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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에 고인이 없다. 부고의 주인공은 고인이다.

한방블르스 2025. 9. 12. 18:23

 

역사책은 참 이상하다. 왕과 장군의 이름만 나온다.  
워털루 전쟁 대목에서도 “워털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졌다.”라고만 되어 있다. 어디 나폴레옹이 싸웠나? 쫄병들이 싸웠지. 역사책 어디를 들춰봐도 쫄병 전사자 명단은 없다.

—『미친말의 수기』, 마광수, 「역사」  

 


 

부고는 죽음을 알리는 글이다. 동시에 한 사람의 삶을 압축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 신문에 실린 부고를 보면, 고인의 삶보다는 다른 것이 중심에 놓인다.

 

신문의 부고기사는 유가족과 사회적 지위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름 앞에 붙는 직업 역시 특정 분야에 편중되어 있었다. 기업인, 언론인, 학계 인사, 공무원 출신이 대표적이다.

 

고인이 유명인이 아니라면 직함조차 사라진다. 이름만 남고, 대신 가족관계가 차례로 나열된다. “누구의 남편”, “누구의 아버지”라는 식이다. 마치 부고의 주인공이 고인이 아니라 남은 가족인 듯하다.

 

이런 방식은 죽음을 사회적 지위의 문제로 바꿔 놓는다. 어떤 죽음은 기록되고, 어떤 죽음은 기록되지 않는다. 어떤 직업은 이름 앞에 붙고, 어떤 직업은 끝내 보이지 않는다.

 

결국 부고는 한 사람의 삶을 기리는 글이라기보다, 남겨진 이들의 관계와 위상을 드러내는 사회적 장치다. 고인은 사라지고, 유가족만 남는다.

 

부고에 고인이 없다. 부고의 주인공은 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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