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레논 음악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
레논과 요코의 만남과 이별까지의 이야기다. 즉 1966년 부터 1980년 까지의 기록이다. 존 레논에게 오노 요코가 없었다면이라는 상상은 할 수 없다. 레논에게 요코라는 여인의 존재는 크다. 아방가르드를 추구하려고 하던 레논에게 힘을 주고 상상력을 가지게 만든 여인이다.
요코와 레논의 운명적인 첫 만남
우리가 요코에 대하여 알고 있는 이미지는 두가지다. 하나는 비틀즈를 해산시킨 주범, 그리고 줄거리도 없이 벌거벗은 엉덩이를 잔뜩 화면에 담아 그걸 예술이라고 팔아먹는 제정신이 아닌 여자라는 것이다.(마녀에서 예술가로 오노요코 中 이하 오노요코)
요코는 금융 사업가의 딸로 태어나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는 그녀가 피아니스트가 되길 원하였지만 그녀는 다른 꿈이있었다. 같은 음악이지만 연주자가 아닌 작곡가가 되길 원했다. 14살 되던 해 요코는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요코는 전위예술가로서 뉴욕에서 먼저 알려져 있었다. 레논과의 첫 만남은 그녀를 싫어하여 레논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던 폴 메카트니의 소개로 이루어졌으니 아이러니하다. 메카트니는 레논보다 먼저 아방가르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요코는 레논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레논이 누구인지 모른다니 이해가 가지않지만 그녀는 몰랐다. 1966년이니 레논이 문제(?)의 예수발언으로 세상을 들썩이게 하였던 바로 그 시기였다. 예수발언뿐 아니라 당시 비틀즈를 모른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We're more popular than Jesus now. I don't know which will go first - Rock & Roll or Christianity.
지금 우리는 예수보다도 더 인기가 있다. 로큰롤이 더 먼저인지 기독교가 더 먼저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존 레논 생전에는 그렇게 싫어하였지만 세월이 흘러 메카트니와 요코는 같이 세션을 하게된다. 1995년 1월28일 요코와 Sean는 Paul의 집에 초대되었다. 그리고 Paul의 프라이베트 스튜디오에서 〈HirosimaSky is Always Blue〉라는 요코의 노래를 요코(vo), Paul(b,cho), Linda(key), 거기에 Paul의 아들 James가 기타를 치고, Paul의 3명의 딸은 퍼커션, Sean 는 하프시코드, 라는 더블 패밀리에서 세션했던 것이다.
11월 9일은 특별한 날이 많다. 1918년에는 황제 빌헬름 2세가 퇴위하고 독일의 첫 공화국이 탄생했다. 1938년에는 나치가반유대 정책을 준비한 날이고 1989년에는 동독이 마침내 국경을 연 날이기도 한다.(오노요코 154쪽) 요코의 전기에서는 이날을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마리안느 페이스풀의 첫남편인 존 던바는 '요코가 존 레논이 누구냐고 자꾸 묻는 요코가 믿기지 않다'고 말한다. <인디카 갤러리>를 운영하던 존 던바가 요코의 전시회 <전시회 2번 : 미완성 그림과 오브제들>의 초대장을 보내면서 둘의 운영적인 만남은 1966년 11월 9일 시작되었다. 1980년 12월 8일 뉴욕에서 총에 맞아 '새처럼 자유롭게(Free as a Bird )' 날아가기까지 이어져 나갔다. 그가 말하던 64살(When I'm 64 )까지 살지 못하고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그의 죽음을 전하는 NewYork NY Radio - The Night John Lennon Died .
그는 누군가의 도움(Help )가 필요했다. 도움이라기 보다는 그를 이끌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 시기에 요코가 그에게 나타난 것이다. 물론 요코에게도 레논과의 만남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도전'이었다. 요코는 레논과의 첫 만남에서 그의 약점을 발견하였다. 레논은 거친 농담을 즐기며, 극단적이고 편협한 기질을 지닌 냉소적인 인간이었다. 다른 비틀즈 맴버들과 마찬가지로 음악뿐만 아니라 섹스에도 중독되어 있었다.
레논에게 요코, 요코에게 레논의 의미
두 사람은 상대방한테서 발산되는 에너지가 행동과 변화를 원하는 자신의 소망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채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오노요코 185쪽)
첫 만남이후 레논은 곧 요코에게 매료되었고 당시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개념 미술을 접하게 된다. 새로운 예술을 향한 레논의 관심은요코의 지원을 받아 구체화되었으며, 두 사람은 얼마 후 함께 예술 활동을 하게 된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의 주도권은 늘그녀쪽에 있었다. 비틀즈 맴버 존 레논을 좁아터진 음악세계에서 구출하여 다른 영역으로 이끈 계기가 바로 그녀의 아이디어였기 때문이다.(오노요코 14쪽)
요코는 "조형 예술가로 활동했던 시기와 음악가이자 정치 참여 예술가로 활동한 시기"(오노 요코 16쪽)로 나누어 진다. 레논과만난 시기가 바로 그녀에게는 전환점이 되었다. 물론 레논도 전환점이 되었던 것은 물론이다.특히 여성해방 투쟁은 남편이 세상을떠난 후 그녀의 정치적 목표가 되었고 마녀라는 이미지를 더더욱 부채질 하였다. <여성은 세상의 검둥이(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는 그녀의 활동을 요약한 문장이라 할 수 있다.(오노 요코 18쪽)
요코는 레논과의 사랑과 결혼을 통하여 예술가로서도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만일 위대한 스타와 겹합이 없었더라면 그년는세계무대에서 무명의 예술가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녀의 예술가적 자질은 충분히 소유하고 있었다. 당시 뉴욕에서 주목받기시작한 앤디 워홀도 그녀의 기발한 아이디어에 적잖히 감명을 받았다.
레논이 그녀에게 영향을 주었다기 보다는 그녀가 레논보다 정신적으로 우월했기 때문에 그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 이언 맥도날드
두사람의 관계의 주도권은 요코에 있었다. 레논의 성장과정을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일찍 어머니를 잏고 아버지에게 마저버림받은 레논은 이모 미미의 집에서 자랐다. 따라서 요코는 레논에게는 어머니 대신이었다. 요코가 레논보다 7살이나 많았기때문만은 아니었다. 레논이 생각하는 요코는 출생과 교육, 예술을 바탕으로 독립심과 자의식을 충분히 갖툰 여성이었다. 그의 마음을끌었던 점도 허약하거나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는 법이 절대 없었던 그녀의 강인하고 진취적인 성격이었다. 레논은 요코에게서우러러보고 경탄하고 그녀에게서 안식을 찾을 수 있었다.(오노요코 195쪽)
비틀즈 인도에 가다
모델 패티 보이드와 갓 결혼한 조지 해리슨은 66년 인도로 갔다. 그녀는 후일 에릭 클립튼이 Layla 로 불려 헤리슨을 떠나 클립튼의 품으로 갔다. 그는 시타르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68년 맴버들은 인도로 향했다. 레논도 신시아와 같이 인도로 갔다.
사랑과 마약을 노래하다
멤버들은 각기 생활을 하면서 술과 마약 그리고 섹스에 빠져있었다. LSD를 의미하는 듯한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를 비롯하여 Being for the Benefit of Mr Kite ,A Day in the Life 는 레논이 마약에 취한 상태의 경험을 음악적으로 형상화한 것들이다.
67년 6월 25일, 4억이 넘는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비틀즈는 All You Need is Love 를 불렀다. 희망, 사랑과 평화의 메세지를 보낸 것이다.
비틀즈의 해산과 결혼
요코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된 것은 레논에게는 새로운 빛을 얻은 것이지만 한 여인에게는 불행의 시작이 되었다. 부인이던 신시아는 버림을 받게 되었다. 아들인 줄리안도 마찬가지다. 메카트리는 그런 줄리안을 위하여 Hey Jude 를 만들었다.
신시아와 헤어지고 레논은 요코를 집으로 초대하여 개인 스튜디오를 보여주었다. 비틀즈와는 상관없이 나름의 음악을 녹음하던장소였다. 둘은 즉흥적으로 음악을 만들어 보자고 하였고 이렇게 작업한 결과가 <미완성 음악 1번 : 두 동정녀>라는제목으로 비틀즈 음반에 실렸다. 1968년 5월 20일의 일이다.(오노요코 189쪽)
요코는 비틀즈와 레논의 팬들로 부터 수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비틀즈의 해산이 그녀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의 해산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물론 그녀때문에 좀 더 빨라진것은 사실이다. <Yellow Submarine>의 Hey Bulldog 을 녹음하고 있는 동안 요코가 처음으로 애비로드에 있는 스튜디오에 모습을 드러냈다. 비틀즈에게 불문율처럼 되어있던 녹음실에 그녀가 와 관여를 하게 되었다. 맴버들은 요코의 행동들이 맘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레논은 <White Album>에서 그녀를 노래(Julia )한다.노래속에 나오는 Ocean Child가 요코를 의미한다.
- 조지 해리슨의 '송라이터'로의 놀라운 성장이다.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레논과 메카트리의 자존심을 건드리기는 충분했다.
- 레논의 정치적인 관심이다. 또 레논은 비틀즈와는 전혀 무관한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 비틀즈 맴버들을 동원해 순회공연을 나설려는 매카트리의 독선 때문이었다. 레논과 해리슨은 못마땅했고 해리슨은 걸핏하면 탈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 67년 8월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자살이다.
결국 여러 요인이 있었지만 비틀즈의 해산에 그녀가 한 몫을 한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조지마틴은 <White Album>을 낼 당시 눈치채고 있었다고 훗날 말한다.
화이트 앨범은 어쩐지 우스꽝스러운 것이었어요. 인도에서 돌아올때 이미 개별적인 음악가로 변신해 있었답니다. 단지 맴버들의 도움을 얻어 자신들의 음악을 완성하려고 한 것뿐이죠.
비틀즈는 해산 직전까지 치달리고 있었다. 맴버들은 요코의 비난 수위가 높아만만 갔다. 레논은 요코만이 필요했다. 요코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레논도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1969년 5월말 비틀즈의 이름(?)으로 싱글 The Ballard of the John and Yoko 가 발매되었다. 제목만 보면 레논과 요코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레논과 매카트니의 작품이다. 사실 최고 인기를 누리던 비틀즈 시대를 추억하는 노래이다.
레논은 요코를 존경을 담아 수녀원장(MotherSuperior)라고 불렀다. 그녀는 애인일 뿐 아니라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채워준 존재였다. <WhiteAlbum>의 Happiness is a Warm Gun에 'Mother Superior jump the gun'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 곡도 요코에 대한 찬가라 할 수 있다.
이 곡은 레논이 만든 곡 가운데 가장 노골적으로 섹스를 노래한 곡이다. BBC는 방송 금지를 하였다. 자위행위를 암시하거나 여성의 음핵을 자극하는 행위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당시 섹스는 은밀한 것이 아니었다. 일상의 일부였고 노래로 표현 한 곡들이 많았다.
하지만 레논의 노래가 언제나 다층적 의미를 담고 있듯이, 이 곡도 전쟁에 대한 간접적인 저항을 볼 수 있다. 즉 반전주의자들에게 보내는 평화의 메세지라 할 수도 있다.
1968년 11월 21일 요코는 유산을 하고 말았다. 태아의 심장박동을 녹음해 두었다. 후일 <Baby's Heartbeat>를 탄생하게 만들었다. 아이를 위하여 이름도 지어놓았다. 존 오노 레논 2세. <Life with the lions>에 담겨져 있다. 그러나 요코는 70년 8월 또 한번 유산하였다.
요코나 레논은 가정적인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유산을 한 이후 둘은 아이를 갖기위하여 노력을 한다. 1975년 10월 9일 레논은 35번째 생일을 맞는다 그리고 새벽 2시 아들 션을 제왕절개로 얻는다.
1969년 3월 둘은 결혼하게 된다. <Wedding Album>으로 그들을 결혼을 더욱 알리게 되었다.
1969년 1월 30일, 비틀즈의 역사상 가진 멋진 애플사의 옥상에 그들의 마지막 공개 콘서트를 열었다. Dig a Pony, I've Got a Feeling, One After 909 그리고 Get Back 을 연주하였다. 나중에 <Let it be>에 수록되었다. 경찰은 이 공연때문에 몰려드는 군중때문에 지붕으로 올라가 공연을 중단시켜야 되었다. 69년 8월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앞서는 획기적인 팝 문화 사건이었다.
비틀즈는 <Abby Road>를 발매하며 정점에 도달했다. 내부적으로는 해체로 한 걸음 더 나서고 있는 상황이었다.
(계속...)
덧붙임_
참고 도서
<음악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 한길사, 2001년 초판 1쇄
마녀에서 예술가로 오노 요코
덧붙임_둘
종교도 국가도 소유도 없는 나라
Working Class Hero를 기다리며
존 레논에게 오노 요코가 없었다면...
Imagine - John Lennon
Plastic Ono Band - John Lennon
Imagine (OST) - John Lennon
덧붙임_셋
몇 년 묶힌 존 레논을 놓아주어야 한다.
텍스트와 음악이 어울어져야 이 글이 의미가 있는데 저작권(지극히 당연하지만 불편하다)이라는 것으로 인하여 몇 곡이 이 글을 보는 이들이 들을 수 있을지 나도 궁금하다. 이러한 연유로 발행을 미루어 왔는데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되지도 않을 고민을 하고 있었다.
미래의 전자책은 텍스트와 멀티미디어가 공유, 공감을 느끼는 형태가 아닐런지. 그렇게 된다면 저작권 문제는 더욱 더 복잡하게 되겠지만 보는 이와 다른 듣는 이는 즐겁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