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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론 브란도 80세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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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워터프론트'· '대부' 등으로 많은 이들의 갈채를 받았던 금세기 최고의 명배우 말론 브란도가 로스앤젤레스에서 향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그의 변호사가 밝혔다.

사망 원인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브란도는 그간 충혈성 심장마비와 과체중으로 고통받아왔다.

브란도는 그의 세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고 AP통신의 밥 토마스는 전했다.

브란도는 1947년 테네시 윌리엄스의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잔인하고 포악한 스탠리 코왈스키 역을 연기하면서 명성을 얻게됐다.

' 메소드(Method)' 연기를 좋아했던 브란도는 엘리아 카잔 감독 지도 하에서 가공되지 않은 생생한 연기를 보여주며, 평론가들의 갈채를 받았다. 브란도처럼 메소드 연기법을 따르는 배우들은 자신의 심리 상태와 경험을 끌어내 배역을 창조해낸다. 이러한 메소드 연기는 러시아 영화감독 콘스탄틴 스타니슬라브스키에 의해 발전됐으며, 리 스트라스버그가 만든 '액터스 스튜디오'에서 인기를 얻었다.

데이비드 톰슨은 자신의 '신 영화인명사전'에서 "그전까지 미국 연극 무대에서 그처럼 위험하고 잔혹한 남성미를 보여준 사람이 없었다. 그의 영향은 지금까지도 연기 세계는 물론, 스포츠나 패션 화보에서도 묻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브란도는 연기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특이한 행동을 하기로 유명했다. 그는 사생활을 보호받을 수도 있었으나, 그의 특이한 행동이나 엄청난 출연료 요구 등은 종종 언론의 관심 대상이 되곤 했다.

브 란도는 '스코어(2001년작)' 촬영 당시 프랭크 오즈 감독과 함께 촬영장에 있는 것을 거부했고, '슈퍼맨(1978년작)'에서는 출연료로 10분당 4백만 달러를 받기도 했으며, '대부(1972년작)'로 아카데미상을 받게 됐을 때는 새친 리틀피더라는 여성을 대신 보내 수상을 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브란도는 항상 존경받았고, 그를 캐스팅하려는 감독들도 많았다. 브란도는 '무서운 영화2' 초반부에 등장하는 단역 출연 제안도 받았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거절했다.

폭넓은 인기

말론 브란도는 1924년 4월 3일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 지역 극장에서 연기를 했고, 그 지역 출신 배우인 헨리 폰다와 도로시 맥과이어가 연기를 시작하도록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말 론 브란도가 어렸을 때, 가족들은 그를 '버드'라고 불렀고, 그의 가족들은 몇 차례 이사를 했다. 처음에는 일리노이주 에반스턴으로 갔다가 나중에는 캘리포니아주 산타애나로 옮겼고 다시 일리노이주로 돌아갔다. 어린 시절 말론 브란도는 말썽이 심한 아이였고, 이에 그의 부모는 브란도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엄한 군대형 사립학교에 보냈으나, 결국 퇴학당했다.

신체 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아 2차세계대전 징집 대상에서 제외된 브란도는 19세 때 뉴욕으로 가서 그의 누나 프란체스와 함께 지냈다. 브란도의 다른 누나 조셀린은 전설적인 연기 지도자 스텔라 애들러와 함께 연기 공부를 하고 있었고, 브란도 역시 연기 공부에 합류했다. 그리고, 애들러는 이내 브란도의 연기에 감동받았다.

AP통신에 따르면, 애들러는 "1년 안에 말론 브란도는 미국 연극계에서 최고의 젊은 배우로 떠오를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브 란도는 몇몇 연극에 출연한 뒤, 1947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하지만, 브란도는 본인의 스탠리 연기와 오토바이 타는 것, 봉고 연주하는 것 등에 관심이 집중되는 현실에 그다지 행복해하지 않았다고 AP통신은 전하고 있다.

브란도는 한 인터뷰를 통해 "스탠리 코왈스키는 늘 옳았으며, 결코 두려워한 적이 없다. 그는 의아하게 생각하거나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의 자아는 늘 확고했다. 그는 내가 증오하는 잔혹한 공격성을 갖고 있었고, 나는 그게 두렵다. 나는 그 배역을 혐오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비비안 리와 함께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년작)'에서의 연기는 말론 브란도는 스타로 만들었다.
브 란도는 첫 영화 '더 멘(1950년작)'을 통해 호평을 받긴 했지만, 그가 정말 대형급 스타로 떠오른 것은 1951년 카잔 감독이 영화화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통해서였다. 그로부터 3년 후, 브란도는 역시 카잔 감독의 '워터프론트'에서 전직 권투선수 테리 말로이 역을 연기해 처음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 속에서 테리가 했던 "나는 챔피언 도전자가 될 수도 있었어"라는 명대사는 지금까지도 널리 애용되고 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워터프론트', '더 와일드 원(1953년작)' 등에서 보여준 그의 연기로 인해 말론 브란도는 1950년대의 상징이 돼버렸다. 브란도는 연기 인생동안 8차례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고, '워터프론트'와 '대부'로 2차례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브란도는 이후에도 '아가씨와 건달들(1955년작)', '팔월 십오야의 찻집(1956년작)', '사요나라(1957년작)' 등으로 계속해서 성공을 이어갔다. 하지만, 브란도의 연기 인생은 1960년대 들어 하락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특히 대규모 제작비가 들어간 '바운티호의 반란(1962년작)'에서 플렛처 크리스틴을 역을 맡은 브란도는 매너리즘에 빠진 연기를 보여줌으로써 극심한 하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전설적인 위치

하지만, 브란도는 '대부'에서 돈 꼴레오네를 연기하면서 다시 회생했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은 꼴레오네 역으로 브란도를 점찍어뒀지만, 제작자들은 이런 감독의 결정을 좋아하지 않아 감독을 해고하기 직전까지 갔다.

하 지만, 이 영화가 엄청난 흥행 성공을 거두고, 마피아 두목으로 브란도가 보여준 조용하면서도 권위있고 사색하는 듯한 그의 연기가 이 영화의 백미로 떠오르면서, 코폴라 감독은 그만한 인정을 받게 됐다. 이 영화는 '죠스(1975년작)'가 등장해 기록을 깨기 전까지 당대 최고 흥행작으로 기록됐다.

브란도는 이후 장르가 다른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통해 '대부'의 명성을 이어갔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이 영화에서 브론드는 파리에서 만난 젊은 여자(마리아 슈나이더)와 격렬한 정사를 나누는 소외된 미국인 역을 연기했다. 브란도와 슈나이더는 육체적으로도 감정적으로 과감하게 모든 걸 벗어내고 연기했다. 이 영화는 1973년 미국 개봉 당시 X등급(성인용 영화)을 받았다.

최근 말론 브란도가 연기한 가장 훌륭한 배역 중 하나는 '지옥의 묵시록'의 커츠 대령 역이었다.
브 란도는 그밖에도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1979년작)'에서 미치광이 커츠 대령 역을 연기했다. '지옥의 묵시록'은 많은 비난과 난관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이 영화를 베트남전쟁에 대한 대표적인 고전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후 브란도는 다양한 영화에 출연했다. 브란도는 '백색의 계절(1989년작)'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으며, '말론 브란도의 프레쉬맨(1990)'에서 대부 역할을 패러디 연기했으며, '돈 쥬앙(1995년작)'에서 사려깊은 치료 전문가로 등장했다. 또, '콜럼버스(1992년작)'와 혹평을 받았던 '닥터 모로우의 DNA(1996년작)'에도 출연했다.

브란도는 3차례 결혼 했고, 9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첫 번째 결혼은 1957년 안나 캐쉬피와, 두 번째는 1960년 멕시코 여배우 모비타와, 세 번째는 타히타라는 타히티 출신의 여성과 결혼했다.

1990년, 브란도의 아들 크리스틴이 베버리 힐즈에서 브란도의 딸 샤이엔의 애인 댁 드롤릿을 총으로 살해했다. 크리스틴 브란도는 결국 살인 혐의가 인정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샤이엔 브란도는 1995년 자살했다.

브란도는 크리스틴 변호를 위해 수백만 달러 빚을 지게 돼, 남은 여생동안 자신의 출연작 재방송료와 사회보장연금 및 영화배우조합(SAG)에서 나오는 연금에 의존해 생활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장례식 일정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으며, 브란도의 변호사 데이비드 J. 실리는 AP통신에 모든 일정이 비공개로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CNN) / 김수진 (JOINS)


Marlon Brando를 추모하며 - < 출처 : www.joins.com/cnn >





"말론 브란도는 연기에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했고, 대변혁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연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말론 브란도에게서 여자를 뺏어 본 적이 있는 남자는 내가 유일하다."
-- 영화배우 토니 커티스

브란도는 1951년작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비비안 리와 함께 출연했다. 이 영화로 그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처음으로 아카데미상 후보에도 오르게 된다.





"나는 말론 브란도와 함께 일했던 멋진 순간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와 함께 연기했던 그 장면들을 언제나 소중히 간질할거다. 그는 가장 관대하고 능력있는 배우 중 한 명이었다."
-- '워터프론트'에서 에디 도일 역을 연기했던 배우 에바 마리 세인트

브란도는 '워터프론트'로 처음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다.





"그는 전세계, 그 중에도 특히 미국에 있는 많은 젊은 배우들에게 있어 대부와도 같았다. 그는 젊은 연기자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의 명성은 영원할 것이다."
-- '대부'에서 톰 헤이건역을 맡았던 로버트 듀발

1972년작 '대부'에서 돈 비토 꼴레오네 역을 열연한 브란도는 두 번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다.




"말론 브란도는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대해 비슷한 소감을 계속 늘어놓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내 소감은 간단하다. 나는 그가 세상을 떠나 슬프다."
-- '대부'와 '지옥의 묵시록'의 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브란도는 1979년작 '지옥의 묵시록'에서 미치광이 커츠 대령 역을 연기했다.




"그는 멀리 떠났다. 그는 너무나 가슴 따뜻하고 재미있는 친구였으며, 최고의 배우였다. 그 같은 연기자는 결코 없었다. 우리는 이제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할 것이다."
-- CNN 진행자이자 말론 브란도의 오랜 친구인 래리 킹

1996년 '래리 킹 라이브' 출연 전 촬영한 홍보 사진 속의 말론 브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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