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청소년에게도 필독도서이다. 책에는 나름의 해석이 들어있다. 하지만 그 해석을 보면 과연 옳은지 의구심이 든다. 아이들에게 책을 보라고 할 수 있는 환경이 되는가. 특히 아동도서와 청소년 도서에는 어쭙잖은 해석을 해 책의 질을 떨어뜨리고 보는 이에게 혼란을 가중시키는 경우가 많다.
공산주의 혁명이 절대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 작품이며 오웰이 《동물농장》에서 말하려고 한 것은 바로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비판이다. 공산주의는 개인이 재산을 갖지 않고 모든 사람이 함께 일하고 나눠 갖는 계급 없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려는 사상이다. 하지만 돼지가 점차 다른 동물을 지배하면서 이들 사이에 다시 계급이 생겨나고, 지배층은 다른 동물의 노동을 착취한다. 오웰은 공산주의 이론이 현실에서는 이론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웰이 사회주의 혁명을 포기하거나 잘못되었음을 보여주고자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오웰은 <우크라이나판 서문>에서 "1930년 이후 나는 소련이 진정한 사회주의라고 부를 만한 쪽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증거는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지배자들이 어떤 권력층보다도 더 확고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계급 사회로 변모하는 분명한 조짐을 보았다"고 했다. "만약 우리가 사회주의 운동의 부활을 원한다면 소비에트 신화는 반드시 파괴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오웰이 진정으로 하고자 한 이야기는 스탈린주의이며 전체주의에 대한 경고이다. 오웰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누구보다 열망했던 인물이다. 러시아 혁명이 독재자 스탈린의 등극으로 애초의 이상과는 다르게 전체주의적 상황으로 흘러갔기 때문에 자신의 사회주의적 전망이 점점 절망적으로 흘러간 것이지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적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이 돼지들과 인간들이 서로 완벽한 화해를 하는 것으로 끝난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이것은 나의 의도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돼지들과 인간들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언성을 높이며 입씨름하는 것으로 이 소설의 결말을 계획했다. 소설의 결말이 왜 바뀌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단지 오웰이 예측한 대로 돼지와 인간의 좋은 관계는 2차대전 종전으로 끝이다. 각자 자기의 길을 갔다.
마르크스, 스탈린 그리고 트로츠키를 연상하게 하는 동물이 나온다. 여기서 레닌은 왜 등장하지 않는 것일까? 소비에트 혁명의 태동기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스탈린주의로 불리는 전체주의가 사회주의 혁명을 망친 주범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가정 없는 역사는 발전이 없다. 트로츠키가 스탈린을 대신해 레닌의 후계자가 되었다면 소련은 아직도 지도에 남아있을까?
이 책은 소련이 승전국으로 2차대전에 참전했을 당시에 쓰였다. 오웰이 보기에는 소비에트 혁명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지금 소비에트는 지구에 없다. 그렇다면 소비에트 혁명은 실패인가? 누구도 그 혁명에 문제가 있다고 단언할 수 없다. 문제는 혁명의 진행과정에 나타난 돼지의 권력욕이다. 앞으로 사회주의 혁명에서 실패를 겪지 않으려면 돼지들의 권력욕을 배제하고 이겨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소비에트에 국한된 이야기라고 한정 지을 필요 없다. 수많은 독재자가 처음부터 독재를 내세우며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구국의 결단이며 혁명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 돼지는 점점 변한다. 그들이 경멸의 대상이며 축출의 대상인 인간을 닮아간다. 아니 그들의 행태를 답습한다. 하나같이 정당성과 당위성을 말한다. 인간의 탈을 쓴 돼지인지, 돼지의 탈을 쓴 인간인지 구별할 수 없다.
돼지를 한 번 보고 인간을 한 번 보고, 인간을 한 번 보고 돼지를 한 번 보고, 번갈아 자꾸만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미 어느 쪽이 인간이고 어느 쪽이 돼지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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