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굴 진상규명 이끈 마임순 전 회장 별세 향년 73세
마임순, ~ 2025년 9월 16일, 향년 73세

어둠 속에서 빛을 판 사람 — 마임순 회장을 기억하며
그녀는 평생 삽을 들고 어둠 속으로 내려갔다.
거짓이라 불린 역사의 땅을 파서, 진실의 조각을 하나씩 들어 올렸다.
그 이름, 마임순.
금정굴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운동의 얼굴이자, 한 세대의 고통을 증언한 사람.
그가 2025년 9월 16일, 일산백병원에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3세였다.
그의 인생은 처음부터 ‘빨갱이 시댁 며느리’라는 낙인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그는 그 이름 아래 숨지 않았다.
오히려 그 낙인 속에서 삶의 방향을 찾아냈다.
억울하게 죽은 시댁의 사람들을 위해, ‘국가의 거짓’을 밝히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고양 금정굴 사건은 한국전쟁이 남긴 가장 깊은 상처 중 하나다.
1950년 10월, 남편의 가족 다섯 명이 경찰에 끌려가 금정굴에서 희생됐다.
인민군 점령기, 작은아버지가 민청위원장이었다는 이유였다.
그때 다섯 살이던 남편만이 살아남았다.
그 집안의 슬픔은 한 세대의 운명이 되었고, 그녀는 그 운명을 이어받은 사람이었다.
연좌제의 그림자는 길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이유 없이 눈총을 받았고, 남편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유족이라면 누구나 ‘국가 앞에 죄인’이었다.
그 억울함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데는 수십 년이 걸렸다.
그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마임순이라는 이름이었다.
“우리가 아니면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그녀는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1993년, 고양금정굴유족회를 세웠다.
그날 이후 그는 ‘가정의 며느리’가 아니라 ‘역사의 사람’이 되었다.
1995년 여름, 가족들이 돈을 모아 직접 삽을 들었다.
누가 봐주지 않았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말했다.
“거짓말이라는 말이 듣기 싫어, 증거를 보여주자고 삽을 들었다.”
그 땅 속에서 쏟아져 나온 건 탄피, 깨진 유골, 낡은 신발, 녹슨 바가지였다.
그것은 단지 한 집안의 비극이 아니라, 국가가 외면한 사람들의 증거였다.
그날의 발굴은 금정굴의 진실을 세상 위로 끌어올린 첫 걸음이었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 사건을 ‘국가의 불법적 폭력’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2011년, 유족회는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승소했다.
“국가는 불법행위의 책임을 지고 유족들에게 배상하라.”
판결문 속의 문장은 냉정했지만, 그 안엔 수십 년의 눈물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끔찍했던 비극과 상처를 다음 세대로 넘기지 말고, 우리 대에서 끝내자는 마음으로 20년 동안 매달렸다.”
그녀는 싸움을 했지만, 증오하지 않았다.
진실을 밝히는 일은 복수가 아니라 회복이었다.
그녀가 끝내 이루고 싶어 했던 것은 유해의 안정된 안치, 그리고 역사평화공원의 완성이었다.
그러나 그 길은 아직 다 닿지 못했다.
그녀가 떠난 자리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가 남았다.
하지만 그녀의 생은 증명했다.
한 사람의 용기가, 국가가 만든 침묵보다 더 오래 남을 수 있다는 것을.
삽을 든 손으로 어둠을 파내고, 빛을 꺼낸 사람.
그 이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마임순.
그녀의 생은 끝났지만, 그녀가 드러낸 진실은 여전히 살아 있다.
빨갱이 낙인 무서워 아무도 유해 근처에 안가려 해, 유족회장 마임순씨
2011년 9월 24일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설문동의 봉안시설 청아공원에 들어선 마임순(64) 고양금정굴유족회 회장은 흐르는 눈물을 가누지 못했다. 가슴속에서는 ‘그동안 헛고생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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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굴 진상규명' 이끈 마임순 전 회장 별세 - 고양신문
[고양신문] 금정굴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운동을 이끈 마임순 고양금정굴유족회 전 회장이 지난 16일 폐렴으로 일산백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3세. 고인은 30여 년 동안 고양의 현대사에서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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