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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술 사주는 읽고쓰기

독서에도 습관의 때가 묻는다 : 장정일의 독서일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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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을 읽는 방법은 먼저 나쁜 책을 읽지 않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행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독서에도 습관의 때가 묻는다. 다음에는 더 좋은 책을, 방긋방긋 웃으며 읽고 싶다.

뭐가 나쁜 책인지 알아야 읽지 않을 수 있을 터인데 그것은 오로지 많이 읽는 수밖에는 없다는 말인가. 장정일의 말처럼 "알고 행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말이다.

며칠 전 <독서일기6>을 읽었다. 많은 세상에 나오지 않은 책을 내가 세상에 꺼내 놓았다. 이번 4권에서는 몇 권 되지 않는다. 소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여 건너 띄고 읽었다. 지금껏 7권까지 나왔는데 (다른 이름까지 포함한다면 9권, <공부>를 포함하면 10권이다) 번호를 채우지 못한 것을 구매해 모두 읽으려 한다. 읽으려 하니 구해진다. 인터넷 중고책방에서 배송비만 추가한다면 구매할 수 있었다. 마지막 남은 7권만 구매하면 된다. (7권도 절판이지만 일부 온라인서점에서 재고보유분을 판매하고 있다는 이유로 구매를 미루고 있다. 이러다가 또 헌책방을 기웃거릴 것임이 틀림없다.)

책 뒷면에 '본분 중에서'라며 쓰인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앞뒤를 알고 싶었다. 책을 읽는 내내 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한데 맨 마지막 글귀이다. 인터넷 검색에서는 도저히 그 존재를 찾을 수 없는 데이비드 로지의 소설 <교환교수>(심지, 1983)을 말하면서 쓴 글이다. 마지막 글귀라 후後는 없어도 전前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장정일이 말하는 前이 알고 싶다면 책의 맨 마지막을 읽어 보라.

책 속에서 지식을 얻고자 한 적이 없음에도 나는 늘 지식밖에는 못 얻었다. 아주 막연하게, 어려서부터 책 속에 쾌락의 길을 내고자 했던 내 소망은 기실 지혜를 얻고자 함이었으나 지혜에 눈뜨기보다는 지식이라는 무거운 짐만 얻었다. 오, 지혜여! 어떻게 쾌락을 얻을까!

마지막 문장은 나도 손이 오글거린다. 빼고 싶은 문장이다.

6권에서 장정일은 "시민이 책을 읽지 않으면 우중愚衆이 된다"며 "나쁜 시민"이라고 했다. 사람은 생각이 생물처럼 바뀐다. 성장이라 말할 수도 있다. 6권에 비해 다른 장정일을 보았다. 장정일은 성장함을 독자인 나도 느끼는데 나는 어떠한가. ...



덧_
(독서일기를 서평집이라 할 수 있을까.) 서평집을 읽고 내가 다시 세상에 내 놓는 책을 아래에 적는다.
장정일이 책에 대한 인용한 부분과 그것에 대한 생각이다. 장정일의 부연과 인용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았다. ( )에 부연된 것은 나의 생각이다.
오래된 책이라 절판이 많다. 부지런히 헌책방을 다니다 보면 만나게 될 것이라 생각하며...


장정일의 독서일기 4
장정일 지음/범우사

덧붙임_
하늘연못, 1998년 6월 초판 1쇄

+

<세상의 별은 다, 라사에 뜬다> 강석경 (살림, 1996)
(이 책을 읽고 싶은 것은 아니다. 이 책에 대해 씌여진 글이 6권에서 보았던 책이 기억나 적어 본다.)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이혼녀, 미망인, 별거중인) 여자들이 인도로 떠나는 까닭은, 비본질을 벗어나 본질을 찾겟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문명과 도시라는 혼잡과 결혼이나 제도 속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찾기위해서다. 이것 역시 나는 수긍한다. 그러나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도라니?

인도가 좋다는 한국인의 국적을 빼앗고 싶다. (과격하다) 그들은 인도에 대해 "그들은 본능적이면서 종교적이에요. 인도인들은 어려서는 공부를 하고 젊을 땐 생을 즐기고 기족을 부양하다가 말년에 모든 것을 떠나 홀로 성지를 순례하며 명상 생활을 하는 산야가 되는 것을 인생의 기본 과정이라고 생각하죠. 그렇게 실천해요. 그들의 본성에 따라서 말이죠. 그래서 난 인도인들이 가난과 무지 곳에서도 만족감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인도인만큼 제도와 관습에 맹종하는 민족도 없다고 생각된다. 가난과 무지 속에서도 만족감을 갖다니? 그건 세뇌의 일종일 뿐이다. 나는 혁명이 없었던 땅을 믿지 않는다.
...
구원과 안식을 찾아 인도로 온 한국 여자들이 사귀는 남자는 하나같이 서양인이다. ... 그들은 인도의 예술과 정신은 좋아하지만 인도인은 좋아하지 않는다. ... 그들은 과거의 온갖 자료더미 속에서 즉 인도의 옛 음악과 경전, 예술 속에서 자기가 사랑하는 인도를 조합할 뿐, 현재의 인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
인도로 간 (소설속 주인공) 여인들은 인도에서 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한국으로도 되돌아오지 않는다. 결국은 영국이나 이태리에서 살 게 될 것이다. 모르긴 해도 그 여인들은 어디에 살게 되든 인도인 흉내를 내거나, 인도를 팔아먹으며 살게 될 것이다. 오직 통과의례로서만의 인도.

(<우리안의 오리엔탈리즘>에 나오는 복제 오리엔탈리즘이 떠오른다. http://maggot.prhouse.net/2581

많은 한국인들은 영국인들과 똑같이 인도를 "반문명, 반현대의 이미지로 본질화"하면서 인도를 정신주의, 요가, 명상, 자연의 땅으로 묘사한다. 한국의 여행자나 작가들은 변화중인 인도의 현재나 역사에 대해 관심이 없을 뿐더러, 인도인과 대화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 서구인으로 인도를 보는 한국인들의 도착된 태도에 저자는 "나는 19세기 제국주의자 영국에게 감염된 우리의 인도보기를 복제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명명한다."

 36년 간의 일제통치는 우리에게 동양에 대한 멸시를 심어주었으며, 독립을 위한 민족자강 운동은 물론 독립 이후의 근대화 역시 일본과 마찬가지로 '서양에 동화하고 모방'하는 과정이었다. 인도는 우리의 후진성을 잊게하고 우리를 서양과 동일시하기 위해 상상의 이미지로 존재해야 한다.)


<책 밖의 어른 책 속의 아이> 최윤정 (문학과 지성사, 1997)
책 밖의 어른 책 속의 아이
최윤정 지음/문학과지성사
부모나 교사가 아이들 독서 지도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책 읽고 난 후에 토론이나 독후감 쓰기 같은 것보다는, 좋은 책 고르기에 심혈을 기울이는 일이다"고 강조해 말하는 이 책은, 어쩌면 자녀를 위해 좋은 책을 고르기 위해 고심했던 자신의 경험담이다.

좋은 동화는 직접 화법에 의존한 교훈보다도 간접 화법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라는 지적은 소설을 읽는 성인 독자들에게 시사하는 점이 있다. 대다수 성인 독자들은 자신이 읽은 소설에 대한 감상을 말할 때, 자신의 느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행동이나 서사로부터 교훈을 이끌어 내려고 한다. 까닭은 그런 식의 독후감 작성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정답을 찾아내는 식의 독법은 소설은 물론 영화, 보기까지 만연된 전염병이다. 그리고 그 질병 속에서는 달리 생각할 도리가 없다. 우리는 한 편의 소설을 읽고 천편일룰적인 정답을 얻어야 한다.

남과 달리 생각하는 일이 흉이 되고, '나'의 주체성에 대한 인식이 처음부터 거세된 교육은 아동의 창의성과 자주성을 저해한다.

언어 습득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그 어떤 기능 교육보다도. 아이의 생각의 질을 결정하고 생각의 질은 그 아이의 미래의 삶의 질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 어린이들의 읽을 거리를 상혼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에 있어, 우리는 아주 엄격하고 단호해야 한다.

(책을 읽고 같은 정답을 원하는 걸까. 읽는 이의 상황이 다 다른데, 모범 답안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아이들에게 무슨 책을 고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줄까.
이 책은 우연히 알라딘 중고책방에서 조금 들춰보다 그만둔 많은 책 중 하나이다. 이 글을 작성하고 구매해서 읽었다. 장정일이 말한 것 이외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작은 문고본이다.)


<아편의 쾌락과 고통> 토머스 드 퀸시 (펀앤런북스, 1996)
어느 영국인 아편 중독자의 고백
토머스 드 퀸시 지음, 김명복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술이 정신의 기능들을 흩뜨려 놓는 데 비해서, 아편은 반대로 정신의 기능들 속에서 가장 교묘한 질서, 법률, 그리고 조화를 이끌어 낸다. 술은 인간에게서 침착성을 빼앗아 가는 데 비하여, 아편은 그것을 대단히 고무시켜 준다.

이 책은 아편에 대한 예찬이면서 한편 예찬자의 아편 극복기이기도 하다. ... 아편의 양을 끈질기게 줄여 간 끝에 그는 아편으로부터 완전히 손을 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경험담을 적는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행복과 같이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주제에 관해서는 어떤 사람의 경험이나 시도에 대해 기꺼이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옳은 말이다.우리나라에서는 행복도 단체복처럼 하나로 재단되어 있다. 그래서 나와 다른 식으로 행복한 것을 사람들은 참지 못한다. 그런 일탈은, 반사회적, 편집증, 변태, 돈지랄(낭비), 이기주의, 개인주의 등등으로 타기되어 왔다.

(자기와 다른 식의 행복을 참지 못하고 같은 곳을 보라고 강요한다. 상대를 인정하는 사회가 진정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건전하고 행복한 사회다. 그런 사회를 추구한다.
소개한 책은 절판이고 최근 펭귄 클래식과 시공사에서 출간되었다. 두 판본 중 부록으로 추가된 펭귄의 것이 낫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번역은 어느 것이 좋은지 알 길이 없다. 그렇다고 장정일처럼 여러 판본을 읽을 생각도 그럴 여유도 없다.)


<문명의 기둥> 곤도 히데오 外 (푸른숲, 1997)

문명의 기둥
곤도 히데오 외 지음, 양억관 옮김/푸른숲

문명이 어떻게 정의하건 간에,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문명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개방성과 혼합, 동화를 바탕으로 성립되었다. 즉 이집트는 고대 중동 세계에서 가장 빨리 개화하여 고도의 문명을 달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력은 메소포타미아에 비해 훨씬 떠어진다. 까닭은 이집트 문명이 외부의 자극에 대해 폐쇄적이었던데 반해 메소포타미아는 이질적인 민족과 문화를 끊임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아 있는 남한과 북한이 통일 될 때 한국은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까? 근래에 회자되었던 흡수 통일의 문제점은, 남한만 북한더러 개방하라고 을러대고 흡수해 벌겠다고 윽박질렀던 점이다. 새로운 남북 관계와 통이르이 고리는 남한 스스로도 개방할 것이 있고, 북에게 흡수당할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걸 찾는 것이 아닐까?

책을 덮으며 다음의 인용을 가슴에 새긴다. "난세는 다양한 문화가 서로 접촏하는 기회를 만들고, 서로 다른 문화를 흡수하게 한다. ... 따라서, 진, 한 문화는 전국시대 없이는 성립할 수 없었고, 수, 당의 문화 역시 전대의 위진남북조 시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다."

(이 책을 언급한 것은 책에 내용보다도 장정일이 통일에 관해 언급한 부분을 다시 읽기 위함이다.)


<재즈의 역사> 루시엥 말송 (중앙M&B, 1997)
재즈가 재해석의 음악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시대의식을 함께 하기 때문이다. ... 재즈의 역사는 자기 모반의 역사다. 재즈는 자기 세대의 정신을 지키려는 지조가들과 그 지조를 안정화시켜 상업성으로 포섭하려는 음악경영자들을 한 축으로 하고 그 축을 무너뜨리려는 모반자들의 노력을 또 다른 축으로 각축을 벌여 왔고, 그것이 재즈를 대중음악이 아닌 예술의 경계로 인도한다.

저자는 이 책의 가장 마지막 줄에, 5년 간격으로 사망과 부할을 거듭해 온 재즈의 묘비명을 쓴다. "패배는 승리의 열매"였다고. 그것이 재즈 백 년의 역사다.

(독서일기에는 매번 재즈에 관한 책들이 있다. 그의 관심사가 재즈에 있음을 보여준다. "재즈가 재해석의 음악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시대의식을 함께 하기 때문"이라는 글귀를 소개하고 싶어 이 책을 적는다. 다시 한 마디로 재즈를 말한다면 "패배는 승리의 열매였다. 이것이 재즈 백 년의 역사이다.")


<러시아 혁명/레닌주의냐 마르크스주의냐> 로자 룩셈부르크 (두레, 1989)

그녀가 보기에 레닌은 "모든 권력을 노동자와 농민의 주중으로"라고 외치지만 실재로는 노동자 농민의 평의회인 소비에트는 아무런 권력 지분을 갖지 못했고, 허울뿐인 계급 독재는 소수 정치가들의 독재로 변질했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혁명의 이행기에 보통선거를 통해 구성된 대의체는 성가신 것으로 여겼으나,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중운동을 신뢰했고, 제도가 민주화되면 될수록 혁명은 강건해진다고 역설했다. "민주주의를 완전히 제거하는 식의 처방은 치료될 수 있는 질병 그 자체보다 더욱 나쁜 것이다."

그녀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자유도 인정하는 것이 진짜 자유"라며 반대자들에게도 "자유롭고 구속받지 않는 언론. 제한받지 않는 집회, 결사의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보장되지 않을 때 혁명은 공포정치 아래서, 관료제만이 판을 치게 된다는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책을 찾아보니 집에는 한 권도 없다. 그람시의 것과 함께 없다. 그녀의 생각대로라면 스탈린으로 넘어가 소련이 붕괴 된 것은 레닌의 책임일 수도 있다. 역사란 가정이 없다. 하지만 반대파에의 의견도 들었다면... 아쉽다.)


<성과 사랑 사이> 리처드 로즈 (문학사상사, 1997)
성과 사랑 사이
리처드 로즈/문학사상사
저자 스스로도 쓰고 있는 것처럼 "서양 문학의 어느 구석을 둘러보아도 자기 자신의 지극히 비밀스러운 성 체험을 솔직하게, 적나라하게, 노골적으로 탐구하고 있는 개인적인 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 까닭은 이 책이 가진 고백의 종류를 설명해 준다. 솔직하고 노골적이며 적나라한 "논픽션"은 다 고백록인가?

작가의 실제 성생활을 고백하는 한편 자신이 거쳤던 여성과의 성 체험을 기록했다. 그 고백과 기록 속에는 동성애 체험과 수음 애호가로서의 옹호, 현제 자신과 동거하고 있는 여자와의 체험도 들어 있다.

(솔직하고 노골적인 것은 다 용서되고 논픽션이어야 하는가. 픽션은 왜설이 되는가. 아마도 장정일은 이것을 말하고 싶은게 아닐까)


<에어프레임> 마이클 크라이튼
244p 읽다가, 비오는 가로등 밑의 쓰레기통 속에 집어넣다.
(책의 내용은 관심없다. 다만.
500여 쪽이니 절반 정도 읽다 버린 것이다. 나는 왜 버리지 못하는가. 책을 중간에 그만 읽을 수 있는 자유, 그건 독자의 권리이건만.)


<옛 거장들> 토마스 베른하르트
옛 거장들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현암사

나는 소위 인간에 미친 사람입니다. 천성적으로 인류에 미쳐 잇는 사람은 아니지만 인간에 미친 사람입니다. 오로지 사람만이 언제나 나의 관심거리였는데, 그것은 내가 사람들로부터 천성적으로 반감을 일으키키 때문입니다. ... 나는 사람에게만큼 그렇게 강렬하게 애착을 느낀 것은 달리 없었지만 그러나 동시에 사람 외에 그 무엇에도 그렇게 철저하게 거부 반응을 일으킨 적도 없습니다. 나는 사람을 증오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나의 유일한 인생의 목적입니다.

(흥미가 가는 책이다. 내용은 어렵다. 장정일이 쓴 내용도 어렵게 느껴진다. 책을 읽어도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포기하기엔 아쉬움이 많이 남을 것 같은 책이다. 장정일은 5쪽 넘게 이 책에 대해 말한다.몇 번 더 읽어 봐야겠다.)

우리가 소설을 읽다 보면, 면수가 넘어 갈수록 '뭐 이 따위 작가가 다 있어?' 하면서 책에 실린 저자의 사진을 몇 번이고 들춰보게 하는 작가가 있는데, 그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에 대한 극찬이 아닐까 한다. 아니라면 그냥 책을 덮고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적었을 것이다.)


<재즈와 클래식의 행복한 만남> 윈턴 마살리스
재즈 책을 보면 흔히, 재즈는 태생적으로 거리의 음악이고 고통과 울분이 뒤섞인 육체의 음악이라고 하는 그건 이론을 좋아하는 먹물들이나 하난 이야기고, 오늘날에는 가장 정적이고 분석적인 음악이 되었다. 다시 말해, 계층적으로는 중산층이요 연령별로는 중년이 듣는 감상용 음악이 재즈다. ... 재즈는 결코 청준에 호소되지 않는다. 간략하게 까닭을 말하자면, 재즈에는 억눌린 청춘을 대변할 입, 즉 가사가 없기 떄문이다.

재즈 인구의 빈약함은 비단 재즈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우리 나라의 모든 문화 부분이 재즈와 같이 허약한 토대 위에 서 있다는 말이고 다 같이 부실하다는 거다. 재즈에 영화, 연극, 문학, 미술 등을 맞바꾸어 보아도 같은 우리는 똑같은 한숨을 내쉴 것이다.

학교가 많고 학생이 많다고 모두 학자가 되지는 않는다. 교회나 절이 많다고 모두 성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한국은 모두는 안 되는 '그것을' 포기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다 성인을 만들려고 하고 다 학자를 만들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 지점에서 감가상각이 분실되고 명분만 남는다. 그러니 재즈를 전도하고 싶으면 이해하거나 말거나 곧바로 재즈의 진수, 재즈의 속옷을 보여줘야 한다.

(이 책을 읽고 싶진 않다. 이 책이 아니어도 가지고 있는 재즈에 관한 다 읽지 못한 책이 많다. 다만 이 책을 통해 우리나라 문화계 전반에 대한 불신감을 표하는 장정일의 글투를 다시 읽고 싶을 뿐이다. 이즈음 장정일은 외설시비로 재판을 받고 있을 때이다.

"학교가 많고 학생이 많다고 모두 학자가 되지는 않는다. 교회나 절이 많다고 모두 성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이 절절하다. 교육이 모두를 대학에 보내 학자를 만들려 하고 이 땅의 수많은 교회와 종교들이 성인처럼 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장정일의 말처럼 "명분만 남는다.")


<교환교수> 데이비드 로지 (심지, 1983)
(책 정보도 없고 절판을 안내하는 것도 없다. 이 책을 어떻게 구해야 하나. 도서관에서 먼저 찾아봐야겠다.)
연회가 따분해진 영문과 교수들이 둘러앉아 '굴욕게임' 이라는 것을 한다. 그 게임은 "성공하고 싶은 병적인 충동과 무교양으로 간주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병적인 공포심"이 사정없이 충돌하는 놀이로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참가자들은 돌아가면서, 자신은 읽지 않았으나 다른 사람은 대부분 읽었을 게 분명한 책 이름을 하나씩 댄다. ... 이 경기의 요체는 누구나 필독했을 게 뻔한 고전이나 명작 가운데 본인 미처 읽지 못했던 책을 고백함으로써 자신의 무교양을 솔직히 까발려야 한다.

나도 <햄릿>을 읽지 않은 하워드 일봄(소설 속에서 <햄릿>을 읽지 않았다고 굴욕게임에서 고백하여 종신 재직권 심사에서 떨어진  영문과 교수)이 아닌가? 아니, 문제는 그게 아니고, 너는 네가 읽은 책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나이가 들수록 굴욕이 철철 넘치는 기분이다. 그래서 다시 읽고자 시도한 소위 고전들과 명작들. 하지만 또 고백한다. 지난해 봄 까뮈를 다시 읽어보겠다고 <전략>과 <페스트>를 읽고 단 한 줄의 감상도 쓰지 못했던 때의 막막함.

(이 다음 단락이 앞서 소개한 문장이 이 책의 마지막이다. 다시 한번 옮겨 적는다.)

책 속에서 지식을 얻고자 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지식밖에는 못 얻었다. 아주 막연하게, 어려서부터 책 속에 쾌락의 길을 내고자 했던 내 소망은 기실 지혜를 얻고자 함이었으나 지혜에 눈뜨기보다는 지식이라는 무거운 짐만 얻었다. 오, 지혜여! 어떻게 쾌락을 얻을까!

(버지니아 울프가 매년 <햄릿>을 읽어야 한다고 해서 작년 김정환이 새롭게 번역한 빨간색 예쁜 장정 <햄릿>을 사서 다 읽지 못했다. <햄릿>을 읽은 적이 없지만, 햄릿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햄릿>을 읽어야겠다.
매년 책을 읽지만, 고전과 명작에 대한 부담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마치 고전을 읽지 않으면 무지의 수렁에 빠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먼저 "병적인 공포심"을 떨쳐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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