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철 시인이시여, 분노와 핏대 없는 그곳에서 영원히 안식하시라
박남철(朴南喆), 1953년 11월 23일 ~ 2014년 12월 6일
박남철 시인과의 짧은 인연
6년 전 어느 초가을날 지성찬 시조시인과 함께 박남철 시인을 처음 만났다. 그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민경환 시인과 같이 안성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식당을 공동운영(적어도 형식적으로는)하고 있었다. 마을의 한 식당에서 술을 마셨고 다른 테이블의 손님과 시비가 붙었으며 그 시비는 고래심줄처럼 끈질기게 이어졌다. 여차하면 몸싸움이라도 벌어질 일촉즉발의 험악한 분위기였다. 물론 처음엔 뜯어말렸으나 상대편의 기세도 만만찮아 만약 집단패싸움으로 번질 경우 나도 거들기 위해 예비동작까지 머릿속에 그려 넣고 있었다. 다행히 마침 경찰이 출동하는 바람에 구체적인 몸싸움까지 가진 않았지만 덕택에 밤새 통음으로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2009년 공광규 시인이 윤동주 문학상 받을 때 뒤풀이에서 한 번 더 만났으며, 2010년 여름 대구에서 그의 고향 친구이자 나의 친구이기도 한 김아무개와 함께 팔공산에서 술을 마신 게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나 같은 문단 말석에도 끼지 못하는 시인으로서는 문단의 ‘대단한’ 사람을 친구로 둔다는 게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그 후 두어 번 전화 통화만 하고 잠시 페북에서 조우했을 뿐 수시로 안부를 묻는 관계까지 발전하진 못했다. 그는 내게 비교적 친절했고 무례하지도 않았지만 나로선 부담스러운 존재이기만 했다. 술김에 서로 친구 먹자고 그랬음에도(물론 중간에 다른 친구 하나가 끼어서 그랬겠지만) 나는 여전히 그를 기피인물로 생각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런 인연으로 그의 시집을 받고, 당시 내가 관여하는 한 문예지에 주제넘게 시집 『제1분』의 평설을 쓴 일도 있다. 갑작스런 그의 부음을 접하고 그와 나눈 이런저런 이야기가 스쳐 지나갔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그의 아들 ‘해미르’도 생각났다. 나란 인간이 원래 무심하고 주변머리가 없긴 하지만 지금에서야 생전에 왜 좀 살갑게 안부 전화라도 못했을까 후회가 된다. 「제1분」의 마지막 연은 이렇게 끝난다. ‘지금까지도 신용불량자인 나는, 눈시울이 흘러내릴 듯한, 삶의 희망을 얻어낼 수가 있었다. 붓다께서도, 이렇게, 평생을 제자의 앞장을 서셔서 유리걸식을 하셨는데, 내가, 이 내가, 겨우, 나의 이따위 호화판 현실, 을 비관만 하고 있을 수는 도저히 없었던 것이다.’ 박남철 시인이시여, 이제 천상의 인간이 되어 비판과 비관, 분노와 핏대 없는 그곳에서 영원히 안식하시라.
—권순진
박남철 시인, 영면에 들다
박남철(朴南喆), 1953년 11월 23일 ~ 2014년 12월 6일 박남철 시인, 영면에 들다—문계봉 시인한 시대를 다소 거칠고 위악적인 모습으로(친한 지인은 격정적이라고 표현하겠지만...) 통과해 온 시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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