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같다면 그것은 김점선이 아니다
김점선 1주기 추모식
너무나 보고 싶은 사람
어린아이 같은 솔직함과 아름다운 그림, 파격적 언행으로 화제를 몰고 다닌 화가 김점선.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1년이 되었다. 꼭 1주기를 맞는 3월 20일, 하루 종일 싯누런 황사와 비구름으로 잔뜩 하늘이 흐렸다. 해를 보고 행복해하던 김점선이 보았더라면 버럭 소리라도 질렀을 성싶다. “그지같이! 해가 왜 하나밖에 없어!”
김점선을 생각하는 사람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남산 ‘문학의 집 서울’로 모여들었다. ‘김점선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가칭)’을 중심으로 유가족과 그녀를 아끼던 주변 사람들이 함께한 자리였다. 문화·예술계는 물론 학계와 종교계까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한데 모였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들의 중심에는 ‘인간 김점선’이 있었다.
김점선은 감성의 미세한 결을 누구보다 잘 감지하고 지켜내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감정 선을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 다른 예술 분야의 섬세한 결도 인정하고 공감했다. 억지스러운 것, 꾸며대는 것, 으스대는 것을 절대로 참지 못했지만, 속마음을 열어놓는 솔직하고 깊이 있는 교류는 누구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날 ‘화가 김점선 1주기 추모의 밤’에는 그가 인생의 큰 선배로 모셨던 소설가 박완서를 비롯해 역사학자 이이화, 언론인 윤호미, 피아니스트 신수정, 화가 동료인 신수희·이두식, 오랜 지인인 정필순 경원대 교수, 배우 윤여정, 연극평론가 김방옥, 국문학자 정민, 사진작가 김중만, 작가 이근미, 동화작가 김진 등 40여 명이 참석했다. 김점선이 ‘언니’로 여기며 오래 가깝게 지냈던 이해인 수녀는 ‘김점선의 1주기에 부치는 편지’라는 시를 보내왔다. 자신도 암과 싸우고 있는 이해인 수녀는 구절구절마다 친구를 잃은 절절함을 담았다.
“내 치맛자락 꼭 붙들고 천당 가겠다더니
그렇게 먼저 가면 어떡해요
하늘나라에서도 꼭 한 반 하자 했으니
내가 도착할 그때까지 부디 잘 지내길 바랍니다.”
피아니스트 신수정은 슈만의 <환상소곡집 Op.12> 중 3번 ‘어째서?’(Warum)를 연주했다. 그가 기억하는 김점선은 연주회장에 와서도 막상 연주는 안 듣고 로비에 앉아 친구를 기다려주던 모습이었다. 신수정이 모차르트 연주회 시리즈를 진행할 때였다. 어떤 모임에서도 초저녁이면 집에 돌아가던 김점선이지만, 공연 후 탈진한 신수정의 기운을 북돋워주기 위해 밤늦게까지 극장을 지켰다. 신수정은 “아까운 사람을 어째서 이렇게 빨리 데리고 가셨는지 모르겠다는 안타까움에 이 곡을 골랐다”라고 소개했다, 역사학자 이이화는 김점선이 구리시 아천리에 살 때 한 동네서 가깝게 지냈던 인연을 떠올렸다. “80년대 중반 김 화백의 말 그림을 보고 독특한 구성에 끌려서 자주 어울렸는데, 술을 마시지도 않으면서 술을 마신 것처럼 떠들었고, 자잘한 예의나 체면 따위는 벗어던진 사람이었죠.”
레게머리를 하고 나타난 사진가 김중만은 김점선과 함께 사진-그림전을 열었던 일을 소개했다. 그는 김점선을 줄곧 누나라고 부르며 ‘김점선 아트스쿨’의 진행사항을 전했다. 캄보디아 어린이들의 사진을 찍고 있는 김중만은 사진전 수익금을 전액 캄보디아에 미술학교를 짓는데 기부했다. 그리고 그 학교를 김점선미술학교로 명명하고 김점선에게 헌정하겠다고 밝혔다.
추모의 밤은 외아들 김상욱이 유족 대표 인사를 하는 것으로 끝났다. 김상욱은 어머니를 연상케 하는 뚝뚝 끊는 말씨와 직선적인 화법으로 이날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친척들에게 들었습니다. 저런 특이한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어떻게 아이가 잘 자릴 수 있을까 다들 걱정했다고 해요. 워낙 특이한 아빠 엄마이긴 했죠.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그렇고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인사를 제대로 못 드린 것 같습니다. 제가 인사드리고 그러는 걸 보고 배우지 못하고 자라서 그렇습니다. (좌중 모두 웃음) 기억해주시고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점선은 사람을 대할 때 계산을 하거나 선을 긋지 않고 누구든 있는 그대로 넉넉하게 품어주었다. 거칠고 무심한 듯 보였지만 꾸밈없고 순수했다. 처음에 당황하던 사람들도 그녀의 매력에 이내 빠져들었다. 거침없는 입담은 듣는 사람에게 해방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김점선은 사람 안에는 누구든 멋있는 게 다 들어 있다며 저마다의 감정과 섬세한 떨림을 느끼고 이해했다. 그래서 “각자의 삶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예술”이라고 말했다. 가수 조영남은 김점선을 좋아하는 이유로 “나보다 30배는 더 괴짜이기 때문에 옆에 있으면 내가 정상으로 어필되기 때문”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김점선 화가는 그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웃었다.
남과 같다면 그것은 김점선이 아니다
김점선이 걸어온 자취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이화여대 교육공학과를 나온 그는 실험영화그룹 카이두의 일원으로 행위예술, 실험영화에 관심을 두는 한편 독학으로 다진 영어를 바탕으로 미국대사관 통역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죽겠다는 친구와 함께 죽어주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림은 한 번 그려보고 죽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물론 친구는 ‘혼자라서’ 그 결심을 실행하지 못했다.) 몇 달 동안 정말 죽을 것처럼 열심히 그림을 그렸고, 홍익대 대학원에 입학했다. 1972년 제1회 앙데팡당 전에서 파리 비엔날레 출품 후보에 선정되며 화려하게 등단한 그는 이후 자유롭고 파격적인 그림으로 주목받았다. 1983년 첫 전시회를 연 뒤 20년 이상 60여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고, 어깨통증으로 붓을 잡기 어려워진 뒤에는 컴퓨터를 배워 디지털 그림에 뛰어들었다. KBS-TV ‘문화지대’에서 독특한 관점으로 예술가 인터뷰를 진행하는 한편, 개성 있는 문체로 에세이와 칼럼, 동화책을 썼다. 암 투병 중에도 그림책, 동화책을 포함 8권의 책을 출간하는 열정을 보였다.
참 치열하게 살았다. 김점선에게는 치열하게 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힘과 에너지가 있었다. 그것은 훈장과도 같은 특성이었다. 캔버스 가득 과감하게 클로즈업한 오리와 말, 꽃 등은 미술을 잘 모르는 대중들에게도 ‘김점선 브랜드’로 각인되었다. 화가가 왜 커피잔 그림을 그리고 가방, 티셔츠에 그림을 내놓느냐고 쑥덕거리는 화단의 뒷공론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물과 공기처럼 자유롭게 미술 작품을 즐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 칼럼에서는 “디지털 판화 1억 장을 비처럼 뿌리겠다”라고 쓰기도 했다. 이처럼 규격화되지 않은 자유로운 철학과 삶 덕분에 그녀에게는 늘 ‘괴짜 화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곤 했다. 그는 언제나 자기 머리를 스스로 잘랐다. 앞머리와 옆머리는 짧게 잘라 손으로 헝클어뜨렸다.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과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입던 옷이 너무도 많다며 새 옷도 사 입지 않았다. 작업복처럼 아무렇게나 걸친 검정 점퍼, 농구화 차림으로 다녔다. 김점선은 대등하게 사랑하고 결혼해도 여자들이 임신과 육아로 쉬거나 탈락하는 것이 두려워 일부러 헝클어뜨린 차림을 고수했다고 고백했다.
“하루는 남편이 친구를 데려온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직접 가위를 들고 머리카락을 모두 잘랐어. 못난 얼굴 더 못나게 만들어서 마누라 자랑을 못하게 해야겠구나. 내가 아름답게 분칠하고 파티 가고 자랑하고 다니면 예술할 시간이 어디 있냐? 예술가는 절대고독이 필요해. 절체절명의 혼자 있는 시간! 결혼해서 예술하는 시간이 있겠냐? 악독해야 해. 악독하지 않으면 예술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 그림을 10시간 그리려면 생각을 맑게 조용하게 한 뒤 그리고 싶어지면 그리는 거야. 일상적인 사교나 외교적인 생활은 다 포기해야 해.”
김점선은 그녀가 그린 말처럼 열심히 달렸다. 곁눈질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열심히 달리는 그녀를 보고 오리처럼 우스꽝스럽게 뒤뚱거린다고 했다. 말이 오리로 불리는데도 김점선은 개의치 않았다.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림은 함께 보고 즐기는 것, 암보다 무서운 것은 그림의 상업화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김점선은 2007년 난소암 판정을 받있다. 암 선고를 받을 때도 일상적인 이야기를 들을 때처럼 담담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울거나 억울해하지 않았다.
“검사 결과 나오잖아. 의사가 암이에요, 그래서 내가 당뇨는요 그랬지. 의사가 아니에요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당뇨가 아니라 다행이네, 그랬어. 내 생각에 암은 몇 년 고생하기는 해도 그냥 뜯어내면 될 것 같은데 당뇨는 평생 간대서 무서웠지.”
암이라서 죽는다는 생각은 안 하고 당뇨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암에 걸리니 대학에 들어간 것처럼 모든 것이 새롭고 다시 배우게 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암을 ‘앎’이라고 불렀다. 예전에는 약속시간에 늦으면 건방지다거나 까칠하다고 욕을 먹었는데 이제는 ‘그래, 너는 암에 걸렸으니까’ 하고 이해해 주는 것도 큰 혜택이라고. 그녀의 마지막 에세이집 <점선뎐>은 죽음을 직면하고 쓴 자서전이다. 그 책에서 김점선은 “암은 병균이 감염된 게 아니다. 내 몸속에서 스스로 돋아난 종유석이다. 그래서 나는 내 암조차도 사랑한다. 내 삶의 궤적인 것이다. 피곤할 때 풀지 않은 피로가 쌓인 석회석이고, 굶고 또 굶으면서 손상된 내 내장 속에 천천히 새겨진 암벽화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김점선은 오십견이 찾아와 붓 들 힘이 없어지자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림값이 “지랄 맞게 비싸다”며 유화를 더 이상 그리지도 않고 팔지도 않았다. 컴퓨터로 그린 디지털 판화만 저가에 팔았다. 판매가 목적이 아니라면 누구나 프린트해서 걸어 놓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림이 도도하고 비싸지는 건 화가와 일부 상류층의 이기주의 때문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만 원이면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을 듣고 괴테도 읽을 수 있는데 그림만 대중과 유리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옛날처럼 평화롭게 그림을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너무 휘몰려. 예전에는 60개 내서 20개만 팔려도 대박이라고 했거든. 근데 요새는 60개가 다 팔려. 미친 거지. 몸이 델 것 같아. 이 소용돌이에 휘몰아 돌아가면 암이 아니라 돈에 눈이 뒤집혀 죽을 것 같아. 그림 팔고 돈이 몇 억씩 쌓인다고 생각해 봐. 그럼 ‘더 그리고 싶다’고 생각할 거고, 50호짜리를 하루 만에 그릴 수 있으니까 한 달에 25일 작업해서 한 25억 받는다고 생각해 봐. 그럼 나 한 3년 만에 급사할 거 같아.”
1주기 추모 모임에서 김점선의 시매부 권용태 시인은 예술가 정신을 꼿꼿이 지키던 김점선의 일화를 기억했다. “전시회를 할 때였는데, 한 번은 누가 그림을 흥정하려고 하니까 그 자리에서 면박을 주는 거예요. ‘내가 남대문시장의 콩나물 장사인 줄 아느냐, 당신 같은 사람은 내 그림 앞에 설 자격이 없다’고 화를 내더라고. 그러면서 ‘내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공짜로 줄 수도 있다’고 했어요. 실제로 친구들에겐 그림을 그냥 주곤 했어요.”
작가가 혼신을 다해서 만든 작품. 그 안에는 예술가의 영혼이 들어 있다. 영혼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한다는 것. 그 발상부터가 작품에 대한 모독일 것이다. 김점선은 아이 같았다. 그 영혼은 맑고 순수했고, 계산이 없었다. 그런 그녀를 우리는 괴짜라고 불렀다. 진짜 괴짜는 천재를 몰라봤던 우리였다.
김점선, 한 사람쯤 없을 수 없지만, 둘이 있어서는 곤란한 사람
2009년 3월 22일 화가 김점선 별세했다. 암 투병 중 유명을 달리했다. 늘 말하듯이 '돌아간' 것이다. 해맑음 웃음이 좋았는데 이제는 그 해맑을 볼 수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자신의 생을 점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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