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한 곳으로 돌아감 -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
미리 쓰는 부고(訃告)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
‘미리 보내는 부고장’을, 그것도 나 자신의 것을 나 스스로 쓰자니, 손이 떨린다. 컴퓨터 자판기에 얼핏 손이 나가지 않는다. 초등학교 이후로 다니던 각급 학교에서 시험지 받아든 순간이 이 지경이었다면, 오직 낙제만 거듭했을 것은 뻔하다.
만만치 않는 머뭇댐을 간신히 가라앉힌 끝에 겨우, 쓰게 되는 게 이 부고장임을 우선 강조해두고 싶다. 일찍이 무슨 일에 손대게 되면서 이토록 미적댄 적은 있었던 것 같지 않다. 한데 막상, 첫 글자를 쓰게 되면서 그 머뭇댐이 겁먹은 것이나 질린 것만은 아니기를 스스로 다짐 두고 싶어졌다. 뭔가 뜻깊고 보람된 것이 되기를 바라고 싶어지기도 했다.
예로부터 죽음을 두고는 ‘돌아간다’고 했다. 그것은 으레 가야 할 곳으로 간다는 뜻이다. 그나마 원천으로, 으뜸으로 회귀한다는 뜻이다. 부고의 부는 한자로 ‘訃’라고 쓴다. 보다시피 ‘말씀 언’(言)에 ‘卜’자가 붙어 있는데, 복이라고 읽는 이 卜은 ‘급히 가다’는 뜻을 갖추고 있다. 한자 사전에서는 卜이 赴와 같은 뜻이라고 돼 있다. ‘부임(赴任)하다’는 그 赴는 ‘워낙 간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부고는 떠나감을 알리는 것이 될 테지만, 이것으로 그칠 수는 없다. 그것은 赴가, 다름 아니라 ‘부고 부’라고 읽히는 한편으로 ‘이를 부’라고도 읽히기 때문이다. 목적한 곳에 가고, 도착하고 이르게 되는 것이 곧 赴다. 그래서 우리말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돌아간다’와 한자에서 죽음을 알리는 부고의 赴는 서로 뜻이 통하게 된다. 赴는 이르러서 마땅한 곳에 이르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돌아간다’는 것은 떠나온 원천으로 복귀함을 의미한다. 타향에 머물다가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하고 있다. 그래서 ‘돌아감’은 가서 마땅한 곳으로 가는 것이다. 귀향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죽음을 의미하는 돌아감은 모처럼 방학을 맞아서 제 고향으로, 제 집으로 돌아가듯 해야 하는 것이다. 한데 기왕 떠나온 것이면, 돌아가기 전에 해서 마땅할 일, 어김없이 치르고 마치고 해야 할 일을 마무리지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어야 한다. 과일이 늦가을이 들어서 익을 대로 익고서야 비로소 낙과, 이를테면 과일 떨어짐을 하는 것을 닮아야 한다. 주어진 일, 해서 마땅한 일들을 보람차게, 뜻깊게 마무리지어야 할 것이다.
그러자면,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지는 그만큼, 미리 기획하고 노리고 벼르고 한 일들에 마지막으로 최대한의 정열을 바쳐야 한다. 인생의 최후 일전의 결말이 죽음이 되게 해야 한다.
여기까지 쓰고서도 내가 거둔 유종의 미를 굳이 가려가며 낱낱이 말하기가 쉽지 않다. 지금은 부고는 돌아갈 곳으로 돌아감을 통지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유종의 미’로 인생을 마무리짓게 됨을 알리는 통지서가 되기도 해야 할 것이라는 뜻을 밝히는 데서 그치련다.
남이 쓰는 부고 대신 자신이 미리 써서 삶과 사랑을 기록하기
이것은 너무 늦게 도착한 부고다. “내 아내는 우리나라의 큰 성씨인 안동 김 씨이다. 향년 22살. 그중 8년을 나와 함께 살았다. …아아! 당신처럼 현숙한 사람이 중간의 수명도 누리지 못하고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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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_
한겨레21 특집으로 2013년 1월 31일 ‘미리 쓰는 부고(訃告)’에 쓴 글이다.
김열규 교수는 얼마후 2013년 10월 22일 돌아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