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근 고음불가는 표절이다

2011.10.16 09:00 영화


<빨간 피터의 고백>이라 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추송웅 또는 카프카라고 말 할 것이다. 원작 <학술원에의 보고>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기억 속에 남아있는 추송웅에 관한 기억을 떠올려 보자. 모노드라마 <빠알간 피터의 고백>은 <길>의 젤소미나를 떠올리게 한다. 젤소미나와 피터가 무슨 연관이 있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둘의 이미지는 오버랩된다.



아프리카 밀림에서 잡혀와 인간의 길을 택해 서커스 스타가 된 빨간 원숭이 피터는 과거 원숭이 시절의 삶에 대해 보고해달라는 학술원의 요청을 받고 진정한 자유와 현대인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인간들은 너무 자주 자유를 착각합니다. 자유가 가장 숭고한 감정에 속하듯이 착각 또한 가장 숭고한 감정에 속하는 것이지요… 저는 오로지 보고만 할 뿐입니다."

프란츠 카프카 원작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각색한 연극 '빨간 피터의 고백'이 1977년 8월 20일 서울 명동 삼일로창고극장에서 첫선을 보였다. 1985년 작고한 연극배우 추송웅이 제작, 기획, 장치, 연출, 연기까지 1인 5역을 맡은 이 연극은 전례 없는 흥행기록을 세우며 한국 연극계에 모노드라마 붐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하지만 대중적인 성공을 거뒀음에도 연국 자체에는 긍정적인 평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카프카의 원작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피터의 고뇌를 표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추송웅의 분장한 모습은 매우 원숭이를 닮았지만 "원숭이의 세계를 벗어난 빨간 피터의 원숭이이면서 인간인 내면을 그 양쪽이며 어느 쪽도 아닌 차원으로 형상화시키는데는 역부족"이고 극적 감동을 주지 못했다고 평한다.

이러한 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극으로 흥행할 수 있다는 계기를 만든 작품이다. 그것이 모노드라마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의 연극을 후하게 평해야 한다. 연극이라는 한계성으로 그의 모습을 영상으로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해변으로 가요 - 산울림 & 추송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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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독일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에서 클라우스 캄머 Klaus Kammer의 열연으로 호평을 받으며 공연된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카프카의 단편 소설이 관객에게 향하여 보고하는 형식으로 각색되어 한 사람의 배우가 전 공연시간을 이끌어 가는 모노드라마의 장르를 개척해 놓았으며 이 작품의 한국공연 이후 모노드라마는 80년대 한국 연극계에서 즐겨 택해지는 연극 장르가 되었다. 추송웅은 이 작품과 접하게 된 동기에 대해, <주간한국>에 실리고 있던 「예 (藝)」라는 씨리즈 기사 중 하나로 보도된 클라우스 캄머의 공연에 대한 기사에 "충격에 가까운 감동을 받고 언젠가는 공연해 보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중 독일문화원의 최영일 씨에게서 번역본을 얻게 되었다" 고 한다. 성격배우 추송웅은 균형이 잡히지 못한 외모와 작은 체격 등으로 배역 맡기에 한계를 느끼고 있던 중 원숭이 역을 자신의 천생의 배역이라 생각하고 15년 배우경력의 성패를 이 작품에 건다. 무엇보다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는, 그래서 많은 관객을 유치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려는 계획 하에 그는 작품 선정에서부터 제작, 연출, 출연을 모두 직접 시도한다.

관객을 사로잡는다는 것은 물론 연극 예술적인 의미에서도 이해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 많은 관객동원을 목표로 계획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는 세 가지 점에 착안한다. 우선 그는 카프카라는 이름으로 성패를 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카프카의 "심판", "성", "변신"등 의 작품이 이미 한국의 독서계에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관객동원의 문제가 없으리라는 계산에서였다. 둘째로 그에게는 당시 한국 연극계에서는 새로운 장르인 모노드라마를 개척하겠다는 포부가 있었다. 모노드라마는 새로운 장르이기도 했지만 제작비가 저렴하다는 유리한 점이 작용한다. 셋째로 인간이 아닌 원숭이의 모방은 연극계의 새로운 시도로 관객의 호기심을 끌기에 족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우선 그는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라는 제목은 너무 딱딱하여 관객에게 유연하게 다가갈 수 없겠다고 생각하고 주인공 원숭이의 별명을 따서 <빠알간 피이터의 고백>이라고 제목을 바꾼다. 15년간의 배고픈 연극인으로서의 만네리즘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위한 도전을 목표로 연기수업을 하며 연극적인 면을 살리기 위해 무엇보다 원숭이의 동작을 완벽하게 모방하면서 동작의 반경을 넓혀간다.

원래 9쪽 정도의 단편을 하루저녁 공연물로 각색하기 위해서는 공연시간을 확대시켜야하는 필요성이 따랐고 이 연장된 시간을 동작으로 채울 수 있어야 했다. 이는 특히 여러 등장인물을 통해 다양성을 제공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단조로움, 단일 인물의 대사만으로는 지루할 수 있는 상황을 동작으로 커버하려는 시도이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카프카의 해석에 한계성을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흐물거리는 피이터의 절규는 역시 문학적 향기만으로는 결코 밟히지 않는 그림자와도 같은 카프카의 몽상적 공포를 표출해 내기에 아무래도 역부족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는 대사를 통한 표현보다는 동작위주의 무대를 지향한다고 한다. 그 자신도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카프카의 "문학적 향기"가 감소될 것을 우려하기도 하지만 "카프카를 음미하려는 사람은 책이나 사서 보면 될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공연에 임하는 자세를 보면 그가 텍스트 해석 자체에 비중을 덜 두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래서 그가 만들어낸 공연은 원숭이 연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이러한 원숭이 모방 연기가 관객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사실이다.

카프카의 침팬지는 출구가 없는 철창 속에서 출구를 찾기 위해 인간세계에 적응하면서 침팬지적 기질을 거의 상실한 상태이기 때문에 구태여 그를 원숭이의 동작으로 원숭이임을 강조할 필요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추송웅은 원숭이 모방에 이 공연의 성패를 건다. 그는 원숭이를 모방하기 위해 2개월간 창경원 동물원으로 출근하며 침팬지의 동작과 습성을 연구, 특이한 버릇 등을 유심히 관찰, 기록하며 사진을 찍기도 하고 실제로 침팬지 우리에 들어가 침팬지 노릇을 해보기도 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통해 그의 상상 속에 그려진 피이터의 "괴기스런 모습"을 형상화하려 한다.

1977년 8월 21일부터 31일까지 공연예정이었던 이 작품은 9월 31일까지 연장하여 하루 2회씩 공연하였고 마지막 날에는 네 번을 공연해야할 정도로 관객의 호응은 열광적인 것이었다. "8월 하순, 9월 초 푹푹 찌는 더위에 땀에 젖은 관객들이 침, 땀방울 할 것 없이 모조리 머리 위로 떨어지는데도 얼굴하나 찡그리지 않고 시종일관 뜨거운 반응으로 피이터의 절규를 가슴속에 새기고 있었다"고 추송웅은 회고한다.

관객의 선풍적인 인기는 프라이에 뷔네의 공연에서도 감지된다. 70년대 초, 특히 독일문학의 한국소개에 기여하던 프라이에 뷔네는 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단원들의 다수가 독일로 유학하고 그 일부는 현역으로 연극에 참여한다. 독일 유학중인 선배들은 독일 연극의 새로운 정보를 입수하는 직, 간접적인 창구가 된다. 주인공 원숭이 역으로 출연했던 김상경은 한국에서 드물게 보는 저음 배우로서 이 공연을 위해 독일까지 방문하면서 자료를 모으는 등, ‘학구적인 자세’로 카프카 해석을 시도하며 공연에 임하고 있었다. 추송웅의 공연이 추송웅의 독무대로 연출, 주연, 제작을 모두 혼자 맡았던 데 비해 프라이에 뷔네의 공연은 기획 이재창, 연출 김승수, 주연 김상경, 분장 박수명, 무대 조형래 등이 나누어 맡아 모두가 맡은 바 분야에서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삼일로 극장과 실험극장에서 거의 동시에 공연된 서로 다른 성격의 두 공연은 서로에게 자극제가 되며 모두 성공적이었다. 학생극단의 규모를 벗어나 기성극장에서 일반관객을 대상으로했던 프라이에 뷔네의 공연은 독일문학을 전공하는 학생과 졸업생들로 구성된 극단인 만큼 원작에 충실한 작품해석을 해 놓았고 추송웅의 <빠알간 피이터의 고백>은 관객을 염두에 둔, 관객의 기호에 어필하는 공연이었다. 그래서 추송웅의 공연이 상업적이었다는 비난도 만만치않다. 여하튼 이 작품은 연극으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준 작품이며 추송웅에게 부를, 꿈에도 그리던 자신의 극장 <떼아뜨르 추>를 가져다 준 작품이었다. 프라이에 뷔네도 이 작품의 성공으로 연장공연을 하며 극단 전문 사무실을 낼 정도가 되었으며 학생극의 범주를 넘는 공연 기획을 위해 ‘우리극장’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특히 추송웅의 <빨간 피터>는 대만, 일본, 파리 공연으로까지 이어지는 ‘대성공’을 거두어 그의 국제적 진출을 가능하게 했고 또 그에게 여러 개의 연극상을 안겨 주기도 했으며 1985년까지 15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할 정도로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다.

그러나 <빠알간 피이터>에 대한 연극계의 반응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한상철은 이 모노드라마에서 추송웅 연기의 진경을 볼 수 없었다고 전제하면서 "그의 원숭이 연기는 원숭이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연기였다"고 신랄하게 평하며 카프카의 단편은 주인공이 한 편으로 사람이고 또 한 편으로는 원숭이임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그 어느 쪽도 아닌 어떤 새로운 차원을 요구하고 있는데 추송웅의 분장한 모습은 매우 원숭이를 닮았지만 "원숭이의 세계를 벗어난 빨간 피터의 원숭이이면서 인간인 내면을 그 양쪽이며 어느 쪽도 아닌 차원으로 형상화시키는데는 역부족"이고 극적 감동을 주지 못했다고 평한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 그는 인물과 역의 분화가 없고 그것이 연출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 다시 말해 보다 극적 구성을 갖도록 재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 그렇다고 다양한 연기술도 동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원숭이를 보는 흥미와 호기심 이외에는 별 감동을 주지 못했다고 한다.

(김기선(성신여대) - <한국 무대의 카프타 수용> 中)







연극배우 추송웅

화가들은 그림을 남기고,작곡가들은 악보를 남기고,작가들은 책을 남긴다. 그들의 그림과 악보와 책은 시간을 넘어서 그안에 응축된 그들의 삶에 대한 통찰과 철학,그리고 예술혼을 전달한다.그러나,연극 배우들은 작품을 남길 수가 없다.연극은 일회적인 것이므로 공연이 끝나면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 그것은 신기루,환 같은 것.연극은 막이 내림과 동시에 현장의 시간 속에서 휘발되어 사라져버리고,남는 것은 기껏해야 공연 팜플렛 정도이다.1985년 12월 31일,사람들이 송년의 들뜬 기분에 사로잡혀 있던 날,한 연극배우는 "스포트라이트도,관객의 박수도,화장을 지울 분장실"도 없는,"12월 차가운 양광과 스산한 바람소리,검붉은 황토흙"만 있는 "그 자연의 조명과 세트,효과음"만 있는 "저승의 영원한 무언극의 무대"로 돌아갔다.

1977년 3월 어느날.아직은 바람끝이 차가운 오후. 창경원의 원숭이 우리 앞에서 한 사나이가 몇 시간째 서성거리고 있다.날은 쾌청했지만 휴일도 아니 었고, 아직 날이 완전히 풀린 것도 아니어서 고궁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창경원 관리원 한 사람이 원숭이 우리 앞에서 몇 시간째 서성거리는 이상한 사람이 있다는 신고를 받고 나왔다.

"뭐 하는 겁니까?"

"아,아닙니다.저,원숭이를 관찰하느라고..."

사나이는 갑작스럽게 자전거를 타고 나타난 관리원에게 약간 당황한 듯 말을 더듬거렸다.관리원은 그 이상한 사나이의 아래위를 훑어보고는 별다른 말없이 떠나갔다.

그 사나이는 연극배우 추송웅(1941-85)이었다."천의 얼굴을 가진 연기자", "희극성과 공포성을 다같이 지닌 그로테스크한 얼굴의 연기자"라는 추송웅은 남몰래 연극배우 생활 15년을 자축하는 공연을 준비중이었다.그 작품은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인 "빨간 피이터의 고백"이었다.이 작품의 원제는 "어느 학술원에 제출된 보고".

1962년 베를린 아카데미 스튜디오에서 공연된 작품이었는데,추송웅은 독일 문화원의 지인에게 번역을 의뢰해 혼자 기획,제작,연출,장치,연기까지 도맡는 1인 5역으로 공연을 준비중이었다.아내의 곗돈 75만원을 쏟아넣은 이 공연을 위해 추송웅은 77년 3월부터 8월까지 6개월동안 틈만 나면 창경원으로 달려와 원숭이 우리 앞에 매달렸다.

추송웅은 1941년 9월 3일 경남 고성군 서외리 167번지에서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추의수의 4남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형제들은 키도 크고 공부도 잘한 수재들이었는데,유독 그만 키도 작은 데다 사팔뜨기였고 공부도 못하는 집안의 골치덩어리였다.내성적인 성격에다 신체적 컴플렉스를 원죄처럼 안고 살았던 그는 사팔뜨기라고 놀리는 철없는 어린 친구들 틈에 끼지 못하고 외톨이로 떨어져 놀았다.

1959년 말론 브랜도와 같은 배우가 되기 위해 추송웅은 중앙대학교 문리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입학 동기 중에 박근형, 최정훈, 맹만재 등이 끼어 있었다.1m 65의 왜소한 키, 불룩 튀어나온 배,구부정한 어깨,사시,"저렇게 못생기기도 어렵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로테스크한 얼굴,거기에다 지독한 경상도 사투리....어느 하나 배우의 조건에 맞는 것이 없는 그였다.그는 입학동기들을 보고 단번에 주눅이 들었다.

"대체 배우가 될 만한 단 한가지의 조건도 없이 무슨 깡다구로 연극영화과에 들어왔는지...". 그는 후회를 했다.하지만 신입생 환영회에서 피아노를 치며 "베사메 무초", "라 쿰파르시타", "이스탐불"을 멋지게 연달아 연주하고,"크레이지 러브"와 몇곡의 팝송을 부르면서 추송웅은 그 환영회를 완전히 장악했다.연달아 앙코르가 터졌고 나중에는 그 자리가 신입생 환영회 인지 추송웅 환영회인지 분간할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었다.

그의 대학극 첫 무대는 연극영화과에서 마련한 셰익스피어 원작 "베니스의 상인"이었다. 그는 보잘것 없는 배역을 맡았지만 남들보다 먼저 연습장에 나와 먼지를 들이마시며 청소를 하고 가장 열심히 연습에 몰두했다.공연 직전 광대역을 맡았던 학생이 불성실한 연습을 이유로 탈락하게 되어 그에게 그 배역이 주어졌다.그는 훗날 그 배역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 "내 인생의 아주 중요한 의미가 되었다.그것은 평생을 광대로 무대 위에서 보내라는 숙명적인 암시였다"고 말했다.그러나 정작 공연 첫날, 그는 무대에 나가야 할 순간에 발이 떨어지지 않아 막 뒤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지도교수가 그를 무대 위로 떠밀었고,그 는 무대 바닥에 나뒹굴었다.그 순간 객석에서는 왁 하고 웃음바다가 일었다.

추송웅은 연기에의 집념과 노력으로 타고난 신체적 결함을 극복하고 극단 "민중"과 극단 "자유" 등에서 배우로 활동하며 어느덧 중견배우로 성장한다.1971년 제7회 동아연극 최우수 남자연기상을 수상하고 한해 걸러 또다시 최우수 남자연기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연극 배우 10년동안 52편의 연극출연료 수입금 총액이 10만 8천 6백원. 연출가인 최치림은 그의 딱한 사정을 알고 여러 차례 쌀을 사들고 그의 집을 방문했다. 동료 배우와 결혼해 이미 세 아이까지 두었지만 그의 생활은 비참했다.

"배우란 전생에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들만의 불행한 직업이야.그래서 배우는 가난과 싸우며 철저히 헐벗고 굶주릴줄 알아야 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이며 배우생활 10년동안 동가숙 서가식의 고된 생활을 묵묵히 받아들였다.그는 배우를 천형의 업이라고 생각했다.

배우생활 15년.별로 축복받거나 자랑스러운 것은 못되었어도 자축하는 의미로 준비한 것이 바로 "빨간 피이터의 고백".그는 6개월 동안 창경원의 원숭이 우리 앞에서 원숭이의 몸짓과 습성들을 관찰하고,나중에 창경원측의 허락을 받고 원숭이 우리 안에 직접 들어 가기도 했다.개막을 앞두고는 아예 극장에 이부자리를 갖다두고 먹고 자며 연습에 몰두한다.얼마나 이 모노드라마에 빠져 있었던지 나중에는 "실제 원숭이가 꾸물꾸물 기어나와 내 자신도 주체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연극이 개막되었다.공연장은 을지로에서 명동 성모병원으로 넘어가는 언덕배기에 있던 창고극장. 30평도 채 안되는 객석 1백 30명의 지하무대 위에 원숭이로 분장한 추송웅이 조명을 받으며 나타난다.프록코트의 예장을 한 원숭이는 익살스러운 몸짓과 화술로 관객을 단숨에 사로잡는다.공연시작 보름만에 예매표 1만장이 팔려나가는 한국연극사 초유의 "기적"이 일어난다.연극을 보러 온 사람들의 줄이 을지로에서 명동 성모병원까지 뻗어나갔다.

1977년 9월 9일자 조선일보는 "한국연극사에 신화 탄생,추송웅 선풍"이라는 제목으로 이 기적을 기사화한다.마지막날 공연 추송웅은 링게르를 맞아가면서 1일 4회 공연을 강행한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쓰러진 추송웅은 "세상이 노랗게만 보인다..."며 일어나지 못해 결국 약속했던 5회 공연은 취소된다.지방 순회 공연,다시 서울 공연."빨간 피이터의 고백" 열기는 좀처럼 식을 줄 몰랐다.연극의 불모지였던 울산에선 표를 사지 못해 돌아가는 관객이 더 많았다.

"이렇게 엄청난 결과가 일어날 줄은 저 자신도 몰랐어요"라고 배우는 말했다. 한햇동안 1백 63회 공연에 8만 5천명의 유료관객을 동원한 이 연극은 한국 신연극 70년사에 기념될 만한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고 막을 내렸다.이 연극의 성공으로 추송웅은 적지 않은 돈을 벌어들인다.결혼후 15년동안 합정동 창전동 서교동 상수동을 전전하던 셋방살이를 면하고 여의도에 아파트를 구입해 이사한다.

그 이후 추송웅의 연극은 거의 모두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다.이듬해 10월 26일 명동 코리아 극장에서 공연된 "우리집 식구는 아무도 못말려"에서는 2회 공연 수입금 1백만원을 받는다.이른바 극장이나 극단에서 예술적 업적이나 대중적 인기가 높은 연극배우나 희곡작가에게 하루 공연 수입금 전액을 지급하는 시혜 공연(Benefit Performance)의 첫번째 수혜자가 된 것이다.한편으로 추송웅은 "상업주의 연극의 원흉", "관객의 거짓 욕망에 야합하는 배우"라는 호된 비판을 받기도 한다.

1984년.일본 도쿄 신주쿠의 모차르트 살롱무대에서 열린 한국 현대예술시리즈 제1회 공연으로 "빨간 피이터의 고백"을 한국어로 공연한다. 2백석의 객석은 만원을 이뤘고, 아사히신문은 "환상적인 문화적 충격"이라는 찬사를 보낸다.추송웅은 쉬지 않고 "빨간 피이터의 고백"과 "우리들의 광대"라는 모노드라마를 서울과 지방의 무대에 올린다. 그동안 "빨간 피이터의 고백"은 총 4백 82회 공연에 15만 2천명의 관객을,"우리들의 광대"는 1984년까지 5백 12회 공연에 23만 5천명의 관객을 동원한다.그가 "빨간 피이터의 고백"을 공연하는 동안 무대에서 먹은 바나나가 7백개,포도가 5백근,관객이 땀 닦으라고 던져준 손수건이 3백여장이나 된다.

1985년 12월 29일 새벽 4시,"빨간 피이터의 고백" 지방순회공연을 끝내고 12월 9일까지 신촌의 한 극장에서 "우리들의 광대"에 출연했던 추송웅은 복통으로 경희대 부속병원에 입원한다.그리고 그는 깨어나지 못한 채 이날 오후 3시에 영원히 눈을 감는다.

- 글: 장석주 (1996년 세계일보 "기인열전" 중에서)



덧붙임_
빠알간 피이터 추송웅이 걸었던 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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