 이중구속으로부터 훌쩍 벗어나기 위해 흘러간 그 땅끝에 홀로 서서 다시금 돌아갈 길, 아니 새롭게 태어나 새로 시작하는 길, 결국은 안팎의 통합, 내면의 영성적 평화와 외면의 생명 중력질서의 대변혁의 통합, 카오스의 끝이요 핵인 애린의 여성성(女性性) 안에 코스모스의 새 이동선?질주선인 나의 모험의 화살이 꽂히는, 그래서 눈부신 흰 햇살이 천지 가득히 생성하는 오메가 포인트(『애린』 2권의 마지막 시)까지 가버린 그 땅끝!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그 이름조차 아득한 ‘땅끝’에서부터 나의 시는 비로소 자기 발견, 제 뿌리와 줏대, 이미지의 고향, 언어의 집, 그리고 참된 삶이 생성하는 시간의 풀꽃들이 쌓인 옛 곳간을 찾아낸 것이다.
고 향에 참으로 돌아갔으니 비로소 민족으로, 민중으로, 내 가족으로, 내 자신으로 돌아갔고, 그리하여 인간으로, 생명으로 명백히 돌아갔다. 그때, 그러나 아마도 잠재적으로는 이미 오래 전에, 생명의 감각을 통해 아시아인이면서 인류요 지구 생태계의 일원이요 우주인 한 크고 깊은 신령으로 돌아가는 길을 희미하지만 분명히 찾은 것이다.
그리고 그때, 땅끝에서, 깊은 우울 속에서 발견한 자살의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로서 파산했다. 한 노동자의 절망적 죽음 속에 흐르는 모든 한국 극좌운동의 통일과 혁명 지향의 비극적 최후의 예감, 거기 떨떠름한 동지가 아닌, 깊은 혁명적 동맹자로서 연대하려던 나의 비극적인 자발적 죽음의 이미지는 그 이미지 자체로서 실패했다.
바다로부터 올라오는 저 기이한 ‘흰 손’! 그리고 짤막한 예언적, 경고성의 기침소리! 흰 손이 흔들리며 내게 보내온 이야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째서 이 손은 ‘흰 손’이었을까?
내 가상의 땅끝이었던 용당리(龍塘里)에서의 나의 자살은 실제에 있어서도 실패했지만 이후 역으로 풍자를 배수진으로 하고 그 풍자의 포기를 담보로 하는 나의 양도론적인 자살적 혁명의 미래 역시 이미 실패가 예고되어 있었다. 땅끝의 바로 그 시적 이미지 속에서이다.
그래서 시를 예언이라고도 한다.
시는 무서운 신령(神靈)의 활동이다. 내 젊었을 때 이것을 몰랐으니, 모르는 체로 편안했었으니, 그것을 몰랐으니 차라리 시를 몰랐다고 하는 쪽이 정직하리라!
거 기, 고향 목포에서의 나날, 나의 내면의 나날은 피와 기침과 식은땀과 주림과 갈증과 외로움, 그리고 간단없는 절망 속의 악몽의 나날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바로 내가 태어난 연동(蓮洞) 뻘바탕의 재개발 도로공사현장에서 소위 ‘스테바’라는 이름의 삽질하는 곳에서 가끔씩 일도 하고 그 근처, 내 어릴 적의 유목지대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곤 했다.
음양(陰陽)이었다.
도로공사현장에서 내 유년기에 세들어 살던 집안의 먼 친척뻘 되는 봉제(鳳濟) 삼촌을 만난 것은 아마도 내 인생과 시력(詩歷)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일 듯하다.
봉 제 삼촌은 그 노가다판의 십장이었는데 늘 막소주에 취해 눈이 뻘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걸핏하면 싸우고 트릿하면 두들겨팼다. 순 막보기 깡패대장이었다. 역설이지만 그런 깡패가 고학(古學)이 깊어서 두보(杜甫)와 이태백(李太白)을 줄줄 외우고 특히 김삿갓을 즐겨했다. 말투가 괴상하고 말솜씨가 좋아서 그 앞에서 엄벙덤벙하다가는 큰코 다쳤다.
한 번은 좀 까다로운 나이든 친구와 시비가 붙었는데 왈,
“당신 참말로 묘(妙)하요 잉―. 묘(妙)자를 으뜨케 쓰는지 아시오? 계집 女변에 작을 少자여라우! 계집처럼 작단 말이제 잉―.”
우 리는 밤에 술 한잔하고 나면 으레껏 공사판의 드난 데에 세워둔 ‘구루마’, 그러니까 마차 받침 위에 누워서 밤하늘에 가득 찬 별들과 그 사이를, 그 위를 흘러가는 흰 구름들을 쳐다보며 한없이 긴 침묵에 빠져들곤 했다. 그럴 때 간혹 봉제 삼촌은 내게 착 가라앉은 침울한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하곤 했다.
“아야 영일아, 잉―. 나 암만해도 전생에 별이었든가 봐야. 으째서 요로큼 별만 보면 눈물이 나는지 모르겄어야. 참말로 볼 때마닥 한없이 흐르고 그렁께. 이상하재 잉―.”
별!
별 이 된 봉제 삼촌! 늘 청산가리 병을 품고 다니던 삼촌! 스스로 욕된 삶을 끊을 수 있어야만이 자존심 있는 인간이요, 그것이 인간의 마지막 품위라고 씹어뱉듯 주장하던 사람, 세 번씩 자살기도를 했지만 실패하고 그 뒤 한동안은 살아보려고 그리 애도 써봤다던 삼촌!
나와 헤어진 뒤, 그러니까 3년 뒤 목포로부터 올라온 친척 편에 들으니 나와 헤어진 뒤 얼마 안 되어 대흑산도(大黑山島) 예리 뒷산에 올라가 한밤에 기어이 청산가리로 목숨을 마감했다고!
별로 돌아갔구나!
그 때 그리 생각했으나 눈물은 나지 않았다. 초기 시 가운데 山亭里 日記란 시가 있는데 바로 거기에 잠깐 비치는 해주(海州) 영감의 성깔의 이미지는 바로 봉제 삼촌이요, 모습은 당시 부정으로 중선지역에서 판사직을 파면당하고 거기 노가다로 일하던 한 늙은 법관이다. 깨곰보는 포장마차에서 맘보장사(전표장사)하던 한 소년이다.
이 시는 그러나 몹시 우울하다. 나의 내면풍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밤에는 그 한없이 가라앉는 스스로의 침체와 환멸, 그리고 낮에는 한없이 분노하고 들뜨는 강요된 앙앙과 요동 사이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노동자의 깊은 영혼의 만가(晩歌)를 목격하며 나는 역시 이상하게도 전세계 좌파운동의 비극적 최후를 아마 생리 속에서 예감했던가?
봉제 삼촌 왈,
“좌익 갖고는 안 돼야! 나도 많이 봤제 잉―. 우리 형님 그거 아니라고, 왼손잽이! 너무 단순하당께! 우리나라 문제는 아조아조 복잡해! 복잡하단 말이여―. 딴 것이 나와야 돼야! 동양에서 나와야! 두보나 이태백이가 혁명을 해야 한당께―. 김삿갓이가 팔 걷어붙이고 나오등가, 잉―.”



내가 늘 봉제 삼촌을 못 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국이나 동양 발, 새로운 상상력 체계나 깊고 크고 드넓은 새 문화이론에 의한 미적 교육으로부터 다시 시작되는 인간·사회·지구·우주 의 근본 혁명 아니면 진짜 변혁이 안 된다는 말을 바로 그가 했기 때문이다. 그 도로공사판의 마차 위에 누워 한없이 흐르는 밤하늘 구름들을 보며.
그래서 나는 그의 자살소식에 울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바로 이런 명증성과 천재성은 높은 자존심을 동반하기 때문에 욕된 삶을 스스로 정리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법이다.
별!
참으로 별 같던 사람, 봉제 삼촌! 드디어 별로 돌아갔구나!
바로 이 지점이 나의 소위 첫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황톳길이 태어난 정신적 배경이다.
어떤가? 말하기 전에 이미 예감할 것이다. 나의 테마를!
그 무렵 나는 두 번인가 영산강가의 저 쓸쓸한 마을, ‘부줏머리’를 돌아서 왔다. 길고 긴 강가의 황토흙 둑길을 터덜터덜 걸으며, 내가 이제서야 돌아온 곳이 과연 어디며, 내가 돌아온 마음의 역사가 무엇이며, 내가 정말로 누구에게 돌아온 것인지를 생각했다. 차라리 유년기, 소년기부터 내 안에 쌓인 여러 가지 생각들의 기억일는지도 모른다.
그 끝없고 참혹한 죽음은 무엇이었을까?
거 의 스스로 선택한 자살과도 같은 그 죽음들은 어떤 뜻을 갖고 있는가? 저 푸른 강물, 눈부시게 붉은 황토흙, 저 시퍼런 탱자나무들과 짙푸른 하늘빛, 흰 구름, 흰 삐삐꽃들, 공중으로 힘차게 뛰어오르는 숭어떼의 저 푸른 몸뚱이에 번쩍거리는 흰 생명의 빛! 그것에 대해 죽음들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사람만이 아니다. 6·25 때는 갯벌의 그 흔한 꼬막까지도 집단 폐사했고 3년 간 무서운 가뭄과 흉년이 휩쓸어 초목(草木)조차 도처에서 시들었다. 이때 죽임은 무엇인가?
그 죽음의 결과를 환히 알면서도 관철하고자 한 것은 현실 혁명의 승리인가? 우주의 근본 개벽인가? 거꾸로 그러한 비극적 죽음과 자연의 흉사를 알면서도 이른바 역사의 이름으로 진행하는 혁명이나 정의나 전쟁은 과연 생명의 생성질서에 합당한 것인가? 우주의 참된 질서에 합당한 참다운 개벽의 실천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그 오류와 죄악과 생명에의 반역을 누가 단죄할 것인가?
예고된 죽음임에도 그 죽임에로 나아간 그 민족, 그 민중의 운명은 무엇이며 무슨 뜻을 갖고 있고 누가 배정한 것인가?
이 민족의 운명은 무엇인가?
이 민중의 운명은 무엇인가?
내 가족의 운명은 무엇인가?
내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운명, 그리고 나의 운명은 무엇인가?
비극적 최후의 예감을 강하게 안고서도 죽음과 패배의 자리에 능동적으로 나아가 그 죽음을 끌어안음으로써 수천 년 수만 년 생명의 순환적 생성질서 안으로 끌려 들어간 저 사람들의 또 하나의 내면생성의 역사!
그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인가?
내 마음 깊은 곳 저 아래쪽 어딘가 어두운 곳으로부터 지금 막 한 소년의 두려움에 떠는 낮은 목소리가 울려온다.
‘엄마! 엄마!’
‘테러! 테러!’
밖 은 캄캄한 밤, 군중들이 모여들고 있다. 횃불이 일렁인다. 소란이 일어난다. 한쪽에서는 개 패듯 패고 다른 쪽에서는 맞아서 반쯤 죽어가며 피를 흘리고…… 흔한 광경이었다. ‘테러’라는 이름의 생명에의 반역! 역사니 이념이니 하는 이름으로 한낮에도 버젓이 저질러졌던 생성질서에의 그 반역!
테러다.
‘울냄이’의 그 맨날 우는 버릇이 이 테러의 공포와 관계없는 것일까? 그 비열한 버릇, 마음속 깊은 곳 소위 ‘가난’이라 이름하는 동작 정지, 판단 정지의 그 비겁한 ‘에어포켓’, 그 ‘블랙홀’, 위기에 부딪친 동물이나 벌레가 순간 꼼짝도 하지 않는 바로 그 태고부터의 생명의 방어기제와 똑같은 ‘사실 외면’의 버릇, 눈도 귀도 입도 순식간에 꽉 닫아버리는 바로 그 ‘가난’의 버릇이 이 테러의 공포와 관계없는 것일까?
6·25 는 송장의 잔치였다. 나는 6·25 직전, 나흘 전 꿈에 동네의 ‘다리뚝’이라는 돌다리 밑 시커먼 뻘밭에서 머리와 가슴이 붉은 피범벅이 된 웬 사내가 새끼줄로 묶은 붉은 관(棺)을 등에 지고 끊임없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다시 일어섰다 하며 걸어나가는 끔찍한 꿈을 꾸었다. 그리고 나서 나흘 뒤에 6·25 가 터졌고 그 돌다리 밑 검은 뻘밭은 인민군과 국군이 바뀌어 들 때 이쪽저쪽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맞아죽고 찔려죽은 피범벅의 자리가 되어버렸다.
바로 거기에서 오빠가 경찰에게 맞아죽은 충격으로 6·25 때 좌익을 하다가 후퇴 때 백아산에 입산했다는 아득한 소문만 떠돌던 순분이 고모가, 그래, 틀림없는 순분이 고모였다! 한 경찰관의 첩이 되어 산다더니, 그 무렵 바람 몹시 불던 어느 날 밤, 그 다리뚝 바로 위의 한 대폿집에 앉아 있는 나를 건너편에서 멀건히 쳐다보고 있었다. 틀림없는 순분이 고모였다! 내 손톱에 봉숭아물을 자주 들여주던 그 고모!
섬뜩한 것은 바로 그 가까운 자리에,
상순이!
우 리는 늘 존칭 없이 그렇게 그를 불렀는데, 소위 지리산 공비토벌대의 맨 앞장에 섰던 좌익 전향자들의 육탄정찰대인 ‘보아라 부대’ 소대장으로 한때 몹시 휘젓고 다니던 그가 거기서 술이 취해 시뻘건 눈으로 순분이 고모를 빤히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섬뜩했다.
나는 얼른 고모를 끌고나와 강가의 캄캄한 왕자회사 옛 공장 근처로 갔다. 캄캄한 그곳.
“어떻게 살았어요?”
“죽지 못해 살았제 잉―.”
“어떻게 나왔어요?”
“한 일곱 달 감옥에 있었제 잉―.”
강바람은 캄캄했다. 소금기까지 얹힌 밤바람은 그 자체가 이미 치욕이었다. 그 바람의 끈적끈적하고 캄캄한 감각은 지난날 우리 삶의 밑바닥에 도사린 ‘짐승 같은 어둠의 시간의 정체’, 바로 그 ‘가난’의 본질이었다.
한 편에는 끝없는 복수심과 혐오감과 증오, 다른 쪽에서는 무섭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감추고 감추고 또 감추고 나서도, 감춘 사실마저 감추고, 감추는 제 마음마저 감추어도 기어이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던 그 캄캄한 이중적 중력장 중독의 시간, 빛 없는 땅끝의 시간, 역사!
바로 이 인위적인 살해, ‘죽임’이라는 이름의 역사를 불가항력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소위 지도자, 혁명가, 정치가와 지식인 나부랭이들에 의해 조직되고 이념화되고 교조화·물질화된 시간인 언필칭 역사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어쩔 수 없이 역사로 돌아갈 운명이긴 하지만 그 자체로서는 역사가 아니라 차라리 역사와는 반대되는 그런 시간, 민중적 삶의 깊은 소망으로부터 시작되는, 지금 여기서부터 과거로 미래로, 사방팔방으로 펼쳐지고 접혀지는, 미래와 과거와 전 우주를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지금 여기에로 끝없이 되돌아오는 우주적이고 초월적인 내면성의 무궁무궁한 생성으로서의 참다운 삶의 시간! 이것에 대해 채 의식은 못하지만, 분명 날카로운 느낌만은 갖고 있는 사람들의 그 또 하나의 시간을 우리는 과연 알고 있는 것인가?
생성은 역사의 근원이지만 역사가 아니다. 참다운, 올올한 고급 예술가는 역사에 참가하지 않는다. 그는 생성에 참가한다. 그의 내면으로부터의 삶의 감각, 살아 생동하는 표현충동의 진솔한 욕구는 생성에 속하지 역사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참으로 민중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살아 있는 예술가는 생성의 편에 분명히 서서 역사를 비판하지만, 어떤 경우, 차원변화의 한 지화점(至化点)에서는 비록 마음에 들지 않고 죽임을 각오하더라도 그 비극적 역사의 패배 현장에 그 스스로 마음속의 자유와 영성의 미는 힘에 따라 흔연히 참가한다. 그로써 그는 민중과 동지들과의 참다운 우주생명을 공유(共有)한다. 그런데 역사에는 이 사람들의 그 시간이 기록되어 있는가? 존중되었는가? 이것을 중심으로 역사는 씌어지고 의식되고 실천되고 흘러왔는가? 그렇지 않다면 역사란 도대체 무엇인가?
역사와 생성을 분명히 구분한 질 들뢰즈의 카오스 민중론을 읽으며, 감옥 안에서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선생의 저 탁월한 주체적 시간관, 생성관인 향아설위론(向我設位論)을 읽었을 때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큰 감동을 받은 것은 참으로 민중의 내면적 삶을 중심으로 한 참다운 민중론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참으로 산다는 것, 그것을 떠나서는 어떠한 고귀한 이념도 혁명도 없다. 아름다운 것, 사랑, 생명, 영성, 평화, 초월성 이것들을 떠나서는 값을 쳐줄 수 있는 그 어떤 혁명도 이념도 사상도 정의도 이 세상엔 없다. 도대체 그런 건 애당초 없다. 착각이 있었을 뿐이고 가범주(假範疇)가 횡행했을 뿐이다.
바로 역사는 과연 생명생성의 진실인가를 이제 참으로 물어야할 때다. 생명의 깊고 깊은 자유로운 자기 선택의 원리, 물질 내면의 깊은 마음의 움직임으로부터 시작되는 자기 조직화의 진화론! 이제는 차라리 군집 이전에 돌연변이든 다양성이든 간에 그러한 생명의 요동을 통해서 도리어 개체가 먼저 그 내면의 근원적인 자유와 영성이 밀고 선택하고 요구함에 따라 새로운 자기 나름의 군집, 새로운 스타일의 전체성을 유기적으로 형성한다는 이른바 ‘자유의 진화론!’ 이것을 바로 그 ‘역사’라는 것 앞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실존주의요, 자유주의요, 무정부주의에 불과한가?
나 는 이런 ‘생성’의 사람들의 ‘역사’ 안에서의 혁명적 활동을 ‘자유의 동기’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분명 우리 민족 나름의 독특한 ‘자유관’에 입각해 있다고 본다. 그것이 바로 『천부경(天符經)』의 맨 앞줄 ‘한 처음은 처음이 없는 하나다’로서 ‘한’이라는 우주 생성의 근원에 ‘무(無)’ 즉 ‘본원적 자유’가 있음을 웅변하는 곳에 있으며, 수운 최제우 선생의 시천주(侍天主) 주문 해설에서 그 가장 핵심사항이요 우주 창생의 근원이자 제일 동기인 ‘천(天)’, ‘한님’, ‘신(神)’에 대한 설명을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빈 칸’으로, ‘공(空)’으로, ‘무(無)’로, ‘허(虛)’로, 다시 말하면 ‘자유(自由)’로 남겨둔 바로 그 기가 막힌 이치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주 생명은 ‘활동하는 무(無)’, 즉 ‘자유’의 전개요 생성인 것이다.
바로 이 ‘자유’, ‘빈 칸’으로부터 생성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빛, 또는 ‘흰 빛’이요 ‘초월적 무궁’이다. 장자(莊子)는 ‘허실생백(虛室生白)’이라 했다. ‘빈 방에 흰 빛 난다’는 말이다.



내 어릴 적부터의 우리 집안의 전설에 의하면 집안의 큰 ‘우투리’(남쪽지방의 사투리인데 ‘우투리’, ‘우툴’, ‘오툴’, ‘오돌또기’ 등은 마을 사람을 못살게 구는 나쁜 불한당이나 못된 관리, 악질 지주 따위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흠씬 두들겨패서 슬슬 기게 만든 뒤에 먼 곳에 있는 딴 섬으로 바람같이 사라져 버리는 피 뜨거운 사나이를 말한다)였던 증조부님은 고향 ‘암태도(岩泰島)’에서 문씨(文氏)라는 못된 악질 지주를 몹시 두들겨패고 그 집에 불을 지른 뒤 전라도 김제 땅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이 과정이 하나.
또 하나는 김제에서 저 유명한 김덕명포(金德明包)의 동학당에 들어가 소두목(小頭目)이 되어 우금치전투와 태인전투에 참가한 뒤 부상을 당하여 영광 법성포로 망명하고 피신하는 캄캄한 피투성이의 과정과, 그곳에서 동지들을 구출하기 위해 일하다가 관헌에게 살해당하는 전 과정에서 바로 그 ‘자유’를, ‘빛’을 사심(私心) 없는 ‘우투리’의 우람한 ‘공심(公心)’, ‘공공성(公公性)’ 텅 빈 ‘무(無)’의 활동을 본다.
역사와 생성은 서로 다른 것이면서도 어떤 관계를 맺는다. 바로 이 관계가 그 무렵 아직 논리적으로 인식되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황톳길의 테마였다.
한 때,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밖에서 나를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로 요란하게 선전했던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오해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가까운 오랜 벗들은 안다. 한마디로 나는 마르크스를 긍정적으로 보았고 배운 점도 여러 가지 있지만 부정적인 인식을 더 많이 갖고 있었고 또 비판적이었다. 나는 높이 존중은 하면서도 정치적으로 전혀 마르크스를 따르지 않았으며, 격렬하고 근본주의적인 행동을 줄기차게 해왔지만 결코 한 번도 무슨 조직에 동의하거나 가담한 적이 없다. 나는 차라리 원주의 무위당(无爲堂) 장일순(張一淳) 선생을 통해 간접적으로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의 노선에 동조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추종한 적도 없다. 레닌이나 코민테른의 세계전략이란 것은 늘 코웃음쳤으며 마오쩌둥에게서는 격의(格義)대상인 서구 마르크스보다 격의주체(格義主體)인 중국 농민 나름의 민간 변증법에 더 관심이 깊었다. 자칭 혁명가 친구들은 내가 볼셰비키를 말셰비키라 부르는 데에 늘 놀라고, 차라리 마프노의 사회혁명당, 러시아 농민사회주의의 전율적인 꽃이었던 저 자살한 예세닌의 시에 깊이 심취한 것을 기이하게 여겼다. 사실 내 시에 산업노동자를 다룬 작품이 단 한 편도 없다는 사실을 두고 누군가가 왈,
‘우연이지만 유감’이라고 한 적이 있다는데, 하하하! 그것은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말해야 옳다.
‘유감이지만 우연이 아니길 바란다’
내 신념에 따른 것이지 전혀 우연이 아니다. 때문에 내게서 생명론이 나오고, 한살림 생명운동 얘기가 나오고 소위 환경운동이나 지역자치운동, 생명경제론, 이중경제론, 거룩한 시장론 그리고 신시(神市)의 호혜(互惠)시장과 드디어는 율려(律呂)치유운동이 나오는 것이다. 결코 우연이란 없다. 어물쩍해서 몽땅 마르크스의 사상적 천재성, 위대성 안으로 한 개인의, 남이 알 수 없는 내면적 고뇌와 초월적인 아픔의 극복의 시간들을 휘말아 먹으려는 따위, 사기를 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혁명과 역사가 대의 명분이라 하더라도 이 점은 엄정히 지켜야 한다. 이제부터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미하긴 하지만 나는 안다.
자유와 혁명이, 사랑과 죽음이 어떤 관계인가를!

1967년이던가? 나는 스물 일곱여덟 살에 폐결핵요양원에 있었다. 그때 미국에서 영화공부를 하던 벗, 지금은 가고 없는 그리운 친구, 하길종 감독과의 길고 긴 왕복서신 속에서 한 시나리오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 제목은 ‘태인전투’ 혹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인데 동학혁명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태인전투에서 부상당한 한 청년이 죽어가는 사흘 동안의 얘기다.
주인공은 동학의 개벽과 혁명에 심취하고 또 ‘궁궁(弓弓)’의 부적을 왼쪽 어깨에 붙이면 왜놈의 총알이 범접을 못한다는 당시 동학의 강렬한 정신주의를 신봉하고 있었다.
그 런데 태인전투에서 주인공은 바로 그 부적을 붙이고 있던 왼쪽 어깨에 관통상을 입고 큰 혼란과 절망 속에서 피신한다. 주인공은 이 사건, 총알이 부적을 관통한 이 엄청난 사건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입교의 중요한 설득자였던 어머니가 사는 집에 가려고 몸부림친다. 그러나 막상 집에 도착했을 때 도륙당한 어머니의 시체만이 그를 맞이한다. 그는 다시 태인 전장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는 오고 가는 사흘 동안 수많은 죽음들의 목격과 내적 체험을 통해, 제3세계 약소민족의 새로운 세계변혁의 메시지가 안고 있는 활인기(活人機)로서의 정신주의는 일본군과 물질문명이 앞세운 현대과학과 군사무기의 ‘살인기(殺人器)’ 앞에 현실적으로는, 당대적으로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엄연하고도 슬픈 역사적 한계와 동학 전개의 사회적 상황 미숙 등을 깨닫게 된다.
어디에도 이 비극적 최후를 회피할 수 있는 길이 없음을 깨닫고, 오직 이 절벽과도 같은 역사·사회적 우주질서의 한계 안에 갇혀서 죽어간 동지들과의 그 장렬하고 거룩한 죽음을 함께 공유하는 슬픈 사랑의 길밖에 남아 있지 않음을 절감한다. 그는 중간에 만난 이상한 소년으로부터 들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라는 슬픈 민요를 부르면서 제가 떠나온 태인의 전장, 그 노을진 싸움터로 돌아가 동지들의 시체 사이로 기어 들어가서 그 사이에 몸을 눕힌다.
하늘을 날며 새 송장을 노리던 까마귀가 고공(高空)에서 수직으로 하강한다. 드디어 사흘 동안 손안에 쥐고 놓지 않았던 비극의 매듭인, 그 총알에 뚫어진 피 묻은 부적이, 펼쳐지는 손가락 사이에서 이윽고 천천히 빠져나와 가랑잎처럼, 추운 늦가을의 송장들의 터전을 지나 바람에 흩날려서 멀리멀리 사라진다. 수많은 들개들이 짖어대는 소리가 들리고 어둠 속으로 화면은 ‘디졸브’한다.
이제 똑같은 주제를 ‘황톳길’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황 톳길’은 나의 테마다. 죽은 아비의 길을 내가 또다시 간다는 것. 제3세계 약소민족의 민족해방투쟁은 세대를 이어 전승(傳承)된다는 테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이 ‘태인전투’의 시나리오에서는 바로 주인공이 가고 오는 사흘 동안의 내적 체험과 죽음의 목격 과정에서 드러나지만 ‘황톳길’에서는 직접적이다.
이미 말했다.
그 역사적 비극과 그 비극의 한계 안에서나마 민중적 삶의 최고 덕목인 사랑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결단’을 내렸을 때, 역사라는 이름의 그 선천(先天)시대 중력장의 비극의 맞은편에 역사가 아닌 영성적인 내면으로부터의 생명의 풋풋한 생성으로서의 새푸른 하늘, 짙푸른 탱자나무, 뛰어오르는 숭어떼 그 생명의 새하얗게 빛나는 초월성, 희디흰 메밀꽃, 시뻘건 황토흙의 신령한 그 붉은 빛의 압도!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아비의 죽음을 이어 그 죽음의 자리로 아들이 또다시 나아간다는 바로 그 결단이다. 나는 이것을 동학(東學) 용어로 ‘각비(覺非)’라고 부르는데 바로 이것이 내가 최근 ‘신화(神化)’라고 부르거나 ‘황극(皇極)’이라고 부르는 것, 빛과 어둠이 어우러지는 이중성의 ‘그늘’ 속에서부터 생성하는 눈부신 ‘흰 빛’, 즉 ‘흰 그늘’ 또는 ‘신인간(新人間)’이다. 이것이다. 이것만이, 이 사람의 그 초월성만이, 역사가 아닌 생성으로 하여금 오히려 역사의 밑바닥에서, 배후에서, 또는 그 틈에서, 역사를 조절하고 그것을 추동·견인·비판·수정하다 가 드디어는 그 스스로 드러난 역사, 참으로 창조적인 차원의 신령한 역사로 살아 생동하게 하는 민중적 삶의 우주적인 내면성이 무궁무궁 초월적으로 생성하도록 그것을 주체적으로 실현하는 주인이요, 주동력인 것이다. 이 사람이 지금 ‘각비(覺非)’, 즉 인간의 잘못된 역사를 우주 생성에 근거해서 깨닫는 것, 이것이 곧 결단인데 이 결단의 근거가 바로 아들이 아비의 마음과 삶에 일치해서 죽음의 자리로까지 나아감에 있는 것이다.
수 운 선생은 이것을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吾心則汝心)’라는 계시의 의미라고 했고, 이것이 『삼국유사』 초두의 신화에는 환인(桓因)이 환웅(桓雄)의 천하(天下)에 대한 큰뜻을 알게 되는 부분을 ‘부지자의(父知子意)’ 즉 “아비가 자식의 뜻을 알고”라고 표현한다. 하늘 마음이 사람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 아비 마음이 자식 마음과 일치하는 것, 이것이 바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근거인데 이것을 두고 천지공심(天地公心)이라 부르니 현대 서구철학 개념으로는 ‘사회적 소통’이요 나아가 ‘우주 사회적 공공성’이다.
아비와 아들 사이의 사랑과 결단, ‘각비(覺非)’는 이렇게 민족적이면서 전 우주적·전 사회적인 공공성, 진정한 삶과 세계변혁의 철학적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진정한 생명사상이요, 생명의 안쪽인 우주적 영성의 깊은 원리이자 ‘자유로운 혼(魂)’ ‘혼의 자유’인 ‘무(無)’의 창조적 활동인 것이다. 그래서 매서운 ‘각비(覺非)’라고 부르는 그 결단, 아비의 뒤를 따라, 비록 쓸쓸하고 남이 알아주지 않는,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바닷가 한모퉁이에 거적 덮인 죽음으로의 길이라 할지라도 기어이 따라가는 것. 그러나 그것이 그 순간을 통해 이미 아비의 차원을 갱신함이며 새 차원을 창조하는 내면성의 무궁생성의 새로운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미 그것을 호흡이, 땀방울이, 숨가쁨이, 숭어의 빛나는 도약이나 흰 꽃의 피어남이나 붉은 황토흙의 압도와 함께 신령한 주체적 결단에 의한 삶과 세계와 자연의 전혀 새 차원에서의 대변혁의 예감을 불러일으키는 데에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톳길은 나의 20대의 삶의 의미요 시편이다. 어둡고 무거운 싸움닭의 세계다.
나 는 이제 참으로 거듭된 삶과 고통스런 사상의 ‘각비(覺非)’를 통해 새 길을 찾았고 비록 아직은 모호하고 애매하며 논증이나 검증 따위, 소위 중력적 사고방식들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이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현실의 복잡하고 중층적인 민족과 세계적 지구적인 날카로운 정황에 따라 살아 생동하는 구체적 방향으로까지 정립되기엔 미흡한 것이 사실이지만―그러나 이것은 별로 어려운 것은 아니다. 앞으로 우리의 노력은 이것을 해결하고도 남는다. 중요한 것은 성실한 ‘각비(覺非)’에 의해 내면으로부터 생성하는 창조적이고 초월적인 ‘흰 그늘’이라는 첫 깨달음과 이미지의 발화에 있다. 이것이 이제 시작되었다는 희망적인 소식을 전하고 싶은 것이다.― 뛰어오르는 숭어떼의 그 빛나는 태양 같은 생명력의 분출! 빛과 중력의 통일에 의한 중력혁명과 세계 치유의 길, 그렇다.
환웅과 웅녀의 그 비밀, 수천 년의 신화상태에 가려진 그 새하얀 백열(白熱)의 사랑의 비밀, 신체 중심과 두뇌 중심 그리고 농경 정착과 유목 이동성의 통합, 우주와 인간, 신령한 초자연과 리비도적인 인간자연, 주체와 타자, 주관과 객관, 환상과 현실, 신화와 역사, 직관과 검증,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이중적 역설적 교호결합의 상징인 환웅과 웅녀의 결혼, 그리고 그 결과이며 신령한 육체의 홍익인간에 의한 정착적 노마디즘이라는 이화세계 창조의 길이라 할 수 있는 단군과 고조선의 해명과 이해를 통해 드러나는 ‘흰 그늘’의 비밀.
내 스무 살에 이미 열리기 시작한 ‘흰 우주에로 뻗어나가는 무궁무궁한 내 운명의 길’, 그리고 ‘땅끝’에서 반환점을 돌고, 용당리에서 그 비극성을 예감하고도 황톳길에서, 죽임 앞에서 그 성공의 낙관을 분명 부정함에도 동시에 그 패배 속으로의 참여를 긍정한 그 ‘그늘’ 즉 ‘율려(律呂)’적인 내 운명의 길. 회피하고 싶지만 받아들임으로써만 열리는 눈부신, 눈부신 흰 생명의 길, 신령한 율려의 길을 간다. 이제야말로 나는 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말할 수 없이 기쁘게!
이제야말로 ‘다양한 정착적 노마디즘’이라는 이름의 새 세계, 오직 신시(神市)의 영성적인 호혜(互惠)경제와 전원 일치를 추구하는 화백(和白)의 직접민주주의와 풍류(風流)의 초월적 우주 영성의 ‘떨림’의 ‘빛’과 지구 생태중력장의 ‘흐름’이라는 현실 중력질서 사이의 문화적 통일과 대변혁에 의해서만 그 맺히면서 풀리고, 정착하면서 이동하고, 생명적 구심이면서 물질적 분산 해체이며, 민족이면서 세계이고, 신령이면서 육체적 물질이며, 전체적 통일이면서 개별적 자유인 율려의 길, 마고(麻姑)의 길로 분명히 나는 지금 가고 있고 그 총개념인 ‘천지공사(天地公事)’의 드넓은 우주대로로 굳세게 계속 가기로 결단을 내렸으니, 이 길 아마도 끝끝내, 죽음 후에라도 기쁘게 갈 것이다.
단, 기억할 것은 이것은 우리의 조상이, 우리의 아버지들이 어떤 천신만고와 안팎의 고통에도 굴복하지 않고 끝없는 결단, ‘각비(覺非)’로 그 ‘가난’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극복하면서 죽음까지도 불사하며 살아온 바로 그 삶의 생성, 역사가 아닌 생성, 그럼에도 역사를 그 사이사이, 틈과 밑과 뒤에서 추동·견인·비판·조절 , 그 의미를 쇄신 변혁하다 드디어 이제와서는 그 자신의 마음과 기운과 활동의 전체 시간의 내면이 새로운 차원으로 대규모 변화되는 바로 그 길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황톳길’의 뜻이다.
이제 오늘 내 얘기의 대강은 끝났다.
모든 조짐들은 초기 노작들의 문제점 안에 다 들어 있는 법이다. 그래서 초기값이 민감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몇 문제들만 이해되면 그로부터 내 시의 세계는 스스로 문을 열 것이다.


3


내 시는 이제 바뀔 것이다. 아니 안 바뀔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그 비트, 아니 장단이 달라질 것이다. 틀림없이 그 ‘가난’을 넘어설 것이고, 이제 허수경이 ‘입술’이라 부르던 그 이상하게 슬픈 상징적 부위가 비밀스레 숨겨진 마음과 드러나 있는 난폭한 몸의 세계 사이에서 경련하듯 숨죽여 울면서,
‘엄마! 엄마!’
‘테러! 테러!’
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이 것, 이것에 대한 기억, 악몽, 이것들이 내게서, 내 말을 듣고 옛 기억 속의 어둠을 환한 빛 속에 들어올려 하하 웃으며 날려보낼, 나와 똑같은 수많은 역사의 피해자들 그 숱한 이름없는 생성의 사람들, 곧 ‘민중’ 속에서 그 ‘입술’이 이제는 드디어 반세기 만에 빙긋 미소 지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난’이란 이름의 ‘공터’에 현란한 무지개가, 아아! ‘흰 그늘’이 눈이 시리게 뜰 것이다.
이제까지 내 시에 대해 말하자면 항상 부딪쳤던 그 더듬거리는 버릇, 실어(失語)는 아닌데도 뭔가 반벙어리인 듯한 버릇, 무엇인가 다 말 못하고 늘 미진하던 느낌, 이런 것들…… 이제야 거기서 조금은 헤어나는 느낌이 든다.
그 런데 이 얘기를 하는 과정에 사실은 내 시에 대해 그래도 뭔가 문제가 있다 싶었던 것들 몇 가지가 소박한 초기 시의 경우를 통해서지만 밖으로 기어나오긴 분명 나온 듯싶다. 사실 나로서도 이렇게까지 개방적으로 문제들을 찾아서 쏟아놓을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다.
다행이다.
이 시집을 기획하고 편찬해 준 소설가 김영현 형에게 감사한다.
다음 같은 김형 얘기가 있었다. 자기 주관적 관점 이외에 주변의 젊은이들의 취향도 많이 고려해서 서정시 백 편을 뽑았다 한다. 그 과정에서 느낀 점들을 말했는데 참 재미있다. 그 말을 들으며 시편(詩篇) 하나하나만 아니라 한 개인의 시업(詩業) 전체, 텍스트의 체계 전체가 하나의 생물이요 생명체, 마음을 가진 생명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제껏 상자한 시집이 일곱 권인데, 얼마 전 홍용희(洪容熙) 형이 나의 시사(詩史)를 역(易)으로 해석한 것을 본 일이 있었는데 완전히 근거 없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김영현 형의 간략한 설명에 의해서만도 그 일곱 권이 뭔가 제 나름대로 살아 생동하는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이다. 뭔가 ‘아프다’고, 또는 ‘배고프다’고, 또는 누군가 ‘사랑한다’고, 또는 누군가 기다리는데 ‘오지 않는다’고, 그리고는 이제는 ‘잊었다’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젠 혼자 간다’고, 그리고는 또 ‘저 산을 한번 담담하게 바라보라’고, 뭐 이런 스타일로 자꾸 가고 있다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과연 사실이 그럴까? 한번 제목을 들여다보자.
『황토』, 『빈 산』, 『애린 1』, 『애린 2』, 『검은 산 하얀 방』, 『별밭을 우러르며』, 『중심의 괴로움』.
『황 토』에서는 장렬한 핏빛 전투성이란 말이 나왔다. 붉은 빛은 검은 죽음에 대비된 생명일 것이다. 그리고 『빈 산』에서는 전투적이면서도 외로운 비장감이 상승하며 크게 고양되어서 매우 비극적이라 한다. 『애린』에서 부드러운 여성성을 그리는 우회적인 민중에의 사랑이나 병으로 인해 아픈 나날의 삶의 애잔함이, 『검은 산 하얀 방』의 캄캄하면서 또 새하얀 이상한 세계―그래! 이 부분은 앞으로 큰 문제다. 아직은 나도 여기에 대해서는 깊이 개진하고 싶지 않고 다른 기회에 긴 글을 쓸 때가 있을 것이다― 『별밭을 우러르며』에서 참으로 아프고 외롭고 쓸쓸한 후퇴와 우주적 영성과 고독과 회한과 병환의 세계가, 마지막 『중심의 괴로움』에서 흰 빛과 초월성, 외로운 우주성, 영성과 생명의 관계가 짧고 간결하게 드러나면서 어떤 지녀야 하고 앉아야 하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듯하다는 것이다.
결국 요약하면 가득 찬 데서 텅 빈 곳으로, 역사적 시간에서 우주적 시간으로, 핏빛 붉음에서 눈부신 흰 빛으로, 투쟁에서 애틋한 사랑을 거쳐 자유와 개방으로 변화하는데, 그것이 또 심화·확장 과정을, 그러니까 내면적 의식은 더욱 깊이 심화되고 외면적·사회적·자연적 관련은 더욱 확장, 무한 확대되는 듯하다는 뜻인 것 같다. 모두 다 정확한 지적이라 별로 다른 말을 붙이고 싶지 않다.
그런데 그 중 가장 재미난 얘기는, 서정시만 아니라 담시까지 합쳐서 볼 때 초기에 엄청난 양의 말을 냅다 쏟아놓다가 차츰차츰 말이 줄어들고 말 사이의 소위 ‘틈’이 더 넓어져 침묵이 사이사이에 더욱 많이 끼여들다가는 드디어 어떤 ‘떨림’과 ‘흐름’의 일종의 ‘농현(弄絃)’ 효과와 더불어 아주 짧은 시행 몇 줄만 남았다가 마침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무(無)’로 돌아가 버렸다는 얘기다. 그리고 허공에 흰 빛만 남는다고!
이것이 참 재미있다.
‘무 ’, ‘텅 빈’ 자리, 바로 이것인데, 이것이 사실은 이미 『빈 산』에서 개시된 세계요, 흰 빛! 내 시 不歸와 제목은 잊었으나 ‘줄타는 광대의 詩’가 결국 돌아가는 자리들이다. 여기에서 중심이 죽음 뒤의 자리들, 포기 뒤의 텅 빈 방들인데, 바로 그 속에서 ‘흰 빛’이 돋는 것이다. ‘허실생백(虛室生白)’이란 장자(莊子)의 일구(一句)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지적들을 내가 일부러 인용하는 까닭은 이 세 부류의 분석이 사실 내 시 읽기의 가장 핵심적인 세 방면에 해당하는 요점들만 스케치했다는 점이다. 사실, 이 이상 나도 할말은 없다. 왜냐하면 이 정도의 정리면, 앞에서 내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드러내려고 애쓴 문제점들이나 주제의식, 삶과 텍스트의 관계, 사상, 역사와 생성의 차이, 그것의 시적 반영, 또 그에 관련된 미학이나 시학의 단편적인 원리들을 상기하면서 읽기를 진행할 때 내 시와 삶과 사유의 거의 전체적 윤곽을 이해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김영현 형은 내 시의 거의 전면에 조금씩 여기저기 나타나다가 후반에 와서 전면적으로 압도하는 ‘흰 빛’과 흰 이미지 계열의 시적 의미에 대해 말해 달라고 했다. 사실은 그것도 이미 다 말했다.
그리고 그 흰 빛이나 그늘의 생성의 역사와 그 미학적 의미와 그 율려 속에서의 위치와 가치 등에 대해서는 이미 『예감에 가득 찬 숲 그늘』에서 비교적 상세히 말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한 가지만 말하자.
시 집 속에 아마 나올 것이다. ‘접시꽃 위에 새가 내린다’는 내용의 ?비?라는 시가 있다. 아주 오래된 시인데 이 시의 기원이 어디인지 말하면 아마 흰 빛의 이미지의 역사, 그 기원을 짐작하고 그 의미를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이 부분의 글을 읽기 전에 그 시를 한 번 읽어주기 바란다.
해남은 십여 년 전 내가 내려가 몇 년 간 정착해 살기도 했지만 본디 내 외가 쪽의 연고지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니까 6·25 바로 전 해이다. 어머니와 나는 무슨 일로 해서 일시 목포를 떠나 해남 산이면에 있는 신작로가의 한 이모할머니 댁에 얹혀 있었다.
한여름 어느 뜨거운 날이었다.
어머니는 마루에서 다듬이질을 하고 계셨고 나는 마당 복판 장독대 옆에 있는 접시꽃 앞에 서 있었다. 햇빛 아래 빛나는 흰 접시꽃잎의 반사에 문득 내가 눈 위에 손을 올렸던 것 같다. 조금 지나친 동작 같았는데 왜 그런 동작을 취했을까? 너무 흰 빛이었다. 푸른 하늘에 구름이 하얗게 타고 있었고 그 여름 전체가 새하얗고 눈부셨다.
그때 신작로 쪽의 토담 위로 큰 캡을 쓴 외삼촌의 상반신이 보였고 거의 동시에 마치 항아리가 깨지면서 물이 쏟아지듯 마당으로 뛰어나오는 어머니와 후다닥 마당으로 뛰어들어오는 외삼촌 사이에 순식간에 무슨 얘기가 수군수군 오간 뒤에 어머니는 급히 방으로 좇아 들어가고 외삼촌은 마루에 재빨리 걸터앉으며 가방을 탁 하고 열었다.
나는 그 뒤 이 한순간 속에 압축된 동작들의 무언극 체계 전체 기억에다 이름을 붙였다.
‘미친 여자의 하얀 팔’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날의 이미지가 그랬다. 알 것이다. 이 시는 좀 이상한 데가 있다. 조금은 미친 사람의 세계에 가깝고, 새하얗고 동시에 붉은 피를 흘리는 한 젊은 여자의 접시꽃 위에 불길한 검은 죽음이나 음모처럼 눈이 붉은 작은 새가 자꾸만 추락하듯 내린다. 허공을 낙하하는 삐라 같다. 그리고 누군가 사랑하는 남자가 멀리서 잡혀가고 있다.
나는 어머니와 외삼촌의 그 동작 직후 어디선가 재깍 달려온 웬 키가 크고 괜히 실실 웃는 중년 남자를 따라 알 수 없는 어떤 곳으로 떠나야 했다. 어머니는 외삼촌과 함께 서둘러 다른 곳으로 떠났다.
해 남의 여름. 뜨거운 무지개 빛을 품은 흰 여름. 온통 백색의 세계였다. 숲도 연못도 자갈과 흙마당과 길도, 토담집 벽들도 모두 다 하얗게 불타고 있었다. 누군지 모르는 아저씨를 따라 나는 한 이십 리쯤 희고 눈부신 흙길을 걸어갔고 버스를 탄 뒤 멀고 먼 경기도 부평으로 떠났다.
어떤 의미에서 문학은 기억이다. 그러므로 그 기억 과정에서, 그 기억의 배후에서 움직이는 숨은 질서인 영의 개입을 받는다. 영은 그 스스로 삶을 움직이고 조절 비판하며 의미를 생산하는 체계이기 때문이다.
왜 그날의 해남 기억과 접시꽃이 온통 백색의 미친 여자와 검은 새와 꼭 일제시대 같은 리듬과 색채로 가득 찬 기억으로 되살아나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어떤 사회적 정치적 억압의 분위기가 기억이나 이미지를 통해 내면화할 때 반드시 그에 저항하는, 영의 깊은 곳에서 생성하는 정신적 항체의 이미지 개입과 혼성(混成)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만은 틀림없다.
심령은 다만 고요한 곳이 아니다. 심령의 깊은 곳으로부터 외면의 무자비한 억압, 비참과 절망에 개입해 들어오고 기이한 수정을 가하는 어떤 초월적인 힘이 있다는 것만 분명히 말해 두자. 이 과정의 색채적 표백 속에 흰 빛이, 그 외롭고 슬픈, 그럼에도 누군가를 한없이 기다리고 말없이 부르는 그런 ‘흰 그늘’이 생성한다고 본다.
그 후 나는 가끔씩 그 무섭도록 흰 팔, 그 미친 여자의 흰 팔 속의 흰 빛의 접시꽃을 보았다. 그리고 끝없이 그 흰 접시꽃 위에 삐라 같은 검은 새가 내렸는데, 그 검고 눈이 붉은 작은 새의 이미지가 무엇일까?
대개 이런 것들이 아마도 흰 빛이 내 생애 중 내 영상세계에 들어온 첫 씨앗들이 아닐까 한다?
그 후 흰 빛의 생성에 관해 여러 얘기가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6년 전 목동의 그 컴컴한 집에서 지금 살고 있는 일산의 환하고 눈부신 이층 아파트로 이사온 직후, 내 세계는 온통 흰 빛으로 변해 버렸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초두에 약간 언급했고 또 『중심의 괴로움』에서 시집 자신이 이 흰 빛의 시적 의미를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흰 빛의 이미지 체계에 관해 말할 때,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결정적인 한 가지가 남아 있다. 그것은 흰 빛과 우리 민족의 집단무의식과의 관계다. ‘흰 그늘’의 경우처럼, 현실의 이중적인 검은 중력장 속에서 생성하는 이상한 아름다움과 초월성을 품은 영적 미의식의 차원에서 이미지 질주와 집단무의식과의 관계를 놓치고 나면 아무리 바슐라르 아니라 바슐라르 할아버지 차원의 물질신비주의자를 데려다놔도 소용없다. 안 잡힌다. 우리말에서 ‘흰’은 곧 ‘신’이기 때문이며, ‘백(白)’ 즉 ‘?’은 곧 ‘태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해요, 해머리, 곧 ‘히말라야’와 ‘천산(天山)’이니 ‘한’이요 ‘천(天)’이다. 그리고 『천부경』이나 율려의 세계에서는 그 태양 즉 ‘?’은 하늘의 해라는 원초적 이미지 이외에 이차적이고 숨겨진 질서의 이미지로서 몸, 땅, 삶, 어둠, 슬픔과 중력적 생태적인 관성의 세계 자체에서 솟아오르는 신령하고 무궁무궁한 내면의 숨겨온 우주의 새 모습, ‘새 ?’ 또는 ‘신새벽’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원초적 현실세계와 조금 다른 주체의 결단이나 ‘각비(覺非)’와 같은 엄혹한 초월·초극 이 숨어 있다. 그래서 ‘흰 그늘’의 ‘흰’이 ‘신화(神化)’ 즉 해방을 향한 피나는 천신만고 끝에 온다는 그 계시나 샤먼의 영통(靈通)세계를 색채적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검은 샤먼과 흰 샤먼을 가를 때의 ‘흰’도 또한 바로 그것이다.
서정시에 대한 이야기는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결국 이 말은 내가 1970년 5월 『오적(五賊)』이라는 ‘작은 판소리’를 발표한 사실과 관련된다. 작은 ‘폭발’이었는데 ‘안’으로 ‘온축’하고 높이 승화하여 ‘삭힘질’하는 서정시의 ‘시김새’를 훌쩍 뛰어넘어 ‘신명’을 ‘밖’으로 폭발하듯 밀어붙이는 ‘풀이’의 대중적인 ‘야단법석’으로서 이 오적(五賊) 등의 일련의 담시를 발표한 것은 결국 일곱 살 때던가 외할아버지의 그 잊히지 않는 ‘문장 강화’의 기억에 연속된다고 생각한다.
백두산과 한라산, 서해의 칠산바다와 동해의 강릉 경포대 앞바다는 결국 정서의 크기와 넓이를 말한다. 임백호(林白湖)나 무장시인(武將詩人)들 같은 ‘호연지기(浩然之氣)’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무 감옥에 ‘오래’ 있었고 투쟁에 너무 ‘깊이’ 개입해 있었다. 바로 그 ‘오래’와 ‘깊이’가 나의 ‘큰 판소리’ 생산을 막았고, 또 역으로는 그 판소리 안으로 ‘오래’와 ‘깊이’가 들어가서 그것이 참으로 ‘큰’ 소리가 되는 길을 도리어 가로막았다.
그러나 어쩌랴! 시절이 ‘시’보다 ‘삶’을, ‘삶’보다 ‘쌈’을 더 요구했고 나는 본디, 이십대의 어느 날 어느 벗에게 술취해 떠들었듯이 ‘민족의 역사 위에 내 몸으로 큰 시를 쓰기’를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나의 지난날의 시적(詩的) 성취는 그리 뛰어난 것이 못 되지 않나 싶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는 삶의 연장이지 그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삶이 시가 될망정 시가 삶을 배신하는 일, 비평가들이 염치없이 흔히 떠벌이는 소위 ‘발자크 현상’ 따위를 나는 솔직히 말해서 일종의 파탄이라고밖엔 안 본다. 변명의 여지는 있겠으나 그리 바람직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일이라는 말이다.


4


이제 이 글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 글을 젊은이들이 많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지금의 이십대를 나의 이십대와 비교하면 아마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서로 다른 삶과 세계 속에 살았고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뭐라 해도 그 둘 사이에 변하지 않는 것이 크게 잡아 세 가지가 있으니 이 부분에 관해서만은 나의 얘기가 참고사항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쉽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 째, 우리는 아직 민족이 통일되지 못했다. 민족통일은 맨 먼저 사상에서부터 시작된다. 새 사상 아니면 새 통일 못한다. 새 통일 못한다는 것은 불행한 유년을, 불행한 아이들을, 그 아이들 속에 그 ‘가난’을 양산하겠다는 것밖에 안 된다.
새 통일사상은 밖에서부터 오지 않는다. 우리의 상고사와 고대 사상의 현대적 의미를 특히 19세기 후천 민중사 속에 창조적으로 원시반본(原始返本)되는 변형된 상고사상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 그것을 중심으로 중국사상, 서양사상을 선택, 비판적으로 흡수·종합 할 때 보편적이면서도 주체적인 열린 새 민족담론이 나오고 이것이 새 통일사상의 기초가 될 것이다.
이 점은 아마 두 세대에 공동으로 주어진 과제이겠다. 시, 문화 전반, 대중복제예술과 미학 이것들 역시 이 속에서 찾아야 한다. 특히 문학은 민족을 이탈 못한다. 이탈 못하되 오히려 크게 근본적으로 이탈할 수 있다. 그것이 뭘까?
둘째, 일본 극우파의 재등장, 중국의 민족주의 열풍, 베트남의 경제민족주의, 미국의 자국중심주의와 미·일 신(新)가이드라인과 안보동맹에 의한 중국과 북한 견제로 조성되는 동아시아에서의 초긴장 정세에 대응해서 우리는 사상 문화 정치 경제 등으로 응전해야 한다는 점에서 두 세대의 이해대립은 없다.
있는가?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이 점 서로 논의할 여지가 있다. 세대 차이는 넘어설 수 있는가? 부디 넘어서기를! 이 역시 민족 역사와 정치 경제 사회 안에서 구심점을 찾고 그것을 중심으로 중국, 인도, 일본과 베트남, 미국과 유럽, 아랍을 연구, 선택, 비판, 종합해야만 대응책이 나온다. 그 대응책 위에서 전략을 세우고, 그 전략으로 정부든 시장이든 동아시아 태평양의 여러 사회에 대응하며 협조, 연대, 동맹, 중립, 투쟁 등을 선택해야 한다. 시가 이것과 무관할 듯싶은가?
시는 이 관계망 속에 그 접촉의 감각을 통해 도리어 전 동아시아, 태평양적인 테마, 광활한 현실감각으로 확대될 것이다. 이것이 참된 세계화다.
셋 째, 젊은 세대의 문제점은 이 노겸(勞謙) 노인이 보기엔―물론 이 구닥다리가 잘못 보고, 제대로 못 볼 수 있으니 감안하라!― 세 가지다. 그 중 하나는 고대에로의 무한한 신화적 판타지적 탐색과 미래에로의 무궁한 멀티미디어적 사이버적 고도의 과학기술적 접근을 현재 지금 여기의 여러분 젊은 세대 중심의 새 문화창조 과정에서 참으로 담대하고 창의적으로 통합해야 하는 문제다. 그렇지 않으면, 문화적 창의력이 정치 경제를 앞서가고 오히려 그 방면의 새 담론을 생산 예시하며 그 중에도 콘텐츠웨어가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의 위력을 서서히 앞지를 뿐만 아니라 파격적으로 수정 변혁하기 시작하는 현실과 미래에서 여러분의 미래는 없다. 어찌할 텐가?
나의 관심과 과제도 거기에 있다. 두번째는 일본의 소위 ‘건담세대’의 깊은 좌절의 테마였고 아직까지도 서양식 자본주의를 타도하고자 하는 일본 극우파의 신도혁명(神道革命)라인의 큰 숙제가 되어 있는 이른바 ‘빛과 중력(重力)의 분열’과 그에 대응하는 ‘빛과 중력(重力)의 통일’, 그리고 그에 기초한 병들고 썩은 현실 자본주의 중력사회의 혁명적 치료와 그에 속한 올드타이프 인간의 대쇄신, 그리고 지구 생태중력장의 대변혁과 주변 우주공간의 영성적 초월성의 빛의 차원에서의 과학적 대 재조정, 일본 극우파를 근본에서 극복하기 위해서도 이것은 절체절명인데, 이 세 가지를 통합한 관통담론의 창조와 그에 응한 과학건설을 진지하게 토의하며 이 운동과 연구의 첫 관문인 대중복제예술, 디지털 테크, 사이버 공간과 뉴미디어 전면에서의 합리적 과학적 수학과 신비적 미학의 결합, 두뇌 중심과 신체 중심의 사회운동 속에서의 탄력 있는 주체적 통합 등 전 과정에서 통괄하여 현대 대중기술문화가 잃어버린 초월성의 빛, 즉 ‘아우라’를 회복하는 운동을 광범위하게 벌이는 문제를 같이 논의할 용기―이것은 용의가 아니라 용기다. 왜 그런지는 나중에 알게 된다.―가 필요하다.
세번째는 한민족의 민족구성과정은 다른 민족보다 훨씬 오래고 자기구심성이 굉장히 강하다. 단순한 서구 역사에서의 민족주의나 민족국가 형성과정에 대한 사적 인식의 지식만으로는 전연 해석 불가능이다. 그렇다고 국수주의를 인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 과정은 이 민족의 사상과 문화나 우주관 안에 엄청나게 여유로운 보편적 관점과 드넓은 세계주의와 우주적 생명사상을 열어놓았고, 인류 전체의 공동기원에 관한 중요한 신화의 단초들을 깊숙이 기억하고 있다. 이 점은 전 인류의 미래에 매우 중요하다. 신시(神市), 화백(和白), 풍류(風流), 마고(麻姑), 율려(律呂)나 천부(天符) 등의 개념은 민족의 명백한 구심점이면서도 동시에 저마다의 나름나름의 ‘멀티 단군’(국가주의 표상이 아닌 개개인 내면의 저마다 다른, 제 나름의 집단무의식의 표상으로서의 ‘늙은’, ‘중년’의 그리고 ‘젊은 단군’ 운동의 캐치프레이즈)이나 고조선 비전의 다양한 ‘정착적 노마디즘’―지역 정착, 농경적이면서 동시에 세계적 이동유목적인, 이중적인 세계문화와 문명(고조선의 환웅·웅녀의 결합신화) 남방 농경 정착문화의 곰족과 북방 유목 이동문화의 천손(天孫)·환웅족(桓雄族) 이 결합, 창설한 ‘농경유목’적 다양한 부족들의 연합국가가 고조선이라는 각도에서 고조선 연구가 새로이 있어야 하고, 단군도 단군과 왕검의 이원집정(二元執政)구조라는 연구각도 등이 새로이 검토될 신시(神市)의 세계 계(契)조직을 통한 신령한 호혜(互惠)경제, 화백(和白)의 통일적 전체성 및 다수와 개별적 자율성 및 소수의 이중적 교호결합 구조, 풍류의 영성적 우주적 진동의 초월적인 ‘떨림’의 빛과 이중적인 물질 증력 질서의 ‘흐름’이라는 생태직관성 사이의 관계 등으로 새로이 보는 문화, 미학 운동―의 이중적 역설적 교호결합성 등은 바로 이제껏 제기한 율려의 세계관의 내용들로서 시와 문화와 예술, 문학과 미학의 핵심원리에도 직결되는 것이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이런 비전을 세계에 내놓고, 그 담론을 과학화, 논리화, 현실화, 대중화하는 그런 ‘열린 새 민족문화운동’을 ‘율려’의 큰 이름 아래 진행하는 데에 적극 참여하여 그것의 맨 앞장에 서는 새로운 청년문화의 예봉을 창조해 볼 용의가―이것은 용의다. 그 이유도 나중에 안다―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제부터의 민족담론은 국수주의와 민족해체적 아나키즘의 이중구속, 그리고 북한의 폐쇄적 단선적 주체 지향과 남한의 개방적 세계화라는 잡종적이면서 거의 일변도의 타자화 지향 사이의 이중구속이라는 두 가지 이중구조 속의 사회적 질병을 뚫고 나가는 복합적 ‘이중메시지’의 ‘치유과정’이다. 즉 ‘겹그늘’의 문화 치유다.
그것이 바로 ‘프렉탈’인데, 작은 민족담론 안에 깊고 넓고 큰 세계, 인류·지구·우주 의 새 비전을 담아야 되는 것이다.
앞으로의 민족문학은 바로 이 길을 가야 하고, 그 미학도 율려로서, 아마도 ‘흰 그늘’의 원리를 중심으로 형성되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말이다. 검토 대상이지 준봉 대상이 아니다. 상식이겠다.
내 시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고, 계속 형성과정, 생성과정 속에 있다. 바로 그 점을 또 생성 속에서 읽는 것이 나의 시를 읽는 정도(正道)요 무언가를 얻는 효과적 방법일 것이다.
말이 너무 많았다는 느낌이 든다. ‘노겸(勞謙)’은 말수를 적게 해서 조촐하고 소박하게 사람을 대접하는 태도인데 지나쳤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분과 함께 공부하는 기분으로 정신없이 떠들었다. 부디 용서해 주기 바란다.



5


마지막으로 내 이름에 대한 이야기 몇 가지만 하겠다.
‘지하’라는 이름이 어찌해 생겼는지 묻는 사람이 많다. 간략하게 얘기하자면 이렇다.
5. 16 군사 쿠데타 뒤니까, 아마도 스물두 살 때였나 보다. 그때 나는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미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학교 앞에 ‘학림’이라는 음악다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 다방에서 곧 나의 시화전(詩畵展)이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때가 여름이었다. 그때 내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내 본명은 ‘김영일(金英一)’인데 문단에 이미 같은 이름의 문사들이 여럿 있었다. 당시 서울대 학생이 개인 시화전을 여는 것은 마치 시집을 한 권 내는 것만큼 ‘준문단적’, 혹은 ‘준준문단적’ 사건이었는지라 아무래도 필명(筆名)이 하나 필요했던 것이다. 그랬다.
그런데 그런 어느 날 동아일보사에서 일하던 한 선배가 점심때 소주를 사줘서 실컷 먹고 잔뜩 취해가지고 거기서 나와 동숭동 대학가의 아지트였던 바로 그 음악다방으로 가려고 호주머니를 뒤지니 돈도 버스표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걷기로 했다.
여름 한낮의 태양은 뜨겁고 술은 오를 대로 올라 비틀거리며 종로길을 갈지 자로 걸어오던 때다. 그 무렵 막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 있었는데, 요즘에도 흔한 것이지만 길가에 자그마한 입간판이 주욱 늘어선 것이다. 다방, 이발소, 이용실, 뭐 그런 것들의 입간판인데 술김에도 괴상하게 여긴 것은 그 간판 위쪽에 다 똑같은 자그마한 검은 가로 글씨로 모두 한글로 ‘지하’라고 하나같이 써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하실에 다방, 이발소, 이용실이 있다는 얘긴데 왜 하필 그 글자만은 유독 똑같은 한글, 똑같은 검은 글씨로 맨 위쪽에 가로로 조그맣게 써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똑같은 것들이 여기도 ‘지하’ 저기도 ‘지하’ 저기만큼 가서도 또 ‘지하’, ‘지하’, ‘지하’! 그야말로 도처에 유(有) ‘지하’였다.
‘옳다! 저것이다! 저것이 내 필명이다!’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러해서 김지하의 지하시대(地下時代)가 열리기 시작한다. 그 뒤로 내내 정보부 지하실과 경찰서, 유치장, 감옥, 지하 술집, 뒷골목과 허름한 싸구려 여관, 남의 집 문간방을 전전하거나 중병으로 병원에 입원하기 일쑤인 스산하고 을씨년스런 지하시대 삼십여 년이 펼쳐진다.
작명가(作名家) 김봉수 왈,
“이것도 이름이야? 감옥에 서너 번은 족히 가겠구먼!”
그랬다.
심지어 한창 지하시대에는 ≪워싱턴 포스트≫의 한 특파원이 내게 처음 악수하며 던진 말이,
“헬로! 미스터 언더그라운드 킴!”이었으니까 뒷말은 할 필요가 없다.
‘언더그라운드’라면 혁명가를 뜻하는데, 모자라게도 그걸 은근히 즐길 때까지 있었으니 고생해도 싸다고 하겠다.
이름을 고치라고 충고한 사람이 여럿 있었다. 고집도 부렸지만 또 고쳐서 신문에 발표까지 한 적도 있다. 그러나 결국엔 그것이 그것, 마찬가지로 나는 언제나 그대로 ‘지하’였다. 왜일까?
때가 차지 않아서였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과시 나의 필명 지하의 유행과 삶에서의 지하시대는 필연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름은 ‘위(位)’요 ‘궁(宮)’이라 ‘중(中)’ 즉 ‘마음’이 놓이는 ‘자리’를 말함이다. 일종의 ‘닻’의 뜻이다. 큰 바람이 불기 전에 벌레들이 자리를 옮기는 것은 그 때문이니 내게 큰 변화가 올 것이 틀림없다.

연초에 역(易)에 물으니 왈,
‘견군용(見群龍)’이라 했다.
천지가 요동하는 대개벽이다. 짐작대로다.
처신을 물으니 왈,
‘무수길(無首吉)’이라 했다.
‘목 이 없으면 길하다’는 뜻이다.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목을 숙이지 않으면 가차없이 잘려나간다는 뜻이니 그러매 크게 깊이 겸손해야 겨우겨우 길하다는 말로도 된다. 그만큼 내게 다가올 변화는 심각하고 그에 대한 대응은 어렵다는 것이리라.
또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연초 한낮 내 방에 그냥 홀로 무료하게 앉아 있을 때다. 문득 ‘노겸(勞謙)’이란 두 글자가 뇌리에 떠올라와 그 의미가 깊이 각인된다. ‘근로’와 ‘겸손’이니 언뜻 알아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앞으로 내 호(號)로 삼기로 작정하였다.
‘열 심히 일하는 겸손’이요 ‘활동하는 무(無)’요 ‘아상(我相) 없는 노동자’, ‘노예 노동자’의 옛 뜻이기도 하다. 도대체 내가 그 동안 얼마나 게을렀으면 ‘근로’가 나오고 또 얼마나 오만방자했으면 ‘겸손’이 나오랴 싶었으니 앞날이 더욱 걱정되었다. ‘근로’와 ‘겸손’ 아니면 갈가리 찢겨나가 살 수조차 없는 운명이라는 내 맏아들 놈의 연초 카드점괘가 이미 나와 있었으니까.
물 론 나도 안다. 『주역(周易)』의 겸괘(謙卦)는 노겸군자(勞謙君子)가 곧 타고난 천자(天子)이면서도 남의 밑에서 고개 숙여 근신하며 온갖 선행을 다 베푸는 그 아름다운 법(法)으로 결국 하늘을 차지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나는 그런 뜻에는 일말의 흥미도 없다. 나 같은 뼛속까지의 쌍놈, 민중에게는 도무지 안 맞는 뜻풀이기 때문이다. 그저 윤리적 패러다임으로서는 ‘근로’와 ‘겸손’일 뿐이니 내게 지금 결핍되어 있고 앞으로 그렇게 일관하여 고개 숙이고 살다 가지 않으면 큰 실수를 범할 것이 빈번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굳세게 견지할 따름이고, 미적 패러다임으로서는 곧 ‘활동하는 무(無)’의 뜻이리라!
언 어작업에서 훨씬 더 여백(餘白)과 틈과 침묵을 살리고 설명을 없애며 말을 줄이는 대담한 소통성(疏通性)으로 ‘흰 그늘’과 ‘한’을 스스로 움직이게 하고 삶의 내면에서 무궁무궁 저절로 살아 생성하게 하는 그런 텅 빈 창조력의 언어구조를 갖추고 닦으라는 가르침으로 일단 받아들일 따름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나는 이제 작년 개천절에 공언(公言)한 대로, 아버님이 지어주신 이름, 꽃 한 송이 ‘영일(英一)’로 돌아가고자 한다. 내 인생과 민족 역사에 작고 소담하고 예쁜 삶의 꽃 한 송이만 피우고 가겠다는 조촐한 서원과 함께…….
그렇게 하여 결정된 것이 바로,
노겸(勞謙) 김영일(金英一)이다.
그런데 여러 친구들이 말한다. 영일은 너무 애이름 같으니, 그냥 한글로 ‘김노겸’이라 부르면 어떠냐는 것이다. 그 편이 무던하고 친밀감이 있어 좋다는 것이니 원컨대 부디 앞으로는 이 이름을 즐겨 불러주길 바란다.

단기 4332년 11월 17일 밤
강원도 깊은 산골짝에서
김노겸, 노겸 김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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