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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부고사이트를 위한 메모

남이 쓰는 부고 대신 자신이 미리 써서 삶과 사랑을 기록하기




 



이것은 너무 늦게 도착한 부고다. “내 아내는 우리나라의 큰 성씨인 안동 김 씨이다. 향년 22살. 그중 8년을 나와 함께 살았다. …아아! 당신처럼 현숙한 사람이 중간의 수명도 누리지 못하고 아들도 두지 못했으니, 천도라는 것이 과연 있는지 믿기 어렵다. 곤궁하던 시절에 나는 당신과 마주 앉아 작은 등불을 켜서 밤을 밝히며 책을 읽었다. 그러다 내가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울 것 같으면 당신은 그때마다 농담처럼 이렇게 말했다. ‘게으름 부리시면 제 부인첩이 그만큼 늦어집니다.’ 그때야 어찌 알았겠는가. 18년 뒤에 이 부질없는 문서 한 장을 당신의 영전에 바치게 될 줄을! 그 영예를 누릴 사람은 조강지처 당신이 아니니. 당신이 이일을 안다면 필시 한숨 쉬며 서글퍼할 테지. 아아, 슬프다!” 허균은 아내가 죽고 18년이 지나서야 ‘숙부인 김 씨 행장’을 적으며 몇 번이고 애통해했다.

 

반대로 너무 이른 부고도 있다. 2003년 미국 방송 ‘CNN’ 웹사이트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코미디언 밥 호프, 딕 체니 부통령, 피델 카스트로 등 7명의 유명인 부고를 게재했다가 급히 내린 일이 있었다. 언론사의 관행대로 유명 인사의 부고 기사를 미리 써놓았다가 실수로 노출한 것이다.

 

부고는 때를 타기 마련인데, 때맞춘 부고란 어떤 것일까? 옛사람은 살아 있을 때 자신의 무덤에 묻을 묘지명을 미리 써두었는데 이것을 ‘생지’라 불렀다. 일찍 쓰인 부고는 “느긋하고 편안하게 내 명대로 살았으니 맑은 시절에 얼마나 다행이냐 만전옹아”(홍가신 ‘자명’)라며 자족하기도 하고, “결정해야 할 기로에서 우물쭈물하고만 말았을 뿐 끝내 자신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고 말았다”(이식 ‘택구거사 자서’)며 한탄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다른 사람이 쓴 글의 과장됨보다는 내가 한 말의 미더움을 취하는 것이 낫다”(권섭 ‘자술묘명’)는 생각은 한 가지다.

 

지난해 미국 ‘ABC’은 미리 자신의 부고를 써두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보도했다.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전하고 남아 있는 이에 대한 사랑은 물론 숨겨왔던 잘못까지 고백하는 사람이다. 미국에 실린 부고 기사에 등장한 사람의 이야기를 엮어낸 책도 출간됐다. 책에 따르면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사람 사이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 기사를 미리 써두는 것이 유행이라고 한다. 대지진 이후 멀리 있던 죽음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것이 되었다. 일본 사람은 보통 온천을 찾아 쉬며 자신의 유서나 이력서를 만든다. 가족관계, 평소 삶의 철학이나 관심을 미리 기록하고 건강한 죽음을 주변 사람에게 아름답게 전하자는 의미란다.

 

죽음을 헤아리면 도리어 남은 삶이 길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경험을 거친 이들이라면 삶의 기쁨과 슬픔을 매 순간 헛되이 쓰지는 않을 터. 철학교사 안광복 씨,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 김옥랑 동숭아트센터 대표가 세상과 자신을 위해 쓴 ‘자찬묘비명’을 보내왔다. 부고를 적어보기로 약속했지만 글로 맺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어쨌거나 “오는 곳 징험하고 가는 곳 따져도 갑작스레 답을 얻지 못한다”는 선사의 가르침대로 미리 천천히 짚어본 길이다.

 

 

미리 쓰는 부고(訃告)

남이 쓰는 부고 대신 자신이 미리 써서 삶과 사랑 기록하는 이들옛 사람들은 ‘생지’를 썼고, 대지진 뒤 일본에서도 유행

h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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