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
젊은 글쟁이 가운데 몇몇이 외우고 있었다는 문장을 여러 번 읽어보았습니다. 중년과 가을은 왜 이리 서글픈지, 밟히는 낙엽 소리가 서월의 흘러감을 더 서글프게 합니다. 하지만 김훈은 '난감하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서글픔보다는 난감함이 마음이 더 아프게 합니다. 발문을 쓴 이인재 시인의 말을 빌려보겠습니다. "그때 나는 30대 초반이어서 저 난감함이 절실하지 않았다. (...) 선재의 중년은 가을이 아니었다. (...) 선배의 중년은 난감하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김훈의 중년은 난감하지 않은데 왜 우리의 중년은 가을이며 난감하다고 느껴야 하는지 진짜 '난감'합니다. 첫 번째로 엮은 "시로 엮은 가을"은 정말 난감합니다.
<내가 읽은 책과 세상 : 김훈의 시이야기>은 89년 나온 책을 2004년 시詩만 모아서 "김훈의 詩이야기"라는 부제를 달아 개정판을 낸 것입니다. 지금도 시가 읽히지 않지만 2004년에도 시가 읽히지 않았을때라고 기억합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시가 우리에게서 잊힌 것은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한데 왜 시만 묶어서 개정판을 내었을까요? 궁금합니다.
"나는 내가 쓴 글들을 다시 들여다본 적이 거의없다. 나는 그 수치와 모멸을 견디지 못한다. 원고를 출판사에 넘길 때, 버려야 할 내 신체의 일부를 잘라주듯이 던져버렸다. 교정은 물론, 책이 나와도 다시는 읽어보지 않았다. 나를 오래오래 괴롭힌 글일수록 더욱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리고는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와 연필을 잡았다. 자기혐오로써 자신을 긴장시켜 나가는 자의 불우는 말로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김훈이 개정판 서문에서 말했습니다. 하지만 개정판을 내었습니다. "이 책을 엮는 과정에서, 편집자의 강권에 못 이겨 오래 전에 쓴 글들을 다시 읽었다. 글을 바꾸어 쓰면서 나는 참담하였다. 결국 이렇게 나이 먹고 세월은 별 수 없이 허송세월되는 것인가. 20년 전에 원고를 내던졌듯이 이 원고들도 또 한 번 팽개치듯이 내던질 수밖에 없다. 무슨 수가 있겠는가. 나에게는 없다."
꾸역꾸역 밥을 벌자. 아무 도리 없다 : 밥벌이의 지겨움을 잘 알기에 그의 말이 괜한 변명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1984년 김훈의 서문을 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밥을 벌기 위해 허둥지둥 쓴 글들"이라는 점을 말합니다. 궁색함을 들어내는 말인지 모르지만 김훈의 말은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아마도 이 점이 김훈의 장점, 아니 매력이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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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모이는 글 부스러기들은 대부분이 밥을 벌기 위해 허둥지둥 쓴 글들이다.
글 쓰는 자의 정당한 기쁨이나 글 쓰는 자가 마땅히 흘려야 할 피를 정직하게 흘려가며 쓴 글도 있지만, 그날그날의 마감 시간과 사투를 벌이며 "이 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몰고 나간 글들도 적지 않다. 그걸로 밥을 먹었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다만 거기에 조금이라도 묻어 있을 내 고난과 헤맴의 자취에 의하여 그 부끄러움이 사하여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러한 글 부스러기를 모아 책을 낸다는 파렴치 행위는 이 다 떨어진 생애에 모욕을 배가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어린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듯이, 모든 것을 새롭게 읽고 새롭게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아마 그럴 수는 없으리라. 업과 더불어 짜증과 더불어 모자람과 더불어 한 발자국씩 나가는 이외에 무슨 다른 길이 있으랴.
더 나이 든 어느 날, 글을 버리고 책을 버리고, 치타나 기린 같은 알 수 없는 짐승들 옆에서 혼자 앉아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방금 쓴 이 건방지고 난폭한 말은 또다시 용서를 빌어야 할 죄악은 아닐는지, 그만 쓰자.
198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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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지금도 절판입니다. 초판본을 재발행하여 이 책에 나오지 않은 소설에 관한 그의 글을 읽고 싶습니다. 시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마치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듯한 느낌입니다. 난감함을 느끼게 하는 "시로 엮은 가을"과 더불어 "여름과 시"는 제목만으로도 시를 읽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무수한 화살이 날았지만 아직도 새는 죽은 일이 없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어떤 이 세상의 말도 잔잔히 지우는 바다
산은 혼자 있으며 더 많은 것들과 함께 있다
저문 강물을 보아라
소들은 왜 뿔이 있는가
지고한 목숨을 울면서 일체를 거부하던 너의 외로움이 이제 마른 잎으로 땅에 눕겠구나
가을이 깊어가는 지금이 이 책과 제일 어울리는 시기입니다. 절판이니 도서관이 아니면 읽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꼭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덧_
푸른숲, 2007년 10월 개정판 4쇄
덧_둘
"여름과 시"에 나오는 문장은 베껴쓰기를 하고 싶습니다. 문장도 좋지만 시詩를 다시 바라보니 '난감'함이 덜어지더군요.
덧_셋 2013.03.15
절판에서 판매로 바뀌었다. 다시 절판을 염려하여 구매하다. 소설이 나와있는 초판본을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