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를 만들지 않는다. 그나마 있는 의미도 지워낸다 :《Axt》

2015.09.01 07:30 行間/향기로운 시와 소설



싼 맛에 샀다. 뭔지도 모르고 문학잡지라 하기에 샀다. 가격이 저렴해서인지 많이 팔린다고 한다. 2,900원이다. 그래서 샀다. 가격보다 인터넷에서 요즘 보기 드물게 많이 팔린 창간호라는 말에 혹해서 샀다는 게 옳다.

불친절하다. 표제가 《Axt》이다. 나는 ‘Art and Text’의 약자로 생각했다. 아니다.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라는 카프카의 멋진 말로 마무리를 시작한다. 그래서 독일어로 ‘도끼’인 줄 알았다. ‘Axt’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어설픈 독일어 실력으로 발음대로 읽어야 할까? 편집위원의 가방끈을 따라가지 못하는 나 같은 독자는 힘들다. 그냥 ‘도끼’라 했으면 좋았을 텐데.

“《Axt》는 작가를 위한 잡지가 되면 좋겠습니다. 독자는 물론, 소설가끼리 활발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출발부터 독자를 위한 잡지가 아니다. 독자와 소설가가 활발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을 어떻게 구현한다는 건지, 단지 희망 사항인지 의구심이 든다. 그래도 창간호이니 미래지향적인 생각을 하고 출발하는 게 나쁘진 않다.

표지부터 살펴보면 이름만 알고 있는 천명관의 사진이 멋지다. 시작은 여러 편의 서평이다. 재미없다. 왜 서평부터 시작했을까? ‘작가를 위한 잡지’를 추구하기에 독자는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몇 가지 그림과 텍스트. 의미 두지 말자. 그저 텍스트일 뿐.

“의미를 만들지 않는다. 그나마 있는 의미도 지워낸다.”

천명관의 인터뷰는 신선하다. 문단과 문단 바깥의 경계에 서 있다고 한다. 달리 생각하면 언제든지 문단 안쪽으로 넘어갈 수 있는 자세를 유지한다는 게 아니지 않으냐 반문해 본다. 문창과에 관한 발언은 너무 많이 들어 물린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지면에서 공개적으로 '선생님'을 언급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천명관도 "실은 나도 선생님이 무섭다. 하지만 이제 오십이 넘는 나이다. 적당히 처신 잘해서 문단의 원로로 늙어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라고 했다. 막 등단한 이십 대 문청에게 적당히 처신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문창과에 진학하기 위해 입시 과외를 받고 거기서 작법을 배우고 선생님의 말씀과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문단 생활을 한다는 건 내내 선생님의 평가와 심사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몇 개 단편, 단편의 처음은 정경린이다. 신경숙이 표절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정경린도 그것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한데 잡지 창간호의 첫 번째 단편이다. 별 의미 없이 받아들일 수 있지만 불편하다. 그리고 몇 개의 장편이 이어진다. 장편은 다음이 궁금하다. 만일 이 책의 'no. 002'를 산다면 그것은 오롯이 장편 때문이다.

작은 활자, 번뜩이는 종이, 가독율이 떨어진다. 다른 종이에 비해 무겁다. 여성 월간지도 아닌데 굳이 좋은 종이로 무겁게 만들 필요가 있나 싶다. 편집 또한 가독성에 친절하지 않다. 모든 게 독자는 두 번째이고, 첫 번째는 만든이라는 생각이다.

제호의 호수가 세 자리다. 나눠보니 999호까지 나온다면 166년이다. 충분하다. 언제까지 이어질까. 독자에게 조금만 친절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또한 만드는 이의 맘인지라 내가 어찌할 수 없다.


악스트 Axt 2015.7.8
악스트 편집부 엮음/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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