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보고 듣고 느낀 한마디

법정스님의 유언을 보고 고죽을 떠올리다

반응형

법정스님이 열반에 드시고 그의 유언장으로 더 이상 스님의 책을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보도가 나왔다. 집에 스님의 책은 몇 권 있지만 그리 자주 읽는 것은 아니다. 얼마전 스님의 <일기일회(一期一會)>는 제목이 주는 감동으로 읽어보고자 하였으나 아직도 위시리스트에만 있다.

스님의 <무소유>를 5만원이상 팔려고 하는 이들이 많이 보인다. 중고책의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따른 것이고, 그 가격에 원하는 이가 있다면 적정한 가격이 형성된 것이다. 구매하는 이가 없다면 가격을 다운시킬 것이니 별다르게 비난하거나 토를 달 필요가 없다.

법정스님 유언장을 보면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십시오'라 하였다. 이 말을 보니 불현듯 이문열의 <금시조>에 나오는 고죽이 떠오른다. 소설 속의 고죽과 스님을 비교하고자하는 것은 아니다. 왜 고죽이 떠오르는지도 모를일이고, 스님의 내부 사정이 어떠한지는 알 수도 없는 나이다. 단지 고죽의 마지막을 생각날 뿐이다.

소설속의 고죽은 젊은 시절 자신의 작품을 늙어 모아서 모두 태워버린다. 구구한 이야기는 소설에 나오는 말이고 그 타오르는 불길속에서 고죽은 홀연히 떠오르는 금시조를 보았다. 찬란한 금빛 날개와 그 힘찬 비상을.

법정스님의 유언이 어떠한 이유에서건 존중되어야 한다. 공익을 위한 어떠한 말보다도 그자신의 말이 더 중요하다.

법정스님의 유언을 보고 고죽을 떠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독자가 기르는 나무다.
어떻게 자라고 무엇이 달리는지는 나무만의 일은 아니다. 
좋은 독자가 없는 곳에 좋은 작가가 자랄 수는 없다.

_이문열



덧붙임_
이문열이 보수의 뭐라고 온갖 소리를 듣고 있다. 그의 소설에 대하여 찾아보니 모두 절판이다. 책이 팔리지 않으니 절판이겠지만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나와 시상이 같던 아니던 다양화가 보장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보장이 되지 않는 곳은 발전도 없다. 좌우는 반대가 아니라 보완이다.(이런 말을 하는 나도 나이가 들어가나 보다)

내가 꺼내들은 금시조는 마당문고의 《사과와 다섯 병정》(1984년) 중에 수록된 것이다.


2009-03-21 
보고 듣고 느낀 한마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