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만으로도 설레이게 한다.
그는 누구인가?
얼마전 "바보들의 행진"을 다시 보았다. 개봉 당시에는 코 흘리게라 볼 수가 없었고 지금은 없어진 국도극장에서 재개봉한 영화를 본 기억이 있다.
찰영 후 30분 분량이 삭제되어도 그 영화는 아직도 신선하다.
내가 좋아하는 한장면. 극증 하재영은 비가 와도 담배를 피울 수 있는 파이프를 만들고 싶어한다. 언제나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세상....
하길종 추모제를 한번 하였으면 한다. 언제 그의 영화를 전부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돌아오는 2월28일이 하길종의 기일이라고 하니 하늘로 돌아가 우리를 보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하길종, 영화천재에게 전하는 늦은 사과(2008/01/06) 황기성의 하길종에 대한 추억 : 내가 대한민국 속편감독입니까?
2006년 02월 28일 이대원 기자
지금으로부터 27년전. 그러니까 1979년. 충무로의 한 허름한 술집에서 하길종은 쓰러졌다. 그날은 결론적으로 그의 마지막 연출작이 된 <병태와 영자>가 스카라 극장에서 연일 매진 행진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극장이 아닌 술집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다시 <바보들의 행진>이 보고 싶었다
▲하길종 감독 © |
1999년 영화잡지 <키노>의 2월호에 하길종의 이야기가 실렸다. 난 그의 영화 중에 <바보들의 행진>밖에 보지 못했지만 잡지 키노의 팬이였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그 기사를 읽었다. 하길종이 잘생긴 감독이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바보들의 행진>이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그리곤 하길종은 내 머리속에서 다시 잊혀졌다.
그 이후로 난 오랜 시간동안 무형의 감옥에서 시달렸고 영화보다는 산다는 것에 대해 관심이 더 많았다. 난 지긋지긋 했던 그 시간을 보내고 결국 2002년 겨울에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갑자기 <바보들의 행진>이 보고 싶었다. 하길종이라는 사람은 머리 속에 없었고 <바보들의 행진>만 남아 있었다. 그렇게 하길종은 다시 한번 잊혀졌다.
2005년 겨울. 영화 평론가 정성일이 예전 정은임의 영화음악실에서 이야기한 대목을 들었다. 하길종이 락밴드 도어즈의 보컬이었던 짐모리슨, 지옥의 묵시록과 대부를 연출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와 미국 UCLA 영화대학원 65학번 동기라는 이야기였다. 난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다. 심지어 스타워즈의 조지루카스는 66학번으로 하길종의 1년 후배이다. 난 하길종이 궁금해졌다. 1996년 고3때 영화로 처음 만난 이후 잊었던 하길종이 10년만에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다시 <바보들의 행진>이 보고 싶었다.
2006년 연세대학교 상대 새내기새로배움터에서 강연을 하나 하게 되었다. 영화를 본 뒤 영화이야기와 대학 새내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처음에는 흥미로운 제안이어서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영화를 선정해 달라는 말에 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생각나는 영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민 중에 하길종이 떠올랐다. 그의 <바보들의 행진>을 보자고 했다. 그 순간에는 어느정도 즉흥적인 생각이었다. <바보들의 행진>은 DVD도 없고 비디오 테잎도 구하기가 어려웠다. 인터넷으로 서울에 있는 중고비디오 가게를 마구 연락하여 드디어 이 영화 테잎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기뻤다. 하길종이 무언가 대답한 것 같아서 말이다. 그러나 난 하길종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비극의 시대, 하길종의 영화 인생
▲바보들의 행진 © |
수재라서 그랬는지 3년후 1959년, 김지하는 서울대 미학과를, 하길종은 불문과에 입학한다. 당시 서울대 문리과에서 재미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과 서울대 문리대 거지클럽을 만들어 정말 거지처럼 놀았다고 한다. 그리곤 1960년 4.19를 맞이한다. 희망과 열정을 넘치던 하길종은 신발 밑창에 피가 흥건할때까지 길거리를 달리고 구호를 외쳤다. 그러나 이듬해 하길종은 박정희의 5.16쿠테타로 좌절한다. 그리곤 머리를 갂고 계룡산 동학사로 들어간다. 대학을 졸업한 후 하길종은 신상옥 감독이 만든 신필름에서 잠시 일하다가 불문과라는 이유로 에어프랑스에 입사한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별로 있지 않았다. 대학시절 하길종은 시인 이상을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도 <태를 위한 과거분사>라는 초현실주의적 시가 가득 담긴 시집을 자비로 출간했다. 몇개의 시를 읽어보았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시인이 되고 싶었던 하길종은 어느 순간 영화를 발견하였다. 그리곤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간다. 그때가 1964년이다.
하길종은 돈이 없었다.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접시닦이, 주유소 점원, 심지어 시체 염까지 하면서 돈을 벌었다. 아니 살아냈다. 그리곤 센프란시스코 아카데미 오브 아트에 입학한다. 거기에서 사진예술과 미술을 공부했다. 일년후 하길종은 드디어 UCLA 대학원 영화과에 입학한다. 거기에서 하길종은 인생에서 두번째 운명적 만남을 한다. 짐모리슨이냐고, 아니면 코폴라냐고. 아니다. 하길종은 당시 한 여자를 만났다. 그 여자의 이름은 바로 전채린이다. 전채린. 그는 독일에서 31살에 나이에 자살한 독문학자. 바로 전혜린의 동생이다. 난 이런 경우를 두고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말하고 싶다. 전채린을 열렬히 사랑한 하길종은 그와 결혼하고 아들 하지현이 태어난다. 난 갑자기 하지현이 만나고 싶어졌다. 그러나 난 그를 모른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걸 비극이라 말하고 싶다.
하길종은 영화연출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여주었다. 졸업작품 <병사의 제전>은 전 미국 영화과 학생을 대상으로 MGM영화사가 4명에게만 주는 메이어 그랜드 상을 받았다. 그는 천재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처럼 말이다. 미국에서 부교수의 제안과 여러가지 유혹이 있었지만 하길종은 1970년 가을, 조국으로 돌아온다. 여기서부터 비극은 시작된다. 여기서부터 그의 인생은 딱 9년 정도이다.
조국으로 돌아와 하길종은 <화분>과 <수절>이라는 영화를 찍었다. 그러나 망했다. 시대를 앞서갔다. 그 시대는 박정희의 군사독재 시절이었다. 어떤 자유도 허용되지 않았던 박정희의 미친시대였던 것이다. 물론 대중이 이해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하길종은 고뇌했다. 결론은 대중과 소통할 수 없다면 영화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스포츠신문에 연재되어 공전의 히트를 치던 소설, 최인호의 <바보들의 행진>을 연출한다. 흥행은 대성공이었다. 영화 <바보들이 행진>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룬다. 왜냐하면 너무 할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다. 한가지만 말한다면 영화 <바보들의 행진>은 시나리오가 5번 수정되었고, 완성된 다음에는 무려 30분이나 삭제당했다. 하길종은 이때부터 죽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박정희가 살인마라는 등식은 이렇게 성립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보들의 행진'의 한 장면 © |
영화를 사랑하는 자. 하길종을 기억해야 한다
하길종은 무차별 폭격기 같았다. 대학교수로서 대학생들에게 자유의 폭격기였다. 평론가로서 영화계의 비판의 폭격기였다. 영화감독으로서 하길종은 시대의 저항 폭격기였다. 그러나 그의 편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더 빨리 죽어갔다. 매일 술과 담배.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불우한 시대와 부합하지 못하는 사람은 술과 담배가 친구인 법이다. 그 뒤 하길종은 4편의 영화를 더 연출했다. 그리곤 1979년 바로 오늘. 충무로 한 술집에서 쓰려진 것이다. 그가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운명적 만남은 바로 죽음이었다.
당신. 하길종을 기억하는가. 아니 하길종은 아시는가. 영화를 사랑하는 자. 하길종을 기억해야 한다.
"살아남은 자. 모두 피고"라고 일갈했던 하길종. 좋은 영화를 왜 못만드냐고 제발 묻지 말라고 했던 하길종. 살아있는 것도 다행이라고 했던 하길종. 그는 나에게 어떻게 살 것이냐고 조용히 묻고 있다. 빔벤더스는 <베를린 천사의 시> 마지막 크레딧에 천사 명단 한명을 더 추가해야 한다. 하길종은 천사였다. 그러나 오즈 야스지로처럼, 프랑소와 트뤼포처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처럼 영화를 만들 수 없었다. 천사였다가 인간이 된 것이 그들이라면 하길종은 끝내 천사로 남았다. 이 땅에, 이 조국에서 그렇게 떠다니고 있다.
2월 28일. 오늘은 하길종 감독이 1979년 죽은 바로 그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