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팬지의 친구이자 영장류학자, 제인 구달 향년 91세로 별세
제인 구달(Valerie Jane Morris-Goodall), 1934년 4월 3일 ~ 2025년 10월 1일 (91세)
그녀는 전 세계적 명성을 통해 줄어드는 침팬지 개체와 환경 파괴의 위험을 세상에 알렸다.
제인 구달은 과학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고, 대학 학위도 없었다. 23세 때 친구를 만나기 위해 케냐로 갈 돈을 모았을 뿐이었다. 그녀는 런던에서 비서로 일했고, 때로는 웨이트리스로 일했다. 어린 시절 읽은 『닥터 두리틀』과 『타잔』 소설 속 아프리카와 동물에 대한 낭만적 상상으로 마음이 들떠 있던 젊은 여성이었다.
그러던 중 나이로비에서 세계적인 고인류학자 루이스 리키를 만나면서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 만남은 그녀를 세계 최고의 영장류학자로 만드는 길로 이끌었다. 그녀가 관찰한 침팬지의 행동―도구를 만들고, 사냥을 하고, 싸우는 모습―은 인간과 동물의 경계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뒤흔들었다.
제인 구달은 2025년 10월 1일,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죽음은 제인 구달 연구소에 의해 발표되었으며,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강연 중이었다. 자세한 사인은 즉시 공개되지 않았다.
50년이 넘는 경력 동안, 구달은 침팬지 개체의 감소와 더불어 지구 환경 파괴의 심각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자신의 명성을 사용했다.
루이스 리키는 제인 구달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관찰력과 인내심을 알아봤다. 그는 케냐 나이로비 국립박물관의 큐레이터였고, 인간의 기원을 밝히는 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리키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인 침팬지를 연구하면, 인간의 진화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구달이 학문적 배경은 없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선입견 없이 관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60년, 구달은 루이스 리키의 지원으로 당시 탕가니카(지금의 탄자니아) 곰베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그녀는 침팬지를 가까이서 관찰하기 위해 숲속의 언덕에 텐트를 치고 홀로 지냈다.
그녀의 첫 연구 대상은 ‘데이비드 그레이비어드(David Greybeard)’라는 이름의 수컷 침팬지였다. 이 침팬지가 풀대를 이용해 흰개미를 잡아먹는 장면을 목격한 것은, 구달의 연구뿐 아니라 인간학 전체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때까지 과학계는 오직 인간만이 ‘도구를 만드는 존재’라고 믿고 있었다. 이 발견이 알려지자, 루이스 리키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정의를 다시 써야 한다. 인간의 도구 사용의 의미를 재고해야 한다. 아니면, 침팬지를 인간이라 불러야 한다.”
곧이어 구달은 침팬지가 사냥을 하고, 영역을 두고 싸우며, 복잡한 사회 구조 속에서 감정과 유대를 나누는 모습을 세밀하게 관찰했다. 그녀는 각 개체에 번호 대신 이름을 붙였다. 플로, 피건, 거피 등으로 불렀고, 그들의 행동을 일기처럼 기록했다. 이 방식은 냉정한 객관성을 중시하던 당시 과학계에서 비판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생명과 감정을 연구하는 새로운 접근으로 인정받았다.
구달의 연구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다시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단순한 과학자가 아니라, 인간과 동물이 공유하는 감정과 윤리를 증명하려는 사색가였다.
침팬지에 관한 발견이 국제적 관심을 받으면서, 제인 구달은 곰베에서의 연구자에서 세계적 인물이 되었다. 그녀의 초기 연구는 1965년 내셔널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 Miss Goodall and the Wild Chimpanzees를 통해 대중에게 알려졌다. 화면 속의 젊은 여성은 숲속 언덕에 앉아 조용히 노트를 적고 있었고, 침팬지는 그녀 주변을 자연스럽게 오갔다. 이 영상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인간의 거울처럼 닮았지만, 동시에 완전히 다른 존재들의 세계였다.
시간이 흐르며 구달의 관심은 점차 ‘관찰’에서 ‘보호’로 옮겨갔다. 그녀는 아프리카 전역에서 서식지 파괴와 밀렵으로 침팬지 개체가 빠르게 줄어드는 현실을 목격했다. 1990년대 초, 구달은 실험실과 서커스에 갇힌 침팬지를 해방하기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그리고 제인 구달 연구소를 중심으로 환경 보호 활동과 청년 교육 프로그램 Roots & Shoots를 시작했다.
그녀는 세계 각지를 돌며 강연했고, 정부와 기업, 학교에서 환경의 윤리에 대해 말했다. 언제나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말에는 단단한 힘이 있었다. 그녀는 “희망은 행동에서 나온다”는 문장을 자주 반복했다. 지구가 파괴되고 있다는 절망적인 사실을 직시하면서도, 인간의 선한 의지를 믿었다.
제인 구달은 환경운동가로서 명성이 높았지만, 그 본질은 여전히 관찰자였다. 그녀는 인간의 파괴적인 본성을 비판하면서도, 인간 속에 있는 공감의 가능성을 발견하려 했다.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문명의 시작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제인 구달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해마다 300회 가까운 강연을 다니며, 침팬지와 지구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종이컵은 사용하지 않았고, 호텔 방에서도 물을 아꼈다. 그녀의 일정표는 빽빽했지만,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2002년, 유엔은 그녀를 ‘평화의 메신저’로 임명했다. 그녀는 그 칭호를 상징처럼 여기지 않았다.
그녀에게 평화란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한 생명 앞에서 멈추어 서는 마음이었다.
구달은 여러 차례 자서전과 과학서를 썼다. 그중 『희망의 이유』(Reason for Hope)는 그녀가 직접 쓴 내면의 기록으로, 과학자이자 신앙인,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고백이 담겨 있다. 그녀는 인류의 위기를 경고하면서도 절망하지 않았다. “우리가 여전히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이유는, 생각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20년대에 들어서도 그녀는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자신이 시작한 Roots & Shoots 프로그램의 정신을 이어가길 바랐다. 그녀의 마지막 공개 발언 중 하나는 짧고 명료했다. “나는 여전히 믿는다. 인간은 변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나아갈 수 있다.”
죽음 이후에도 그녀의 이름은 단순히 과학의 영역을 넘어, 인간이 다른 생명과 맺을 수 있는 관계의 가능성을 상징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