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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인간이 되기 위한 인문

페어 플레이는 아직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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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누군가가 권력을 얻을 기회를 만들어주는 자는 자멸한다.
_마키아벨리

90년 전에 노신이 한 말이 아직도 유효한 이 땅에 사는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하나. 노신을 아직도 읽게 해주는 세상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긍정적인 사고일 것이다.

이 땅에는 때려잡아야 할 발바리나 개새끼가 왜 이리도 많은지. 그것이 누구인지 일일이 열거하면 얼마나 많을지 각자 생각하기 나름이다. 물에 빠진 개를 측은하게 생각하면 안된다. 물에 빠졌다고 그들의 습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건드려도 노하지 않는다'는 것은 관용의 도道이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는다'는 것은 곧음의 도(直道)이다. 그러나 중국에 제일 많은 것은 삐뚤어진 도(枉道)이다.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않으면 도리어 개에게 물린다. 이는 순진한 사람이 사서 고생을 하는 꼴이다.

"악인들은 구제되고 나서, 자신들이 이익을 보았다고 생각할 뿐, 절대 회개하지는 않는다." 순진한 사람이 사서 고생한다. 더욱이 교활한 그들은 "얼마 안 가서 빛나는 명성을 되찾게 되며, 이전과 마찬가지로 못된 짓을 한다." 노신은 페어의 상대가 누구인지 먼저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물에 빠진 상대가 사람이라면 건져야만 하고, 개라면 내버려두어야 하며, 나쁜 개라면 때려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개의 본성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누더기를 걸친 사람이 지나가면 발바리가 컹컹 짖어댄다. 그러나 이것은 꼭 개 주인의 뜻이거나 주인이 시켜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발바리는 종종 그의 주인보다도 더 사납다.
_노신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
루쉰 지음, 루쉰읽기모임 옮김/케이시




페어 플레이는 아직 이르다

해제

임어당林語堂 선생이 '페어 플레이(Fair Play)'를 이야기하며, 중국에서는 이 정신이 가장 부족하기에 적극 고취시켜야만 한다면서,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않는 것'이 바로 이 정신이라고 설명을 하였다. 나는 영어를 모르기에 이 단어의 뜻이 대관절 무엇인지는 모른다. 다만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않는 것'이 이 정신의 하나라면, 이것은 논의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여기서 '물에 빠진 개를 때리자'고 제목을 달지 않은 것은, 너무 눈에 띄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다. 즉 쓸데없이 머리에 가짜 뿔을 달고 환심을 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말하려는 요점은, 물에 빠진 개는 때리지 말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욱 때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에 빠진 개'는 세 가지가 있는데, 모두 때려야 할 부류들이다.

오늘날, 논자들은 '죽은 호랑이를 때리는 것'과 '물에 빠진 개를 때리는 것'을 함께 거론하며, 둘 다 비겁하다고 여기고 있다. 내 생각에는, 죽은 호랑이를 때리는 것은 겁쟁이가 용감한 체하는 것으로 다분히 웃기는 짓이며, 비겁의 혐의가 있긴 하지만 귀엽기도 한 것 같다.

그러나 물에 빠진 개를 때리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 개가 어떤 개인지, 어떻게 물에 빠졌는지를 보아야 한다. 물에 빠진 원인에는 대략 세 가지가 있을 것이다. 첫째, 개 스스로가 발을 헛디뎌 빠진 경우, 둘째, 남이 빠뜨린 경우, 셋째, 내가 때려서 빠뜨린 경우, 만일 앞의 두 종류의 개를 만나 남들과 부화뇌동하여 때린다면 이는 너무 심심한 일이거나 비겁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개와 싸우다가 자신이 직접 빠뜨렸다면, 몽둥이로 물속에서 마구 때리더라도 결코 심할 것이 없다. 이 경우를 앞의 두 경우와 함께 논해서는 안 된다.

용감한 권술가는 넘어진 상대는 절대 때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들이 모범으로 삼을만하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도 용감한 투사여야 한다는 전제다. 패배한 뒤,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면서 다시 덤벼들지 않거나 정정당당하게 복수를 하려는 자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것은 당연히 괜찮다.

그러나 개에게는 이러한 예를 적용하여 대등한 적수로 볼 수가 없다. 개가 아무리 짖어대더라도 무슨 '도의道義'같은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개는 헤엄을 칠 줄 안다. 언젠가는 분명 땅에 기어 올라올 것이며, 주의하지 않으면 몸을 털어 사람 얼굴이나 몸에 물을 튀기고는, 꼬리를 사리며 달아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뒤에도 성품은 여전하다. 순진한 사람은 개가 물에 빠진 것을 세례받은 것이라 여기면서, 그가 분명 참회했을 터이고 다시는 사람을 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며, 그것도 엄청난 착각이다.

요컨대, 나는 사람을 무는 개라면, 땅에 있건 물속에 있건 모조리 때려야 할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발바리는 물에 빠뜨리고 계속 때려야 한다.

발바리는 땅개라고도 하는데 남쪽에서는 서양개라고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중국 토종으로, 세계 개 품평회에서 금상을 타기도 했다고 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개 사진에 중국 발바리가 여러 마리 나와있다. 이것도 중국의 영광의 하나이리라. 개와 고양이는 원수 지간이다. 그런데 발바리는 고양이를 많이 닮았다. 절충, 공정, 조화, 평형을 모두 갖춘 듯이 의젓해하며, 다른 개들은 모두 파격하고 자기만이 중용의 도를 터득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

이로인해 재벌, 벼슬아치, 사모님, 아가씨들의 총애를 받으며 그 씨가 면면히 내려오고 있다. 발바리가 하는 일이란, 영리해 보이는 외모 덕분에 '귀하신 분'들 손에 길러지는 일이거나, 여인들이 외출할 때 개고리를 목에 매고서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 뿐이다.

이런 것들은 우선적으로 물에 빠뜨리고, 계속 때려야 한다. 제 스스로 물에 빠졌더라도 쫓아가 때려도 상관없다. 자신이 지나치리만큼 좋은 사람이라면, 때리지 않아도 되지만 불쌍히 여길 필요는 없다. 발바리를 너그럽게 대할 수 있다면 다른 개는 때릴 필요도 없게 된다. 왜냐하면 다른 개들은, 힘 있는 자에게 몹시 아양을 떨긴 해도 어쨌든 늑대에 가까울 만큼의 야성을 지니고 있어서, 발바리처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상은 내킨 김에 한 말로, 본 문제와는 큰 관계가 없는 듯 싶다.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않는 것은 남의 자식을 그르치는 일이다.

요컨대, 물에 빠진 개를 때릴 것인지 말 것인지는, 우선 그 개가 땅에 올라온 뒤의 태도를 보아야 한다.

개의 본성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혹 일만 년 뒤라면 지금과 다를지 모르겠으나,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현재의 일이다. 만일 물에 빠진 뒤 그의 처지를 너무 가련하다고 여긴다면, 사람을 해치는 동물 중 가련한 것들은 얼마든지 있다. 콜레라 균만 보더라도 번식은 빠르지만 성미야 얼마나 솔직한가? 그렇지만 의사는 그것을 절대 내버려 두지 않는다.

현재의 관료들과 토박이 신사, 서양식 신사들은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조리 빨갱이나 공산당으로 몰아 버린다. 중화민국이 수립되기 이전에는 약간 달랐다. 처음에는 강유위 당黨이라고 몰아붙이다가, 나중에는 혁명당이라고 몰아붙였고, 심한 경우 관청에 밀고하기도 했다. 물론 자신의 존엄과 명예를 보존하기 위해 그러한 면도 있지만, 혁명당을 밀고하거나 살해하여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려는 의도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혁명(중화민국 건국의 계기를 연 신해혁명)은 결국 일어났다. 거드름을 피우던 신사 무리들은 초상집 개처럼 주눅이 들어, 늘어뜨리고 다니던 변발을 황급히 틀어 올렸다. 혁명당도 새로운 기풍, 예전에 신사들이 이를 갈며 증오하던 그 새로운 기풍을 발휘하며 제법 '문명'스러워 졌었다. 그들은 다 같이 유신이 된 마당에, 우리는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는 그들에게 마음대로 기오올오라는 것으로 들렸다. 이리하여 그들은 기어올라 왔고, 민국 2년(1913) 하반기까지는 가만 엎드려 있었다. 그러다가 손문孫文이 황제 등극을 꿈꾸던 원세개袁世凱를 토벌하기 위해 2차 혁명을 일으키자, 옳다구나 하고 뛰어 올라 왔다. 그들은 원세계를 도와 수많은 혁명가들을 물어 죽였다.

중국은 또다시 암흑에 빠졌고, 지금도 청나라의 늙은 신하들은 물론, 젊은 신하들까지 우글거리고 있다. 이것은 바로 마음씨 좋은 우리 선열들이 요귀들에게 베풀었떤 자비가 그들을 번식시킨 탓이다.

이로 인해 뒷날의 각성한 청년들이 암흑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훨씬 많은 기력과 생명을 소모해야 했다.

추근秋槿(중회민국의 여성혁명가)여사가 바로 밀고로 죽었다. 혁명 일어나고 잠시 '여걸'으로 불리더니, 지금은 입에 올리는 사람도 거의 없다. 혁명이 일어나고, 그녀의 고향에 도독이 부임했는데, 그는 그녀의 동지인 왕금발였다. 그는 그녀를 살해한 주모자를 체포하고, 밀고 서류를 수집, 조사하여 복수를 하려 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그 주모자를 석방하였다. 듣자니, 이미 중화민국이 된 마당에 구원을 새삼스레 다시 들춰내 무엇하겠느냐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2차 혁명이 실패한 뒤, 왕금발은 원세개의 앞잡이에게 총살당하였다. 여기에 힘을 도운 자는 바로 그가 석방해주었던 추근을 살해한 그 주모자였다.

그 자는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 그러나 그 곳에 여전히 출몰하고 있는 자들 역시 그와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다. 그래서 추근의 고향은 지금 여전히 그대로이고, 달이 가고 또 해가 가도 털끝만큼의 진보도 없다.

실각한 정객을 물에 빠진 개와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건드려도 노하지 않는다'는 것은 관용의 도道이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는다'라는 것은 곧음의 도(直道)이다. 그러나 중국에 제일 많은 것은 삐뚤어진 도(枉道)이다.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않으면 도리어 개에게 물린다. 이는 순진한 사람이 사서 고생을 하는 꼴이다.

속담에 '순하다는 것은 무능하다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너무 야박한 말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말은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하도록 부추기는 말이 아니라, 쓰라린 경험에서 우러나온 경구이다. 예를 들어 '물에 빠진 개는 때리지 않는다'라는 말만 보더라도, 이 말이 생긴데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할 것 이다. 하나는 때릴 힘이 없는 것이고, 하나는 비교를 잘못한 경우다. 전자는 논외로 하고, 후자를 살펴보자. 그 잘못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실각한 정객을 물에 빠진 개와 동일시하는 점이고, 둘째는 실각한 정객 중에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가리지 않은 점이다. 이렇게 동일시한 결과 도리려 악을 만연시키고 있다

현재는 정국이 불안하여 일어섬과 무너짐이 마치 돌아가는 수레바퀴와 같이 급전하고 있다. 빙산에 의지하여 거리낌없이 악행을 저지르던 악인이, 일단 실각하면 곧바로 동정을 애걸한다. 이렇게 되면 남이 물리는 것을 직접 보았거나 자신이 직접 물리기도 했던 순진한 사람들은, 그를 물에 빠진 개와 동일시하여 때리지 않으려 한다. 더 나아가 측은하게 여기기까지 한다. 정의가 이미 이겼으니 이제는 의협심을 보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순진한 사람들이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그 개들은 정말로 물에 빠진 것이 아니고, 이미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놓았으며, 먹을 것도 충분히 쌓아두었다는 것을. 그것도 안전한 외국인 거주 조계에 마련해 두었다는 것을. 가끔 그들이 부상을 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단지 다리가 부러진 시늉을 하며 사람들의 측은지심을 유발, 용이하게 도피하려는 수작일 뿐이다. 그가 다시 나오면 이전처럼 맨먼저 순진한 사람을 물게 되고, 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등 못하는 짓이 없게 된다.

그 원인을 찾자면 순진한 사람이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않은 데 한 원인이 있다. 때문에 좀 가혹하게 말하자면, 스스로 제 무덤을 판 것이니 하늘을 원망하거나 남을 탓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이다.

지금은 아직 페어만 할 수는 없다.

어진 사람들은 물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결국 페어플레이가 필요없다는 말인가?' 나는 즉각 대답할 수 있다.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아직은 이르다. 이것은 그들의 '자업자득'이다. 어진 사람들은 이 방법을 쓰지 않으려 할 지 모르지만, 나는 이 방법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 신사들이나 서양식 신사들이 늘 말하지 않던가, 중국은 사정이 특수하기에 외국의 평등이나 자유등을 적용할 수 없다고. 나는 이 페어플레이도 그 중의 하나라고 본다. 만일 일률적으로 페어플레이를 적용하여, 그는 당신에게 페어하지도 않는데 당신만 그에게 페어했다가는 결국 자신만 손해를 본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는 페어하려 해도 할 수 없고, 페어 안하려 해도 안 할 수 없어진다. 그러므로 페어플레이를 하려면 먼저 상대를 똑똑히 보고, 페어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라면 조금도 페어하게 대할 필요가 없다. 상대가 페어하게 나온 다음, 그에게 페어해도 늦지 않다.

이는 이중 도덕을 주장한다는 혐의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중국이 장차 더 좋은 길로 나아갈 수 없다. 현재 중국에는 이중 도덕이 많다. 주인과 노비, 남자와 여자가 모두 다른 도덕을 지니고 있고, 통일되어 있지 않다. 물에 빠진 개와 물에 빠진 사람을 동일시 하는 것은 지나치게 편파적이고, 너무 이르다. 자유와 평등이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중국에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페어 플레이 정신을 보편적으로 실시하려면, 적어도 물에 빠진 개들이 인간다워진 다음에 해야 한다. 물론 지금은 절대로 안된다는 것은 아니며, 언급한 대로 상대르 봐가며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차등을 두어야 한다. 즉 페어의 상대가 누구인지를 보아야 한다. 어떻게 물에 빠졌든 상대가 사람이라면 건져야만 하고, 개라면 내버려두어야 하며, 나쁜 개라면 때려야 한다. '자기 파는 돕고 다른 파는 토벌'해야 하는 것이다.

머릿 속에는 편파적인 '시어머니의 도리'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입으로는 '공정한 도리'를 운운하는 신사들의 명언은 차라리 젖혀두고라도, 순진한 사람들이 부르짖는 공정한 도리조차도 현재 중국에서는 선량한 사람을 구조하기는 커녕, 오히려 악인들을 보호하고 있다. 악인들이 득세하여 선량한 사람들을 학대할 적에는, 누군가 아무리 공정한 도리를 외쳐도 악인들은 결코 듣지 않는다. 그저 외침으로 그칠 뿐. 선량한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받기 때문이다. 어쩌다 선량한 사람들이 조금 일어나게 되면, 이제 악인들은 마땅히 물에 빠져야 할 터인데도, 순진한 사람들은 공정한 도리 운운하며, '보복하지 말라', '너그럽게 용서하라', '악에 악으로 응징하지 말라' 외쳐댄다. 이렇게 되면, 이번에는 그 외침이 실제로 효과를 발휘한다. 선량한 사람들은 그 말이 옳다면서 악인을 구제해준다.

그러나 악인들은 구제되고 나서, 자신들이 이익을 보았다고 생각할 뿐, 결코 회개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그들은 교활한 토끼처럼 굴을 셋이나 파 놓은 데다가 아부하는 재간까지 있어서, 얼마 안가서 빛나는 명성을 되찾게 되며, 이전과 마찬가지로 못된 짓을 한다. 그러면 공정한 도리를 운운하는 자들은 또 다시 소리 높여 외치지만, 이번이라고 그들이 들을 리 만무하다.

평론가들은 '악을 너무 미워하고' '너무 조급하게 개혁하려했던 점'이야 말로, 한나라 때의 청류와 명나라 때의 동림당이 실해한 원인이라고 항상 비난하였었다. 그러나 어찌 이 점을 모르는가? 그들을 박해한 측들이 '선을 원수처럼 미워했었다'라는 점을. 빛이 어둠과 단호히 투쟁하지 않으며, 순진한 사람들이 악에 대한 방임을 관용이라 잘못 생각하며, 계속 고지식한 태도를 유지한다면, 오늘날과 같은 혼돈상태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그 사람의 도로써 그 사람의 몸을 다스려라

중국인 중에는 한의漢醫를 믿는 사람도 있고 양의洋醫를 믿는 사람도 있다. 지금은 웬만한 도시라면 이 두 의사가 모두 있어,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선택할 우 있다. 이것은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방법을 널리 확대시킨다면 사람들의 원성이 훨씬 적어질 것이고, 세상이 태평스러워질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중화민국의 보통 예절은 허리를 굽혀 경례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옳지 않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만은 절을 시키지 않으면 될 것이다. 민국의 법률에는 태형이 없지만, 태형이 좋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죄를 지었을 때, 그에게만은 곤장을 적용하면 되리라. 식기와 밥, 반찬등의 현대식은 지금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지만, 전설에 나오는 수인씨燧人氏(맨 처음 불을 얻었다는 전설적 인물. 화식火食을 가르쳤다.)보다 이전 사람이 되길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날고기를 먹이면 된다. 또 초가집 수 천 칸을 지어 큰 집에서 살며 요순을 흠모하는 고상한 선비들은 데려다가 그 속에서 살게 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물질 문명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구태여 싫다는 자동차를 타라고 강요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하면 그야말로 '인을 구하려다 인을 얻었으니 무슨 윈한이 있으랴' 로서, 우리들 귀도 훨씬 깨끗해 질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은 이렇게 하려 하지 않으며, 오직 자신을 기준으로 하여 남을 다스리려 한다. 이 때문에 세상이 복잡해진다. 페어플레이 역시 더욱 폐단이 나타나고, 심지어는 약점으로 되어 악한 세력에게 이익을 안겨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유백소가 북경여자사범대 학생들을 폭력으로 학교에서 내 쫓을 때, '현대평론'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북경여자사범대가 다시 정상회복된 뒤, 이번에는 진서형 교수가 반대파 학생들을 이용하여 학교를 점령하자, 이렇게 말했다.
"만약 학생들이 나가지 못하겠다고 버티면 어쩔 셈인가? 강제로 그들의 짐을 들어낸다는 건 낯부끄러운 일 아닌가?"
이미 유백소가 학생들을 때리며 끌어내고 짐을 들어낸 전례가 있거늘, 왜 이번에만 유독 낯부끄럽다는 말인가? 이것은 바로 북경여자 사범대 측에 페어의 기미가 조금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페어는 도리어 약점으로 되고, 장사조가 '남긴 혜택'을 보호해주는데 이용되었다.

결론

혹자는 위에서 언급한 것들이 새것과 낡은 것, 또는 무슨 두 파벌간의 다툼을 자극하고 악감정을 더욱 깊게 하여 대립을 격화시키지 않을까,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감히 단언코자 한다. 반개혁가들의 개혁가에 대한 악랄한 박해는 한 번도 미뤄진 적이 없으며, 그 수단의 극렬함도 이미 극에 달했다. 오직 개혁가들만이 아직도 꿈을 꾸고 있으며, 늘 손해만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은 아직도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후, 이러한 태도와 방법은 반드시 고쳐야 한다!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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