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가? : 스트레인저 댄 픽션

반응형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주 오래 전, 새로운 상상을 하곤 하였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런 상상이 부질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늙어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세상이 누군가의 조정을 받는 세상이고 컴퓨터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 존재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컴퓨터의 시분할처리 시스템처럼 1번에 1명밖에 말을 하지 못한다면 이라는 상상을 하곤 하였다. 인간들은 느끼지 못한다. 지금의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느끼지 못 하듯이. 하지만 가끔은 데드럭이 걸린 것처럼 꽉 막힌 체증을 느끼곤 한다.

부질없는 상상이다. 아마도 '빅브라더'에 빠져 그런 상상을 했었던 같다.

그 상상처럼 누군가가 내 인생을 좌지우지 한다면 나의 기분은 어떨까? 뭣같은 기분일 것이다. 내맘대로 되지 않는 노력을 한다고 하여 되지도 이루어지지도 않는 무력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트루먼 쇼'가 생각났다. 트루먼(잠시 주인공 이름이 무언지 고민을 하였다. 갑자기 이름이 생각 나 내 머리를 한대 쥐어 박았다. 인간아...)이 현실을 직시한 것이 행복할까 아니면 그 안에서 안주하는 것이 행복했을까? 답은 없어 보인다. 트루먼이 선택한 길이 행복한(현명한 이라고는 못하겠다.)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수 밖에는 없다.

소설같은 이야기가 현실로 펼쳐진다. 주인공은 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려 한다. 주인공이 구하고자 자신의 목숨이었으나 소설의 분위기상 죽음이 맞다고 선택을 하였다. ...

하지만 그는 결국 누군가에 의해 선택되었다. 그리고 살아 남았다. 자신의 의지라기 보다는 그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존재에게 선택되었다. 인간은 너무 무력한 존재이다. 아무리 발버둥을 처도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선택되기 전까지는...

원래 영화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이다. 영화를 보면서 씁쓸함을 느꼈다. 나처럼 쓸때없는 생각을 하지않고 영화를 있는 그대로 본다면 좋은 영화이다.

<스트레인져 댄 픽션>은 코미디와 로맨스, 판타지적 상상력을 한데 버무린 기묘하고 사랑스런 드라마다. 현실과 픽션을 천연덕스럽게 뒤섞은 메타픽션 구조는 찰리 카우프만을 연상시키고, 그 종착점에서 관객을 기다리는 건 삶(과 죽음)에 대한 감독의 따뜻한 시선이다. 주인공을 행복의 절정으로 인도하고 가장 아이러니한 순간에 죽임으로써 걸작소설을 만드는 에펠의 딜레마는 창작자의 윤리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과연 크릭의 삶은 걸작의 탄생을 막을 만큼 가치 있을까. 지적이고 사려깊은 이 영화는 잔잔한 웃음과 관계의 윤리에 대한 질문을 함께 안긴다. 보고 나면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 영화.
영화를 평한다는 것이 아니 영화평을 읽는 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르겠다. 보는 관점에 따라 모두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리뷰에 따라 관객의 수가 잘라지니 나쁘게 쓸 수도 없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이 영화는 좋은 영화이다. 다만 '보고 나면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 영화'라는 말에 빈정이 상했을 뿐이다.

많은 스틸 컷 : 스트레인저 댄 픽션 Stranger Than Fiction (2006)의 장면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