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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망한 것 같아 억울할 때 나는 부고를 쓴다

한방블르스 2025. 9. 12. 22:26

인생이 망한 것 같아 억울할 때 나는 부고를 쓴다  
특별하지 않은 삶이 어디 있나

 

 

 

신문 귀퉁이에 자리해 지나치게 쉬운 글

어떤 사람이 
어떠한 이유로 
세상을 떠났다는 공고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매개체이자
장례비용을 나눌 수 있도록 연결해 주는 문화적 장치

그런데

잘 쓴 부고에는
그 이상의 감동이 있다.

나의 첫 번째 부고

누구와 함께 헸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무엇을 이루었는지

대부분 시시콜콜한 이야기지만

부고는 인생이 응축된 문장이 모인
작은 평전

죽음으로 읽는 삶의 이야기

때로는 단점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충실하면서도
바람둥이였으며, 대중의 관심에
늘 목말라하는 뜨거운 열정의 스페인 남자였다.
--피카소 부고

당부가 담기기도 한다.

내 무덤에 와서 울지 마라.
나는 거기에 없고 잠자는 것도 아니다.
나는 수천 개의 바람이 되어 날고 있을 것이다.
--96세로 사망한 에밀리 클라크 부고

부고를 쓰는 부서에 가장 뛰어나 기자가 모인다는 
미국의 유명 신문사

“부고를 읽으며 하루를 시작하죠"
중독이라 말하는 애독자가 있을 만큼

떠난 이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특별하지 않은 삶이란 없었다.

특별하지 않는 삶도 있다.
“평범하게 태어나 평범하게 살다 평범하게 죽는다.”
아마도 이렇게 쓰일 나의 부고

명문대 졸업증, 각종 자격증, 대기업 사원증… 
채워 넣으면 좀 달라질까

그게 부고야 이력서야 싶지만

셀 수도 없이 많은
다시 쓰고 싶은 순간

돌아갈 수만 있다면 잘해보고 싶은 마음

차라리 좋은 배경으로 다시 태어나면 좋겠다

옆 반 걔는 다 가진 것 같은데

“이번 생은 망한 것 같아"
입버릇처럼 말하는 김에

인생 2회 차를 간절히 꿈꾸는 청춘의
‘1회 차 인생 부고'를 써보기로 한다.

먼저 출생부터 중요한 날짜 목록을 작성하기

구체적인 이름과 장소를 기억하니
사이사이 추억도 떠오른다

다음은 질문을 던지기

무엇을 좋아했는지
무엇을 꿈꾸었는지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마치 다른 사람을 인터뷰하듯
진지하게 묻고
진득하게 답을 기다리는 시간

부고를 쓴다는 것은 일종의 기억 행위
떠나는 이가 마지막으로 남기는 인생의 말

마지막 질문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까?

벗어나고만 싶던 처절한 삶에도
반짝이는 순간이 있었네요.

저는 이제 새 삶을 준비하러 갑니다.

나중에 쓰일 저의 두 번째 부고는 
좀 더 재미있고 따뜻해야 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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