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성좌(星座)를 지상에 두고
신경림(申庚林), 1936년 4월 6일~2024년 5월 22일
고(故) 신경림 선생님을 추모하며
지상의 시(詩) 쓰기를 멈추신 선생님
‘강정마을 지키기’에 같이 한 기억의 소중함
말로만 떠드는 환경운동가들에 비판과 걱정
하늘의 큰곰~ 전갈자리서 길 잃었을 거목
마을 숲 같았던 선생님
마을 숲은 난해하지 않다.
오르기에 힘들지 않다.
산길이 문득 깊어서 ‘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 ‘고 스며들어도 길을 잃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마을 숲의 다정한 보살핌을 그리워한다.
시도 비슷한 면이 있다. 난해하지 않으나 엄하고 가지런하고 따뜻한 향기를 지닌 시들은 일종의 공공선처럼 느껴진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안온해지기도 하니 말이다.
일주일 전, 마을 숲 같으셨던 시인께서 세상을 뜨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신경림 선생님 부고였다. 선생님께서 지상의 시 쓰기를 멈추셨다고, 우리 문단의 거목이 가셨다고 지면이 일렁이는 며칠이었다. 자그마한 키와 활짝 눈이 감기는 웃음을 보여주시던 선생님은 분명 금속성보다 목질의 사람이셨으나, 거목보다 더 적합한 비유가 있을 성싶은데 떠오르지 않았다.
지난 5월22일 89세의 일기로 타계하신 시인 신경림 선생님의 장례식장 모습.
하지만 달리 표현할 말이 마땅치 않긴 했다. 그분이 걸었던 시의 공간이 어지간히 고요하고 진중하고 넓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게 남은 그분의 인상은 목계나루 주변의 마을 숲이거나 오랫동안 소탈하고 맑게 솟구쳐온 포플러 곁 우물 같은 것이다.
‘나는 요즈음 시도 한 그루 나무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은 알지만 모르는 사람은 끝내 모르고 지나간다. 그래도 시는 그 자리에 나무처럼 그냥 서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시를 쓴다./ 한때는 고통스럽던 시 쓰는 일이 이제는 즐거워졌다’
—지은이의 말. 시집 『뿔』 2002년
이 나라의 여느 시인보다 오래, 많은 시를 써오신 선생님께서는 그 숲을 떠나 어디로 가셨을까. 세상 떠나신 소식을 듣고 「조그만 사랑노래」를 찾아 읽으니 울컥하고 새삼 눈물이 솟았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셔서 섭섭한 눈물이 아니라 그 시가 너무도 아름답고 처절했다. 이제는 다들 영혼마저 이렇게나 가난한데, 왜 부자 될 길을 보이지 않고 온 사회가 더욱 비천하고 황폐해지는가 싶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그래, 선생님께서 지상에 마지막 남아계실 때 감사 인사는 드려야지.’
남루한 자를 그나마 빛나게 하는 마음가짐이 감사 아니겠는가.
강정마을 지키려하셨던 선생님
2011년 6월의 일이었다.
한국작가회의 여성인권위원장으로 강정마을 연대를 맡았던 나는 회원들을 몇 차례 제주도로 초대해 강정마을의 실상을 공유하고, 마을 분들께 힘도 실어드릴 기획을 했다. 아직 구럼비 바위가 살아있을 때였다. 중덕해안의 바람이 평화 기원패들을 평화롭게 팔랑거리던 때였다.
깊이를 짐작할 수 없도록 맑은 강정바다로 가는 첫 번 투어에 어느 어른이 가시느냐는 중요한 일이었다. 선동하고 홍보하는 일에는 명망 높은 선배들의 도움이 필요한지라 여기저기 연락했으나 대체로 거절하셨다. 전화를 걸 때마다 명망가 찾는 내 속물성에 멀미를 내며 신경림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고 쉬 수락해 주셨다. 수락하시는 순간 선생님은 내 멀미약이 되셨다. 그다음이야 어렵지 않았다.
고향이 제주라는 것 때문에 강정 관련 모든 행사에 응하셨던 현기영 선생님(얼마나 힘드셨을까)도 동행하신 제주행이었다. 우리는 공항에 대기시킨 관광버스를 타고 4.3평화공원부터 갔다가 급히 강정으로 달렸다.
구럼비 바위에서 선생님과 강정마을 어린이들이 만나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범섬 앞 바다가 옹기종기 앉은 아이들 어깨 위로 출렁거리는 곳에서 이런저런 말을 이끌어내시던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에게 이르셨다.
“이 마을과 바다를 너희 부모님들이 지키려고 애썼다는 걸 기억해라.”
환경을 위해 싸우는 싸움은 지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손 놓고 있다가 빼앗긴 것은 아니라는, 싸웠었다는 기억은 얼마나 소중한가. 아이들은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나 나는 패배의 힘을 생각했다. 그리고 뒤늦게 선생님 영전에 절했다. “강정에 함께 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선생님.”
2011년 6월 하루, 제주 강정마을의 구럼비 바위에서 아이들과 다정하게 기념사진 포즈를 취하신 신경림 선생님(왼쪽에서 4번째). 사진제공=조정 시인
환경운동의 한계 아시면서도 행동하셨던 분
돌아가신 지 사흘 되는 날, 많은 후배들이 선생님을 배웅하는 빈소에 가서 육개장에 밥 한 공기 먹고 일어섰다. 선생님은 환경운동연합의 공동대표이기도 하셨다. 근래 12년간 내가 일하는 단체의 일원이셨으니 마음이 남다르다. 그분이 비인간 만물을 헤아리는 시선에는 어떤 존중감이 작동했을까 궁금한 것이다.
1988년에 내신 민요기행을 위해, 노래를 채록하신 선생님의 테이프 서랍을 방송에서 본 적이 있다. 그냥 노래를 듣고 녹음한 것으로만 생각되지 않았다. 각 지역의 민요, 각 지역의 방언에 담긴 부족적 영성을 따라 선생님은 깊이 걸으셨을 터였다. 그 노래들을 만난 시간의 강가에서 자기 존재의 작음을 터벅터벅 되새기셨을 것도 같았다. 시원과 연결된 농경사회의 소리, 가난한 시절의 떨림을 나도 상상해 보는 것이다.
나는 그 노래들이 선생님에게 보여주었을 무심, 무명, 찰나적 실체 그리고 영원이 선생님을 환경생명운동과 묶어주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환경운동의 한계를 아시면서도, 그럼에도 하지 않을 수 없는 행동의 한 축을 붙들어주신 것이다.
환경운동연합이 발간한 동강댐 백지화를 기념하는 자료집은 선생님의 시 「흘러라 동강, 이 땅의 힘이 되어」로 시작되었다. 시 속의 염원을 귀 담아 들은 후 무엇인가를 행동해야 한다면 그것은 후배들의 몫일 밖에.
저 아름다운 비슬나무와 돌단풍산이
팔과 다리를 움츠리고 죽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
산마루에 우뚝 솟은 소나무와 굴참나무들이
독한 냄새에 콜록콜록 기침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
천년 우리의 땀과 눈물이 밴 우물가와 방앗간 터가
돌이킬 길 없는 어둠과 죽음에 묻히면 다시는
황초롱이도 비오리도 찾아와 날지 않으리라
우리들의 노래가 칙칙한 물속에
손발을 늘어뜨린 채 쓰러져 있게 해서는 안된다.
기쁨과 슬픔의 이야기들이
죽음으로 널브러져 있게 해서는 안된다
더 많은 물을 얻어 더 잘 살기 위해서라지만
따스한 동굴과 포근한 강변을 물에 묻어
천년을 함께 살아온 반딧불이와 수달이
날개를 늘어뜨리거나 어깨가 쳐져서
갈 곳 없어 비슬거리게 해서는 안 된다.
이 나라에 넘치는 땅의 향기가
갑자기 악취로 바뀌어서는 안 된다.
더 많은 것을 낳으면서 더 많은 것을 기르면서
더 많은 것을 살리면서
흘러라 동강, 이 땅의 힘이 되어서
—『동강댐 백지화 기념 자료집』 2000.
정작 우리가 근심거리였던 선생님
이 땅 사람들은 침략자 일제가 우리 땅의 혈맥에 쇠를 박아 정기를 끊었다고 분개하면서, 정작 우리 손으로 우리 땅을 끝도 없이 더럽히고 도살하는 개발을 하느라 힘을 잃어간다. 스스로 개발 광풍(狂風)이라 부르기도 한다. 멈출 기미가 안 보인다.
선생님께서는 이 아수라를 떠나 막 당도하신 그곳에서 살림을 시작하셨겠다. 큰 곰자리와 전갈자리 사이’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며 웃고 계시겠다. 거기에는 벌써 눈이 내리기 시작했을까? 아, 서러울 게 뭐 있겠나. 저 많은 시를 쓰셨으니.
내 몸이 이 세상에 머물기를 끝내는 날
나는 전속력으로 달려 나갈 테다
나를 가두었던 내 몸으로부터
어둡고 갑갑한 감옥으로부터
(중략...)
새가 되어 큰곰자리 전갈자리까지 날아올랐다가
허공에서 하얗게 은가루로 흩날릴 테다
나는 서러워하지 않을 테야
—「눈」 일부. 시집 『낙타』 2008.
다만 시보다 더 걱정스러웠던 환경, 환경운동가들을 바라보며 내셨던 역정이 아직 남아있으실까? 우리가 선생님의 근심이었다. 선생님은 이 지구별의 사람들이 아기를 낳고 숲을 가꾸며 지속해서 살아가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인간 편의에 부합하는 존재로서 환경을 해석하는 수많은 사례들에 대해 선생님의 못마땅함이 어떠했는지를 ‘환경허무주의자’라는 표현이 말갛게 드러내 보여준다. 복잡하고 신비로운 유기체인 우주 안에서 우리가 어떤 존중감을 품고 만물을 대해야 하는지, 저 멀고도 다정한 별자리의 신경림 선생님께서는 아실 것 같다.
‘조금은 불편을 감수하면서 덜 먹고 덜 쓰는 것이다. 누릴 수 있는 편리는 다 누리고 실컷 먹고 마시며, 머리에 띠나 두르고 목소리나 높이는 환경운동가를 나는 신용하지 않는다. 남편과 마누라와 자식이 각각 차를 가지고 종일 돌아다니며 대기를 오염시키고, 점심은 아무리 바빠도 교외로 나가 가든이라는 데서 배 터지게 먹어제켜 음식찌꺼기로 강물을 더럽히고, 대문 앞에는 매일 쓰레기를 산더미처럼 내놓는 소위 환경허무주의적 환경운동가가 과연 우리 주위에 없는가. 환경은 우리들 하나하나가 근검절약하는 자세로 살지 않고는 보호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제언」 환경운동연합 회보 『월간 함께 사는 길』 1997년 11월
—조정 시인
「농무」 「가난한 사랑노래」 쓴 문단 거목 신경림 시인 별세
신경림(申庚林), 1936년 4월 6일~2024년 5월 22일 못 가져 서러운 이들의 한과 신명을 정감 있게 그려 사랑받은 『농무(農舞)』의 시인 신경림 씨가 22일 오전 8시 경기도 고양시 국립암센터에서 지병
maggot.prhouse.net
신경림 성좌(星座)를 지상에 두고 - 더칼럼니스트
마을 숲 같았던 선생님마을 숲은 난해하지 않다.오르기에 힘들지 않다.산길이 문득 깊어서 ‘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고 스며들어도 길을 잃지 않는다.많은 사람들이 마을 숲의 다정한 보살
www.thecolumnist.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