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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에서 - 정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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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에서
- 정희성 『답청』


실패한 자의 전기를 읽는다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실패를 위해
누군가 또 부정하겠지만
너는 부정을 위해 시를 쓴다
부질 없는 줄 알면서 시를 쓰고
부질 없는 줄 알면서 강이 흐른다
수술을 거부한 너에게
의사는 죽음을 경고했지만
너는 믿지 않는다
믿지 않는 게 실수겠지만
너는 예언하지 않는다
예언하지 않아도 죽음은 다가오고
예언하지 않아도 강이 흐른다
네 죽음은 하나의 실수에 그치겠지만
밖에는 실패하려고 더 큰 강이 흐른다


우리는 모두 병상에 있다. 멀쩡한 사지가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 풍경조차 하나의 커다란 병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험한 세월의 연속이다.

병상에 누운 자들은 상념에 잠긴다. 길고 무료한 시간, 지난 날의 자신을 되돌아보고 곱씹는다. 자리에 누워본 사람만이 깊이 지난날을 반성하게 마련일 것이다. 그리고 결코 다시는 이 처참한 지경을 맞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실패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또다른 실패가 다가와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이다. 그러기에 시인의 선언은 아프게 그러나 절실하게 다가온다. "실패한자의 전기를 읽는다/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새로운 실패를 위해"

지금은 병상에 누운 우리 모두를 위해 이 시를 역설적으로 읽자. 화려한 날의 영광이 아니라 어둠 저 깊은 곳에서 빛나는 밝은 미소 한줄기를 간직하기 위해.

고운기(시인,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월간 Bookpar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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