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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실천적 지식인 리영희 선생 별세

한방블르스 2025. 9. 18. 09:44

시대의 실천적 지식인 리영희 선생 별세

 

우리 시대 ‘실천적 지식인의 표상’이자 ‘큰 언론인’이었던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2010년 12월 5일 별세했다. 향년 81.

지병으로 서울 중랑구 면목동 녹색병원에 입원했던 리 교수는 이날 오전 0시30분께 병원에서 가족과 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그의 평생은 ‘반지성에 맞선 치열한 싸움의 역정’이었다. 근무하던 언론사와 대학에서 각각 두 번씩 해직됐고, 모두 다섯 차례 구속됐다. 1980년 신군부가 ‘광주소요 배후 조종자’ 중 한 명으로 그를 지목 · 투옥했을 때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리 전 교수를 ‘메트르 드 팡세’(사상의 은사)라고 불렀다.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태어난 리 전 교수는 57년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언론인의 삶을 시작했고, 64년부터 71년까지 <조선일보>와 합동통신 외신부장으로 일했다. 69년 베트남 전쟁 파병 비판기사를 썼다가 조선일보에서 쫓겨났고, ‘군부독재 · 학원탄압 반대 64인 지식인 선언’에 참여했던 71년 합동통신에서 해직됐다. 한양대 교수로 재직하던 76년과 80년에도 각각 박정희 정권과 신군부의 압력으로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리 전 교수는 88년 <한겨레신문> 창간 당시 이사 및 논설고문을 맡았다. 방북 취재를 기획했던 89년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 기소돼 징역 1년6월을 선고받고 160일간 복역했다.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그의 무기는 ‘관념’이 아닌 ‘사실’이었고, ‘이론’이 아닌 ‘실천’이었다. 그는 글쓰기를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라고 정의했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 듯’, 그는 오직 진실과 균형의 날개로 이념적 도그마에 저항했다. 그의 책 <전환시대의 논리>(1974)와 <우상과 이성>(1977)은 반공 이데올로기가 가린 베트남 전쟁의 실체와 중국의 현실을 정직하게 드러내며 당대의 대표적 금서로 탄압받았다.

조선일보와 한겨레에서 함께 일했던 임재경 전 한겨레신문사 부사장은 “리 전 교수는 미국이 만들어낸 뉴스로 세상을 바라보던 시대에 남북문제와 외교문제 및 베트남ㆍ중국 문제에서 독자적 탐구와 분석을 토대로 용기 있는 기사를 써냈다”며 “한국전쟁 후 우리 언론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보적 언론인”이라고 평했다.

2000년 뇌출혈로 쓰러져 오른쪽 몸이 마비된 뒤로도 시대를 염려하는 그의 발언은 그치지 않았다. 올 초 간경변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고부턴 병원과 집을 오가며 치료에 전념해 왔다. 자신의 “책이 한 권도 팔리지 않아 인세가 0원이 되는 게 소원”이라던 리 전 교수는 그의 책이 필요 없는 사회를 끝내 보지 못한 채 이날 숨을 거뒀다. 부인 윤영자씨와 아들 건일 · 건석씨, 딸 미정씨를 세상에 남겼다.

 


 

리영희, ‘우상’을 깨고 떠나다

 

언론인 출신 비판적 학자, 4번 해직·5차례 구속
냉전·독재 야만의 시절 ‘실천적 지식인’의 표상… 8일 ‘민주사회장’으로



동서냉전과 군사독재 시절, 실천적 지식인의 표상인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2010년 12월 5일 0시40분 지병인 간경화로 별세했다. 향년 81세.

어떤 권력에도 굴하지 않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추구했던 고인은 평생 4번의 해직과 5번의 구속이란 고난을 겪었다.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성공립공업고(현 서울공고)와 한국해양대를 졸업했다. 6·25가 터지자 통역장교로 육군에 입대, 7년간 군생활을 한 뒤 소령으로 예편했다.

57년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언론계에 투신했으며 조선일보 기자 시절인 64년 ‘아시아·아프리카 외상회의,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 추진’ 기사로 구속됐다. 그후 합동통신 외신부장이던 71년 위수령에 항의하는 ‘64인 지식인 성명’에 참여해 해직됐다.

72년부터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겸 중국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교수재임용법으로 76년 해직됐다가 80년 3월 복직했다.

그러나 그해 여름 다시 ‘광주소요 배후조종자’로 구속, 해직돼 4년을 보냈다. 88년 한겨레신문 창간 당시 비상근이사 및 논설고문을 지냈으며, 95년 한양대 교수직을 정년퇴직했다.

고인은 <전환시대의 논리>를 시작으로 <우상과 이성> <분단을 넘어서> <베트남전쟁>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등 수많은 저서를 통해 냉전사고에서 벗어난 한·미관계와 한·일관계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고, 베트남전이나 중국 공산당에 대한 우편향 시각의 교정을 주장했다. 그러나 77년 편역서 <8억인과의 대화>가 중국 공산당을 미화했다는 이유로 구속돼 3년간 복역하는 등 필화가 끊이지 않았다.

사회비평가이자 사회민주주의를 토대로 한 사회운동가, 언론인이었던 그는 70~80년대 운동권 대학생과 진보세력 사이에 ‘사상의 은사’였다.

2000년 뇌졸중이 발병한 뒤 2005년 구술 자서전 <대화>를 펴낸 것을 끝으로 공식적 집필활동은 중단했으나 사회 참여와 진보적 발언은 계속했다. 단재학술상, 만해상 실천상, 후광김대중학술상, 단재언론상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윤영자 여사와 아들 건일(삼성SDS 부장)·건석(녹색병원 외과 과장), 딸 미정씨 등 2남1녀가 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이며, 발인은 8일 오전 6시 민주사회장(장례위원장 백낙청·임재경·고은)으로 치러진다.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각계 인사의 애도 속에 민주당·민주노동당·진보신당은 각각 논평을 내고 고인을 추모했다. 이춘석 민주당 대변인은 “평생 ‘야만의 역사’와 싸워오신 리영희 선생께 애도를 표한다. 세상을 바꾸지 못한 데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애도했다.

 

 

 

 

시대의 실천적 지식인 리영희 선생 별세

우리 시대 ‘실천적 지식인의 표상’이자 ‘큰 언론인’이었던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5일 별세했다. 향년 81. 지병으로 서울 중랑구 면목동 녹색병원에 입원했던 리 교수는 이날 오전 0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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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우상’을 깨고 떠나다

동서냉전과 군사독재 시절, 실천적 지식인의 표상인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5일 0시40분 지병인 간경화로 별세했다. 향년 81세. 어떤 권력에도 굴하지 않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추구했던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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