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우스운' 행사인 개교 100돌 중앙고 ‘아주 특별한’ 3·1절 행사를 한다. 인촌의 활약상을 담은 다큐드라마도 상영한다. 친일파를 기리는 행사를 3.1절에 한다니 세상이 어떻게 되는지 이해를 할 수 없다. 물론 3.1운동에 일정 부분 기여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후의 행적으로 보면 자라나는 고등학생들에게 애국자로 각인시켜서는 안된다. 사로잡힌 "친일파" 악령인 그들 친일세력들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도 끊임없이 살아나올 것이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모든 친일 목록에 김성수가 포함되어있다. 감동적(?)인 목록은 고대 총학에서 발표한 고대친일 10인 명단이다.
학교 설립자인 김성수 전 동아일보 사장을 비롯해 △고원훈 보성전문(고려대 전신) 교장 △유진오 전 총장 △이병도 전 교우회장 △신석호 전 고려대 교수, 보성전문을 나오거나 보성전문 교수로 있으면서 친일행위를 한 △선우순 △이각종 △장덕수 △최재서, 해방 뒤 고려대 교수를 지낸 조용만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 대의에 죽을 때, 황민의 책무는 크다 " (1943년 11월 6일자 매일신보)
내가 지금 새삼스레 여기서 더 말할 것도 없이 항상 교단에서 혹은 시시로 청년학도 제군에 게 늘 말하여 은 바이지만, 제군은 학창에서 지적 수련에 노력하는 한편 굳센 윤리적 연마에 힘써 왔다. 교육은 이 두가지 방면으로부러 제군을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어 올리는 것이다. 더구나 현재와 같은 세계적 신질서가 건설되는 시대에 있어서는 윤리적 방면이 일충 더 고조되어야 할 것은 제군도 잘 알고 있올 것이다. 평소 부터 자주 제군에게 말하여 온 나의 생각을 제군의 출진(出陣)올 앞둔 오늘날 다시 말하고자 한다. 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 의무를 다하라'는 데 그칠 것이다. 의무를 위하여는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나는 늘 말하여 왔거니와, 지금이야말로 제군은 이 말을 현실에서 몸으로써 실행할 때가 온 것이다. 물론 제군은 말로 쉽사리 목숨을 바치라 운운하는 나나, 또는 다른 선배들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도 없는 심경에 있을 것을 나는 잘 안다. 어제 아침에도 제군을 모아놓고 교단 위에서 제군의 그 수많은 시선을 바라볼 때, 나는 다만 말로써는 표현키 어려운 엄숙한 감격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종사해 온 교육자의 양심에서 말한다. '제군아, 의무에 죽으라'고. 내가 이렇게 한마디 최후의 부탁을 제군에게 하더라도 물론 제군은 이 말을 아무런 회의도 반문(反問)도 없이 솔직하게 받아들이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제군은 일반 국민보다는 지적 수준이 높은만큼 어떠한 명제에 대하여서라도 일차 마음의 반문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 더구나 오늘과 같이 제군이 대사일번(大死一番)의 판단을 즉석에서 내리지 않으면 안될 찰나에 있어서 제군에게 맹목적 추증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제군의 이와 같은 반문과 번민을 다른 부류에 속한 사람 보다 잘 알고 있음을 자부한다. 자부하는 만큼 제군의 번민을 일률적으 로 부정하는 태도에는 찬성치 않는다. 나는 차라리 제군이 이 번민을 뚫고 광명의 피안(彼岸)에 빛나는 목표를 꽉 파악할 때를 제군과 같이 기다리려 한다. 이러한 번민의 과정을 거쳐 파악된 대사일번(大死一番) 의 신념만이 다른 어떠한 결의보다도 요지부동의 것일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는 때문이다. 그러면 '의무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라' 하는 나의 말에 대하여 제군 은 당연히 어떠한 의무인가를 명시하라고 할 것이다. 나는 교육자의 한사람 으로서 소중한 제군을 제군의 부모로부터 훌륭한 완성된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자로서 조금도 허위와 양심에 없는 말을 할 수는 없다. 이러한 중대 책임을 가진다는 이곳에 대담 솔직하게 말하려 한다. 현하 우리가 당면한 의무라고 하면 제군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새로운 여명을 맞이하여 인류 역사에 위대한 사업을 건설하려는 대동아 성전에 대한 제군과 우리 반도 동포가 가지고 있는 의무인 것이다. 제군은 이땅에 생을 받아 이때까지 그만한 인간으로서의 자질과 품격을 갖추기까지는 가지가지 은택을 입고 있다. 국가와 가정과 사회의 은택은 모두 이것이다. 이러한 지나간 날의 은택이 제군에게 각자가 그 의무를 다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또 이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무거운 의무는 미래에 대한 의무일 것이다. 만일 제군이 금차(今次) 대동아 성전에 치참(馳參)치 못하고 대동아 신질서 건설이 우리의 참가 없이 완수된 날을 상상하여 보라. 우리는 대동아에서 생을 받았으면서 썩은 존재로서 이 역사적 시대에 영원히 그 존명(存命)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제군은 비록 이 성전의 전열로부터 빠져나와 개인의 조그마한 생명을 보전하고 있을는지 모르겠으나, 제군의 뒤를 이어 이 땅에 생을 받은 제군의 동생과 누이들은 어떻지 될 것인가. 제군은 실로 반도의 미래에 대한 절대(絶大)한 의무를 지고 있다. 나는 생각하건대 제군의 번뇌가 현재 이 점에 부딪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순간은 제군의 그와 같은 번민과 반문을 무시하고 각 일각 추진되고 있다. 대동아의 건설은 제군의 사소한 존재를 돌아볼 사 이도 없이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매진 앞에 제군이 천재일우의 호기를 잃어버리고 그로 말미암아 반도가 이에 뒤떨어질때 우리는 대동아 건설의 1분자는 그만두고 황민으로서 훌륭히 제국(帝國)의 1분자가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제군이 위에 말한 의무를 다할 때에 비로소 제군은 제군이 이 땅에 살아 있을 것이고 제국(帝國)의 l분자로서 내지와 조금도 다름없는 빛나는 대우 즉 권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보통 의무와 권리를 논할때 서양사회에서는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의무를 지는 것이지만 동양에서는 고래로부터 의무를 다하는 데 필연적으로 권리가 생기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황민화를 고창(高唱}하여온 이래 제군이 자주 자신의 황민으로서의 권리를 일반 사회에 대하여 요구 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하면 일본은 3천년이라는 오래동안 금일의 제국(帝國)의 광영을 빛내는데 온갖 의무를 수행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는 겨우 그동안 30년밖에 안된다. 5천 년과 30년의 차를 가지고 권리에 있어서 평둥을 요구할 수 있을까. 이것은 제군이 권리만을 주장하는 서양인의 학설에 현혹된 잘못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한 바가 있다. 의무의 수행에 있어 시간의 장단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의무의 대소는 시간의 축적(蓄積)에 있지 않고 의무 자체의 성질에 있다. 우리는 단시일 일지라도 위대한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내지인이 오랫동안 바쳐온 희생에 필적할 임무를 수행한 수 없을 까. 이 임무를 수행할 절호의 기회가 지금 이 순간에 우리 앞에 열려진 것이다. 제군의 희생 은 결코 가치 없는 희생이 아닐 것을 나는 제군에게 언명 한다. 제군이 생을 받은 이 반도 를 위하여 희생됨으로써 이 반도는 황국으로서의 자격을 완수하게 되는 것이며 반도의 미래는 오직 제군의 거취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문약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의 정신을 찬양하라" (1943년 8월 5일자 매일신보 )
자(玆)에 조선 징병령 감사주간에 당하여 소감의 일단을 들어 삼 가 반도청년 제군의 일고 (一考)를 촉(促) 코자 한다. 작년 5월 8일 돌연히 발포된 조선에 징병령 실시의 쾌보는 실로 반도 2천5백만 동포의 일대 감격이며 일대 광영이라 당시 전역을 통하여 선풍같이 일어나는 환회야말로 무엇에 비유할 바가 없었으며 오등 반도청년을 상대로 교육에 종사하는 자로서는 특히 일단의 감회가 심절(深切)하였던 바이다.(중략) 그런데 이 징병제 실시로 인하여 우리가 이제야 명실상부한 황국신민의 자격을 얻게 된 것은 일방으로 전반도청년의 영예인 동시에 반천년 문약의 분위기 중에서 신음하던 상술한바 모든 병근(病根)을 일거에 쾌치(快治)하고 거일(去日) 생산할 제2의 양질(養質)을 얻은 것이다. 어찌 반갑지 아니하며 어찌 감격치 아니 하리오. 하고(何故)오하면 상술한 문약의 고질 을 치료함에는 오직 상무(尙武)의 기풍을 조장함이 유일무이의 양약인 까닭이다. 그러나 여하한 능라주단이라도 차(此)를 재지봉지(裁之縫之)하여 의상을 만들어 착용치 아니하면 금수(錦繡)의 가치가 없을 것이요, 아무리 기효(奇效)를 주(奏)할 양약이라도 이를 전지환지(煎之丸之) 하여 복용치 아니하고는 필경 그 실효를 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이 징병제 실시의 이 영예를 청년제군은 여하히 착용하며 이 양약을 여하히 복용하여 외관으로나 내용으로나 그 실효실예(實 效實譽)를 완전히 현양(顯揚)하려는가.무릇 의외(意外)의 영예가 돌아올 때에는 그 영예의 소종래(所從來)를 잘 생각하여 그것을 완전 향수할 준비가 없지 못할 것이며 양약이 입수(入 手)되었을 때에는 먼저 잘 조리복용하여 완전히 효험을 발휘케 할 연찬(硏讚)이 없지 못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오인(吾入)은 금후 제군에게 일단의 인고와 일층의 단련을 요청하는 바이다. 그러면 이것을 실천할 첩경은 어디 있으며 비방은 무엇인가. 오인은 이제 새삼스럽게 제군에게 지교(指敎)할 것도 없이 4~5년 이래로 우리 일석제송(日夕齊誦)하는 황국 신민서사(皇國臣民誓辭)를 한번 다시 되풀이하고자 한다.
1 아등(我等)은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報)하자, 이 조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생존목표를 달(達)하는 대관절(大 關節)이다. 특히 조선청년은 누구보다도 먼저 이 목표 를 확정함으로 써 제일 주장을 삼는 것이다. 이 목표가 확정됨으로 부터 만상(萬象)이 정시(正視)되고 군의(群疑)가 해소되는 것이다.
2. 아등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협력(信愛協力)하여서 단결을 굳게 하자 이 일절이야말로 종래 우리 조선인의 정문(頂門)의 일침이다. 우리 종래의 모든 결점이 오로지 상호 신애협력을 못 하는 것과 그 결과로 10인(人) 10색(色). 100인(八) 100기(幾)로 단결이 되지 못하는 바 있던 것이다. 폐일언하고 인간은 일종의 집단동물이다. 집단의 위력을 발휘치 못한다면 그 실력이 저 봉의(峰蟻)에게도 멀리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 집단이 즉 단결이요, 단결이 되려면 그 분자 분자가 상호 신애협력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신애협력을 지분 절해(肢分節解)하여 설명하려면 기천권 수신서(修身書)로써도 부족 할는지 모르나 간명적절(簡 明適切)히 말하라면 손쉬운 방법으로 우리 일상 경송(敬誦)하는 교육칙어(勅語)의 일절(一節)을 봉서(奉書) 해보자. '부모에게 효(孝)하고 형제에게 우(友)하고 부부상화(夫婦相和)하고 붕우상신(朋友相信)하라' 이 일절 중에 소위 신애협력의 전부가 포함된 것이다. 여기에 특히 '충군'의 2자는 표시되지 아니하였으나 기실 효도 충군의 일단이요, 우도 충군의 일단이요, 화신(和信)도 또한 그러하다. 신민(臣民) 이 모두 상호 신애협력하여 단결을 굳게 하였다가 일단 완급(緩急)이 있으면 의용봉공(義勇奉公)하는 것이 충군(忠君)의 지상방법(至上方法)이며 우리 생활의 의미가 전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즉 자(子)가 되어서는 자의 직 (職)을 다하고 형제간에는 형재의 책(責)을 다하고 부부.붕우가 각기 그 소처(所處)의 직책 을 다하는 것이 곧 신애협력 의 요체이다.
3. 아등 황국신민은 인고단련(忍苦穀練)을 양(養)하여서 황도(皇 道)를 선명(宣明)하자. 금은 주옥(金錄珠玉)도 이를 단련 조탁치 아니하면 일개 토석(土石)에 불과하고 교목거재(喬木巨村)도 이를 승연부단(繩硏理斷)치 아니하고는 고루거각의 동량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위 인성자의 소질이 있다 할지라도 인고단련이 없이 생지천성(生知天成)은 바라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일도 인고단련이요 이도 인고단련이다. 저 금옥이 열화중에 용해되며 철석 (鐵石)으로 조탁될 때에 그 고통이 여하하였으며 저 동량(棟梁)이 작지단지(斫之斷之) 준지부지(準之斧之)할 때에 또한 얼마나 고통을 받았으랴. 그 온갖 고통을 인내하였으므로 만인이 경앙하는 동량이 되며 진중(珍重)하는 금옥이 되지 않는가. 인간도 또한 절대적이므로 이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같이 인고단련을 쌓아 완전 위대한 신민이 되어서 황도를 양(揚)하는 것이 곧 오등의 최종 목적 에 도달하는 것이 다. 이상의 이론이야 누가 모르리요만 금후의 성과 는 오직 이상 서사(誓詞)의 심송체행(心 誦體行)에 달렸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여 자타의 경성(警醒)에 공(供)코자 한다.
1938년에는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이사 및 동(同) 연맹 산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이후에도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1940)·총무위원(1943), 흥아보국단(興亞報國) 결성 준비위원(1941), 조선임전보국단 감사(1941)등으로 활동하면서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글을 쓰거나 강연했다. [출처 : 네이버의 김성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