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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술 사주는 읽고쓰기

[읽을책]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 장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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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8에 해당하는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이 나왔습니다.

중요하게는 자기 안에 동기가 마련되지 않은 독서는 다 읽고 나서도 남는 게 없습니다. 어떤 책을 읽기 전에 ‘내가 왜 이 책을 읽는지’에 대한 세 개 이상의 이유를 먼저 떠올려보기를 권합니다. (15쪽)


"내가 왜 이 책을 읽는지."라는 글로 책은 시작됩니다. 이 같은 물음은 저를 비롯한 누구에게나 주어진 물음이자 풀어야 할, 하지만 풀지 못하는 숙제와도 같습니다. 장정일은 "세 개 이상의 이유를 먼저 떠올려보기"를 권합니다. "동기가 마련되지 않은 독서는 다 읽고 나서도 남는 게 없"다고 말도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참 단순한 질문이지만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는 숙제입니다. 이 책으로 그 숙제가 풀릴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 물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풀고자 함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장정일은 <독서일기>에서 책 제목이 변하게 된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어 보면서 그의 변명(?)이 합당한지 따져보려고 합니다.


다만 책의 제목,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이 뜻하는 것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는 공감이 가고 동조하는 편입니다.

책 제목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은 나의 독서 버릇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많은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데, 책을 읽는 도중에 빌려 읽기가 너무 아까운 좋은 책이나, 다 읽고 나서 필히 곁에 두어야 할 책을 뒤늦게 산다. 이런 검증을 거치지 않은 책 가운데 읽고 나서 버려지는 것들도 많다. 책을 읽는 방법이 천차만별이듯 버리는 일도 그럴 것인데, 내가 가장 애용하는 방법은 외출을 할 때 버릴 책을 미리 준비하였다가 아무 공중전화 박스의 전화기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 (작가의 말)


저자 장정일은 책을 다독하기에 빌려서 읽지만 저는 그리 많이 읽지 않기에 대부분을 구매 또는 얻어 읽고 있습니다. 책에 밑줄을 그어야 읽은 것으로 생각하기에 빌려서 읽기를 주저합니다. 하지만 유행을 타거나 한 번 읽어도 좋을 책들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습니다. 그러다가 참 좋은 책이라고 생각되면 다시 구매합니다. 그럴 때 문제는 빌려서 읽었을 때 내용이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의 한계이겠지만요. 저자와 다른 하나는 버리는 방법입니다. 나에게 필요 없다고 하여 나쁜 책은 아니기에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려고 합니다, 그것이 온라인에서의 나눔인데 그것도 쉽지 않습니다. 좋은 나눔의 방법을 찾고자 고민 중입니다. 저자가 대구에 사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근처라면 몇 권의 책은 얻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는군요.

삼성 제품이 아닌, 일제 프린터를 샀다고 나를 꾸짖을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삼성이 망하면 대한민국이 망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실례로 삼성이 우리나라에 기여한 일자리의 숫자보다, 삼성의 문어발식 경영과 하청 관행이 중소기업의 생존을 위협하는 사태가 더욱 대한민국을 위태롭게 한다. (25쪽)


우리에게는 알게 모르게 민족주의적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대부분이 마케팅에 활용하는 나쁜 경우 그것이 더욱더 크게 작용합니다. 우리 것, 나쁘지만 우리 기업 등 이런 식으로 활용합니다. 생각나는 몇 가지가 있지만 생략합니다.

문맹은 문맹자에게 자기방어에 열중하는 자폐증을 선사하고 세상을 무관심하게 보도록 이끄는 대신, 문맹자에게 두 가지 덕목을 베푼다. 하나는 자기가 맡은 바의 직분과 과업에 혼신을 바치게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나 상사(고용주 또는 상관)가 부여한 규칙과 명령에 성실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다. (…) 그래서 작가는 “글은 우리 혈관 속에서 피처럼 흐른다. 그것은 모든 말 속에 파고든다. 지시와 묵종의 관계에서와 달리, 대화에서 인쇄된 글에 대한 언급이 없거나 읽을거리에 대한 암묵적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진정한 대화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문맹은 대화로 통하는 길과 창을 막는다. 그것이 막히면 나와 사회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타인의 감정을 관찰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양심이 마비된 도덕적 문맹이 되고 만다. (107~108쪽)

한국은 세계적으로 문맹률이 가장 낮은 나라이다. 하지만 문맹이 단순히 글(알라딘 출판사제공에서는 '그'라 표기되었다.)을 읽을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면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자기가 한 말을 끊임없이 부정하며 “오해였다”를 연발하고 일상적인 의미와는 전혀 다른 뜻으로 단어를 사용하는 정치인들 역시 문맹이 아닌가? 저자는 그렇다고 책에 빠져 사는 먹물, 활자 중독의 폐해 역시 눈감지 않는다. (출판사 서평)


이 부분이 책의 소개 부분에서 제일 맘에 듭니다. 단순히 글자를 안다고 글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일상적인 의미와는 전혀 다른 뜻으로 단어를 사용하는 정치인들 역시 문맹이 아닌가?"라며 문맹에 대한 의미를 다시 부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영어교육에서도 같은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영어단어를 안다고 문장을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초등학생이 고등학생 수준의 책을 읽을 수 있다고 엄마는 자랑합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안타깝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초등학교 2학년인 아이도 제가 읽는 책을 읽을 줄 압니다. 글자를 알기 때문입니다. 내용을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글쓰기의 가짓수는 무척 많고, 교양이란 매우 폭이 넓은 세계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글쓰기 하면 곧바로 시나 소설을 떠올리고, 그걸 읽는 게 교양의 다인양 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양한 글쓰기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특정 장르의 문학이 글쓰기의 피라미드 가장 높은 꼭대기에 좌정하고 있으면서 그 외의 글쓰기를 억압하는 사회, 고작 시집이나 소설 몇 권을 읽는 것으로 교양인 행세가 가능한 나라는 가망이 없다.  BBK같은 사건이 터졌을 때 제대로 된 사회에서라면, 거의 반년 안에 스무 권이 넘는 논픽션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그 가운데 어느 한 종이 100만부 이상 팔리고 그 사건이 시중의 화제가 되고 칼럼에 오르내리는 사회가 <엄마를 부탁해> 같은 소설이 100만 부나 팔리는 사회보다 훨씬 바람직할 수 있다. 소설 <도가니>도 그렇다. 청각장애자 학교에서 일어났던 성폭력 사건을 유명 작가가 논픽션으로 썼다면, 사회적 파급력은 상당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영향으로 진실이 발본되고 미비한 법들이 고쳐질 확률도 높으나, 문학이 너무 강한 사회는 온갖 사회적 의제와 다양한 글감을 문학이란 대롱으로 탈수해 버린다. (168쪽)


위의 글과 맥락을 같이 하는 글이라 생각됩니다. 다양성을 표방해야 하는 데 국한되어 자꾸 매여두려 합니다. 다양한 글쓰기가 되지 않으면 다양한 사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어야겠지요. 그래서 장정일의 책을 읽으려 합니다. 그의 다양한(나와 다를 수도 있는) 시각을 보려 합니다.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장정일 지음/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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