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行間/향기로운 시와 소설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을 수만 있다면 : 정희성을 생각하면서

반응형

나는 나의 말로부터 해방되고 싶고, 가능하다면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됐으면 싶다.

"신동엽의 노트를 열다"을 포스팅하면서 신동엽을 생각하고 다시금 시집을 꺼내 보았다. 먼지가 뽀얐게 묻어있는 시집들이 안타까워 보였다. 한때는 '詩의 시대'라고 하였던 시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詩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정희성. 그를 알게 된지가 벌써 20년하고도 수년이 지났다. 지금까지 시집 4권을 내었다. "답청(1974- 재간 1997)", "저문 강에 삽을 씻고(1978)",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1991)" 그리고 "詩를 찾아서(2001)"이다.


詩를 찾아서  정희성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정희성이 나에게 준 가장 강한 두가지 인상은 74년 받은 것이다. 그 첫째는 어느 고등학교에 근무하던 그가 대학원을 수료하고도 논문을 내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시집 "답청"이다. 사회적인 지위도 높고 경제적인 여유도 즐길 수 있는 교수의 길을 버리고 국어교사로 남겠다는 그이 각오는 뭇 속물들에게도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출처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발문(김종철) 中 ]
정희성시인에게 개인적인 매력을 느낀 것은 그의 詩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욱 큰 것은 이 발문을 읽고 난 후 였다.

1972년부터 서울 숭문고 국어교사로 근무해온 그는 “이 학교에 근무하면서 네 권의 시집을 냈는데, 학교를 옮기지 않고 한 직장에서 계속 근무한 것은 내게 행복한 일”이라고 소회를 밝혔다.[출처 : 조선일보]

결국 그는 발문에서 처럼 35년을 근무하고 올해(2007년) 2월 정년 퇴임을 하였다.

올 2월, 숭문고등학교 교사에서 정년퇴임 했습니다. 제가 1972년에 부임했으니까 35년을 근무했습니다. 사립학교라 옮겨다니지 않고 한 곳에서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제자 1만 명, 시집 4권, 결혼하여 아이 둘을 길렀으니 참으로 행복하고 보람된 시간이었습니다.

졸업한 지 30년이 되어 ‘모교 방문의 날’에 찾아온 어느 제자가 “선생님이 계셔 행복합니다!” 하기에 “너희가 있어 내 생이 복되구나!”라고 했습니다. [출처 : [청렴 인터뷰] 정희성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내가 현실주의자가 되어 우리를 억압하는 자들에게 맞설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우리의 낭만적인 환상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지 현실주의 자체가 문학적 이상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의 시는 한 시대의 불의와 맞서서 싸우다 죽은 용감한 사람들의 영혼에 바쳐진 것이었다.

나는 너무도 오랫동안 미움의 언어에 길들어왔다. 분노의 감정이 나를 지배하는 동안에만 시가 씌어졌고 증오의 대상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에만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고자 한다. 나는 나의 말로부터 해방되고 싶고, 가능하다면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됐으면 싶다. 이제 길을 나서기는 했는데 나와 내 말이 어디에 가 닿을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출처 : 詩를 찾아나서며 - 1997년 시와시학상 수상소감

"이제 길을 나서기는 했는데 나와 내 말이 어디에 가 닿을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말을 하였지만 그의 시는 많이 변해가고 있었다. "현실주의 자체가 문학적 이상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는 말처럼 그는 어느 시인보다도 낭만적이다.

시인의 말처럼 "발표 안된 시 두 편만 / 가슴에 품고 있어도 나는 부자다 / ... 중략 ... /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 거지는 나의 생리에 맞지 않으므로 / 나도 좀 잘 살고 싶으므로" 나도 잘 살고 싶다.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을 수만 있다면 행복하겠다.

병상에서

실패한 자의 전기를 읽는다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실패를 위해
누군가 부정하겠지만
너는 부정을 위해서 시를 쓴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 시를 쓰고
부질없는 줄 알면서 강이 흐른다
수술을 거부한 너에게
의사는 죽음을 경고했지만
너는 믿지 않는다
믿지 않는 게 실수겠지만
너는 예언하지 않는다
예언하지 않아도 죽음은 다가오고
예언하지 않아도 강이 흐른다
네 죽음 하나의 실수에 그치겠지만
밖에는 실패하려고 더 큰 강이 흐른다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마디 말

한 처음 말이 있었네
채 눈뜨지 못한
솜털 돋은 생명을
가슴속에서 불러내네

사랑해

아마도 이 말은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다가
괜히 나뭇잎만 흔들고
후미진 내 가슴에 돌아와
혼자 울겠지

사랑해

남몰래 울며 하는 이 말이
어쩌면
그대도 나도 모를
다른 세상에선 꽃이 될까 몰라
아픈 꽃이 될까 몰라

사랑

사랑아 나는 눈이 멀었다
멀어서
비로소 그대가 보인다
그러나 사랑아
나도 죄를 짓고 싶다
바람 몰래 꽃잎 만나고 오듯
참 맑은 시냇물에 봄비 설레듯




나는 안다
그대 눈 속에 드리운 슬픔을
내가 그윽한 눈으로 그대를 바라볼 때
그대는 다른 곳을 보고 있다
그대 눈 속의 남해바다
그대 눈 속의 보리암
그대 눈 속의 연꽃
그대 눈 속의 그림자가
그대와 함께 있기를 열망하는
나를 저물게 한다
나는 예감한다
내 눈 속에 잦아들 어둠을
죽음이 내 눈을 감길 수는 있겠지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람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발표 안된 시 두 편만
가슴에 품고 있어도 나는 부자다
부자로 살고 싶어서
발표도 안한다
시 두 편 가지고 있는 동안은
어느 부자 부럽지 않지만
시를 털어버리고 나면
거지가 될 게 뻔하니
잡지사에서 청탁이 와도 안 주고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거지는 나의 생리에 맞지 않으므로
나도 좀 잘 살고 싶으므로

새벽이 오기까지는

새벽이 오기 전에
나는 머리를 감아야 한다
한탄강 청청한 얼음을 꺼서
얼음 밑에 흐르는 물을 마시고
새벽이 오기 전엔
얼음보다 서늘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새벽이 오기까지는
저 어질머리 어둠에 불을 지피고
타오르는 불꽃을 확인해야 한다
얼음 위에 불을 피우고
불보다 뜨거운 마음을 달궈야 한다
새벽이 오기까지는

나는 보리라
얼음 위에서 어떻게 불꽃이 튀는가를
겨울의 어둠과 싸우기 위해
동지들의 무참한 죽음과
보다 값진 사랑과
우리들의 피맺힌 자유를 위해

나는 보고 또 보리라
불이 어떻게 그대와 나의
얼어붙은 가슴을 뜨겁게 하고
저 막막하고 어두운 겨울벌판에서
새벽이 어떻게 말달려 오는가를
아아 눈보라 채찍쳐
새벽이 어떻게 말달려 오는가를


답청

풀을 밟아라
들녘에 매맞은 풀
맞을수록 시퍼런
봄이 온다
봄이 와도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봄은 스스로 풀밭을 이루었다
이 나라의 어두운 아희들아
풀을 밟아라
밟으면 밟을수록 푸르른
풀을 밟아라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너를 부르마

너를 부르마
불러서 그리우면 사랑이라 하마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아도
내 가장 가까운 곳
나와 함께 숨 쉬는
공기(空氣)여
시궁창에도 버림받은 하늘에도
쓰러진 너를 일으켜서
나는 숨을 쉬고 싶다.
내 여기 살아야 하므로
이 땅이 나를 버려도
공기여, 새삼스레 나는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이름을 잘못 불러도 변함없는 너를
자유여.

시를 찾아서

말이 곧 절이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
지금까지 시를 써 오면서
시가 무엇인지
시로써 무엇을 이룰지
깊이 생각해볼 틈도 가지지 못한 채
헤매어 여기까지 왔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엔
절 없이 절터만 남아 있고
강원도 어성전 명주사에는
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 뜨락에 발돋움한 상사화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았다
한 줄기에 나서도
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
끝없이 저자 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
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
시를 찾아서


진달래

잘 탄다, 진아
불 가운데 서늘히 누워
너는 타고
너를 태운 불길이
진달래 핀다
너는 죽고
죽어서 마침내 살아 있는
이 산천
사랑으로 타고
함성으로 타고
마침내 마침내 탈 것으로 탄다
네 죽음은 천지에
때아닌 봄을 몰고 와
너를 묻은 흙가슴에
진달래 탄다
잘 탄다, 진아
너를 보면 불현듯 내 가슴
석유 먹은
진달래 탄다

세상이 달라졌다

세상이 달라졌다.
저항은 영원히 우리들의 몫인 줄 알았는데
이제 가진 자들이 저항을 하고 있다.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저항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법이 되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권력이 되었지만
우리 같은 얼간이들은 저항마저 빼앗겼다.
세상은 확실히 달라졌다.
이제는 벗들도 말수가 적어졌고
개들이 뼈다귀를 물고 나무 그늘로 사라진
뜨거운 여름날의 한 때처럼
세상은 한결 고요해졌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