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령 비전향 장기수 신현칠 선생을 보내며

신현칠 선생 약력
• 1917년 서울 출생.
• 20세쯤에 마르크스주의에 입문하고, 1938년 일본 동경 유학.
• 이 무렵 신건(申建)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소설대표작집’ 출간.
• 1942년 일본 치안유지법으로 피검되어 1년간 구금.
• 해방공간에서 경제잡지 ‘조선경제’ 발간에 참가.
• 남로당에 참가해 ‘국제평론’, ‘조선산업노동조사시보’ 등 당 외곽기관 잡지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 전쟁 후 북에서 문화선정성에 소속했으며, ‘자강도민인보’ 논설기자로도 잠시 있었음.
• 남파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 1962년 봄 10년 형기를 마치고 석방.
• 그러나 사회안전법이 제정되면서 1975년에 다시 투옥되고 1988년 이 법이 폐지되면서 72세에 비전향으로 출옥.
• 석방된 뒤 시국 관련 논문 발표.
• 1996년 뇌졸중으로 대외활동 중단.
• 자전적 수기 ‘사각지대에서’ 집필.
• 2000년 비전향장기수 송환 때 분단의 아픔을 남쪽의 민중과 함께 한다는 뜻으로 남쪽에 남는 길을 택함.
• 저서로는 편역서 ‘조선소설대표작집’(1940, 일본 敎材社), 옥중 시조집 ‘필부(匹夫)의 상(像)’(2002, 개마서원), 시집 ‘흐르지 않고 고인 물이’(2002, 개마서원) 등이 있음.
1990년 어느 모임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한 장기수와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인연으로 노촌 이구영의 이문학회를 드나들며 선생의 <논어> 강독을 들었다. 선생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걸 알면서도 한다’(知其不可而爲之)는 공자의 이상주의가, 칸트의 ‘너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마땅히 할 일이기 때문이다’를 넘어서는 것이라 했다. 그렇게 나는 이룰 수 없음을 알면서도 이상을 향해 자강불식해 온 선생의 삶에 조금씩 다가가게 되었다.
“내 비전향은 뉘우침에서 비롯됐어요.”
1938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된 뒤 선생은 진로 고민 끝에 일제에 일시적인 투항을 했다. 그때의 슬픔이 비전향의 자산이 되었다. 75년 사회안전법으로 다시 구속됐을 때 오히려 구원처럼 느껴졌던 것도, 무위의 시간이 주는 고뇌가 구금의 고통보다 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99년 남북 해빙 분위기에서 비전향 장기수 북한 송환이 논의되었다. 북에 가면 생활고가 해결되니 저술을 향한 필생의 꿈을 이뤄보라는 주위의 간곡한 권유도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남쪽에 남는 길을 선택했다. 이유를 묻자 “남쪽에 남아 분단의 아픔을 함께 하고 싶은 소박한 소망에서”라고 담담히 답했다.
그러나 나는 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진실이 있다는 것을 안다. 언젠가 선생은 “생각은 같아도 심장은 다르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폭력과 감금뿐만 아니라, 환대와 영광으로도 훼손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존엄함을 보았다.
스승의 진면목을 본 것은 그때부터였다. 선생은 뇌출혈 후유증으로 떨리는 손으로 <사각지대에서>를 집필했다. 돌에 전각을 새기듯 원고지에 글을 쓰셨다. 형기를 마친 양심수들을 ‘내심’만을 문제 삼아 헌법에 명시된 사법절차도 없이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수감했던, 사회안전법의 탄생과 죽음을 증언한 기록이었다. 선생은 이 글에서 “사람의 행위를 벌하는 범위를 넘어서 내심을 벌하는 것은 역사 이래로 어떠한 통치자도 성공해 본 일이 없다”라고 말한다. 또 전향을 권유하러 찾아온 검사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지금 양심의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지만, 그 자유 가운데는 나의 자유뿐만 아니라 당신 자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까지도 선생은 새 논문을 구상하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이번 총선 때도 개표방송을 지켜보느라 새벽에야 눈을 붙였다. 그러던 선생은 며칠 전 스스로 곡기를 끊고 96살의 일기로 영면하셨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역사는 남쪽에 남아 고난을 감내하며 사회안전법의 시대를 기록한 선생의 삶을 보다 의미 있게 조명하지 않을까.
—박소연/소설가
병마에도 사회안전법 허위 고발 ‘열정’
1990년 어느 모임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한 장기수와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현칠(사진) 선생이었다. 그 인연으로 노촌 이구영의 이문학회를 드나들며 선생의 <논어> 강독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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