行間/부고사이트를 위한 메모

장례식장 - 유강희

한방블르스 2025. 9. 12. 19:16

 

 


장례식장  
—유강희

부의(賻儀), 라고 쓰인 흰 봉투 뒷면에  
아직 산 자의 이름을 쓰고  
그걸 윗주머니에 넣는다  
〈조문〉을 하기 위해  
아직 산 자는  
이미 죽은 자와  
아직 산 자를 위해  
아직 산 자를 더 많이  
위해  
재빨리 검은 옷으로  
갈아입는다  
살아생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죽은 자의 사진 앞에  
〈느림〉으로 엎드린다  
한 번 더 반복한다  
그러고 나서  
제법 애통한 낯으로  
아직 산 자가  
아직 산 자를 향해  
또 한 차례  
〈되돌림〉으로 엎드린다  
그리고 나서  
흰 꽃을 꺼내듯  
흰 봉투를 꺼내  
아직 산 자는  
아직 산 자 앞에서  
아직 산 자의 이름이 적힌  
그것을 밀봉된 상자의  
좁은 구멍에  
애써 밀어 넣는다  
아직 산 자들이  
등뒤에서 자꾸 밀쳐도  
아직 남아 있는  
자신의 영광된 삶에  
당당히 한 표를 행사하듯,  
아무 동요 없이 그는  
아직 상자 앞에 서 있다

—『고백이 참 희망적이네』, 문학동네, 2018.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