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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르지,
自由라는 말이 생긴 그 날부터
그 自由 때문에 감옥이 생기고
철조망을 친 인간의 역사
이 땅은 하나의 거대한
사상의 감옥이 되었다.
(...)
동물원은 또 하나의 슬픈 共和國
自由가 그리울 때 찾아가
철책을 사이에 두고
부끄러운 自畵像을 그리는 곳.
문병란 시인의 <동물원>의 일부이다. 그토록 원하던 自由 때문에 "이 땅은 거대한 사상의 감옥"이 되었다. 학술원의 피터도 "자유로써 사람들은 인간들 가운데서 너무도 자주 기만당"한다고 말한다. 또한 "자유가 가장 숭고한 감정의 하나로 헤아려지는 것과 같이, 그에 상응하는 착각 역시 가장 숭고한 감정의 하나"라 말한다.
피터 자신은 결코 붙잡혀 왔지만 결코 자유를 않는다. 단지 "출구"를 원하고 있다.
자유는 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의 출구를 오른쪽, 왼쪽, 그 어디로든 간에, 저는 다른 요구는 하지 않았습니다. 출구 또한 비록 하나의 착각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요구는 작았습니다. 착각이 더 크지는 않을 테지요. 계속 나아가자, 계속 나아가자! 계속 나아가자! 궤짝벽에 몸을 눌러 붙인 채 팔을 쳐들고 가만히 서 있지만은 말아야지.
카프카에 있어서 자유란 일종의 '기만'이다.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자유라는 이름의 허상을 꿈꾸는 것이다. 100년 전 카프카가 원하던 자유는 이 땅에서도 찾기 어렵다.
추송웅의 <빨간 피터의 고백>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10여쪽 되는 분량이니 일독을 권한다. 원숭이 피터는 학술원의 원로와 방청객인 우리 독자들을 조롱한다. 피터를 빌어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카프카의 독설이다.
변신.시골의사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민음사 |
학술원의 고매하신 신사 여러분!
여러분께서 소생에게 원숭이로서의 소생의 전력에 대한 보고를 제출하게끔 스스로에게 명하는 명예를 주셨습니다.
이런 뜻에서는 저는 유감스럽게도 권고를 따를 수가 없습니다. 원숭이다움과 지금의 저 사이에는 오 년 가까운 세월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달력으로 재면 짧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해왔듯이, 박차를 가해 달음질치기에는, 무량무변의 긴 시간이었습죠, 구간에 따라서는 탁월한 인간, 충고, 갈채 그리고 오케스트라 음악이 동반되었습니다만, 근본에서는 혼자였습죠,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이, 경관(景觀)에 머무르기 위해, 멀리 차단 목책(木柵) 앞에 멈추어 있었으니까요. 만일 제가 고집스럽게도 저의 근본, 젊은 시절의 기억에 매달리려고 했더라면 이러한 성과는 불가능했을 겁니다. 고집이라면 다 포기해 버리는 것이야말로 제가 제 자신에게 부과한 지고(至高)의 계명이었습죠, 저, 자유로운 원숭이가, 이 계명의 멍에에다 자신을 맞추었던 거죠. 그럼으로써 제게 있어서 기억은 기억 편에서 점차 스스로를 폐쇄했습니다. 우선 제게 되돌아가는 일이, 사람들이 혹 원하기라도 해서, 일임되어 있었다면, 하늘이 땅 위에 펼치고 있는 넓고 넓은 문을 지나가라고요, 앞으로앞으로 채찍질된 저의 발전은 동시에 점점 보잘것없어지고, 점점 더 옹색해졌을 것입니다. 인간세상에서 저는 한결 편안하고 동화된 느낌을 가지거든요, 저의 과거로부터 뒤쫓아 불어오던 폭풍은 가라앉고, 오늘 저의 발꿈치를 식혀주는 것은 한 가닥 바람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바람이 거쳐왔고 또 제가 언젠가 지나왔던 먼 곳의 구멍은 워낙 작아져서 막상 그곳까지 되돌아갈 기력과 뜻이 있더라도 제가 그 구멍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제 살에서 가죽을 벗겨야 할 정돕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사안들에 대해서는 비유를 택하고 싶지만 그래도 솔직히 말하자면 여러분의 원숭이다움은, 여러분, 여러분이 그런 무엇을 전력(前歷)으로 가지고 있는 한, 제게 있어서 저의 원숭이다움보다, 여러분에게서 더 멀리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여기 땅 위를 딛고 다니고 있는 모두의 발뒤꿈치를 간지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작은 침팬지든 위대한 아킬레스든.
그러나 저는 아마도 지극히 한정된 뜻에서 여러분의 질의에 답변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가 제일 처음으로 배운 것은 악수였습니다. 악수라는 것은 솔직함을 증명하지요, 제가 제 생애의 절정에 서 있는 오늘에도 예의 첫 주먹질부터 하고 난 다음에야 솔직한 말도 덧붙여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이 학술원에 무언가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가르쳐줄 리 없거니와 저에게서 요구하는 바와도 거리가 멀 겁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요구하는 것, 그러나 제가 아무리 좋은 뜻을 가져도 말할 수는 없는 것―그건 어디까지나 예전의 원숭이가 인간 세계로 뚫고 들어와 거기서 기반을 굳히게 된 과정의 지침 같은 것을 가르쳐달라는 거겠지요. 만일 제가 제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다거나, 문명된 세계의 모든 위대한 쇼무대에서의 저의 지위가 확고부동하게 굳어져 있지 않았더라면 저는 다음 이야기를 눈곱만큼도 말씀드릴 수가 없을 게 틀림없습니다.
저는 황금해안 출신입니다. 어떻게 제가 사로잡히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타인의 보고에 의존해야겠습니다. 하겐벡 상사의 사냥 원정대가―그 대장과 저는 그때부터 이미 고급 적포도주를 여러 병 같이 비운 사이입니다만―제가 저녁 때 무리 한가운데서 물을 먹으러 갔을 때, 물가 풀숲에 숨어 노리고 있었습니다. 총을 쐈는데 제가 총을 맞은 유일한 놈이었습니다, 두 방을 맞았죠.
하나는 뺨에 맞았는데, 그건 가벼웠습니다. 그러나 털이 싹 밀려나간 커다란 빨간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게 제게는 꺼림칙하기만 하고 영 맞지 않는 그야말로 원숭이나 생각해 냈음직한 빨간 페터라는 이름을 달아주었습죠, 마치 저 자신이 얼마 전에 뻗어버린 널리 알려진 조련된 동물 원숭이 페터와는 그저 뺨 위에 난 빨간 얼룩만으로 다 구별되기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이건 지나가는 이야기고요.
두 번째 총알은 아랫도리에 맞았습니다. 그 상처는 심해서 오늘까지도 제가 약간 절뚝거리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최근에 저는 신문에다 저에 관해 마구 써대는 수만의 사냥개들 중의 어느 한 놈이 어떤 논문에서 저의 원숭이 본성은 아직 완전히 억제되지는 않았다, 그 증거로 제가 손님이 오면 저 총알이 지나간 자리를 보여주기 위해 각별히 즐겨 바지를 벗는다는 점을 들 수 있다라고 쓴 것을 읽었습니다. 그 따위를 쓰는 그런 작자의 손가락은 하나하나 있는 대로 분질러놓아야 마땅합니다. 저는, 저는 저 좋을 대로 누구 앞에서든 바지를 벗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 보이는 거라곤 잘 손질된 털과 저―여기서는 하나의 특정 목적을 위해 특정한 하나의 어휘를, 그러나 오해되어서는 안될 말을 택하기로 하죠―악의에 찬 총격이 남긴 흉터밖에는 없으니까요. 모든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죠, 감출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진실이 문제될 때면, 위대한 생각을 하시는 분들은 누구나 세련된 매너쯤은 내팽개쳐버리잖습니까. 그렇지만 저 글을 쓰신 분께서 손님이 왔을 때 바지를 벗기라도 한다면 그건 어쨌든 다른 양상을 띨 테지요, 그러니만큼 저는 그분이 그러시지 않는다는 사실이 현명함의 표시로 인정되게끔 내버려두겠습니다. 그러니 그 분의 섬세한 감각도 저를 부디 내버려두어 주시기를!
저 총격이 있은 뒤 저는―그런데 여기서 점차 제 자신의 회상이 시작됩니다―하겐벡 상사 증기선의 중간 갑판에 있는 우리에서 깨어났습니다. 그것은 네 면이 쇠창살로 된 네모난 우리가 아니었어요. 그보다는 세 벽만이 있어 그것이 궤짝 하나에 고정되어 있었어요. 그러니까 궤짝이 네 번째 벽을 이루고 있었던 거지요. 그 우리는 똑바로 일어서기에는 너무 낮고 주저앉기에는 너무 좁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저는 무릎을 접어 넣고 무척이나 떨면서 쪼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것도, 처음에는 아마 아무도 보고 싶지 않고 언제나 어둠 속에만 있고 싶었기 때문에 궤짝 쪽으로 돌아앉았는데, 그러노라면 등에서는 쇠창살들이 살로 파고들어 왔지요. 야생 동물들을 그런 식으로 가두어놓는 것은 금방 잡힌 시기에는 장점이 있다고들 생각하는데, 이것저것 겪고 보니 저도 이제는 그것이 인간적인 의미에서 실제로 그러한 경우였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 생각을 그러나 그 당시에는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난생 처음으로 출구(出口)가 없는 상황에 처했던 겁니다, 적어도 똑바로는 되지를 않았지요, 똑바로 제 앞에는 궤짝이 있고 널빤지가 널빤지에 단단히 붙어 있었습니다. 널빤지들 사이에 길쭉한 틈이 하나 있기는 해서 처음 그걸 발견했을 때는 무지했던 탓에 기쁨에 넘친 어리석음의 울부짖음을 토하며 환영을 했었건만, 이 틈바구니는 꼬리를 들이밀기에도 너무 좁은 것이었고, 있는 원숭이 힘을 다해도 넓혀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뒷날 저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저는 비상하리만치 작은 소음밖에 내지 않아서 그 점으로 보아 제가 틀림없이 곧 죽거나 아니면 이 최초의 시련기를 넘기고 살아남을 경우 매우 잘 길들여질 것으로 추론했답니다. 저는 이 시기를 넘기고 살아남았습니다. 소리 죽여 흐느끼기, 고통스러운 벼룩 수색, 야자 하나를 지치도록 핥기, 머리로 궤짝벽을 짓찧기, 누가 가까이 오면 혀 내밀기―그런 것이 새로운 생활에 있어서의 최초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온갖 짓을 다 해봐도 출구는 없다는 그 한 가지 느낌뿐이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원숭이답게 느꼈던 것을 제가 오늘에 인간의 말로 그릴 수가 있고 또 그럼으로써 그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비록 제가 옛날의 원숭이의 진실에 더 이상 이를 수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저의 기술(記述)의 방향에는 그 진실이 들어 있습니다, 그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저는 그전까지 출구를 무척 많이 가지고 있었건만 그때부터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겁니다. 제가 아주 들어붙어버렸던 겁니다. 설령 사람들이 저를 못질해 박아놓았다 하더라도 그로써 저의 이동의 자유가 이보다 더 줄어들지는 않았을 겁니다. 왜 그럴까? 발가락 사이의 살을 긁어보아라, 그 이유를 찾지는 못할 거다. 등을 쇠창살에 대고, 그게 너를 두 쪽 낼 지경까지 눌러보아라, 너는 그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저는 출구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출구 없이는 살 수 없으니 만들어내야만 했습니다. 언제까지나 이 궤짝벽에 붙어 앉은 채―저는 어쩔 도리 없이 죽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원숭이들이란 하겐벡 상사에서는 궤짝벽에 붙어 있어야 하는 동물이거든요―자아, 그리하여 저는 원숭이이기를 그쳤습니다. 제가 어찌어찌해서 배로 짜냈음에 틀림없는 명석하고 멋진 사고의 과정이었습죠, 원숭이는 배로 생각하니까요.
제가 출구란 말을 무슨 뜻으로 쓰는지 똑바로 이해 받지 못할까 걱정이 됩니다. 저는 이 말을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빈틈없는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저는 일부러 자유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방을 향해 열려 있는 자유라는 저 위대한 감정을 뜻하는 게 아니거든요. 원숭이였을 때 저는 아마도 그런 감정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그리워하는 인간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그때도 오늘날도 자유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자유로써 사람들은 인간들 가운데서 너무도 자주 기만당합니다. 그리고 자유가 가장 숭고한 감정의 하나로 헤아려지는 것과 같이, 그에 상응하는 착각 역시 가장 숭고한 감정의 하나입니다. 저는 쇼에서 제가 등장하기에 앞서 곡예사 한 쌍이 저 위 천장에서 그네식 철봉을 타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훌쩍 뛰어넘고, 그네를 타고, 도약을 하고, 서로가 둥실 떠 서로의 품안으로 떨어지고, 하나가 이빨로 상대방의 머리카락을 물어 나릅니다.「이것도 인간 자유로구나」하고, 저는 생각했습니다.「자기를 돋보이려는 이 안하무인의 율동도」신성한 자연을 이따위로 경멸하다니! 그 어떤 건축물도 이 광경을 보고 원숭이다움이 터트린 웃음 앞에서는 지탱을 못할 것입니다.
아닙니다, 자유는 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의 출구를 오른쪽, 왼쪽, 그 어디로든 간에, 저는 다른 요구는 하지 않았습니다. 출구 또한 비록 하나의 착각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요구는 작았습니다. 착각이 더 크지는 않을 테지요. 계속 나아가자, 계속 나아가자! 계속 나아가자! 궤짝벽에 몸을 눌러 붙인 채 팔을 쳐들고 가만히 서 있지만은 말아야지.
오늘 저는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지극히 큰 내면의 평정이 없었더라면 제가 결코 벗어날 수 없었으리라는 걸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제가 이렇게 된 것은 아마 모두가 배에서의 처음 며칠이 지나고 나서 저에게 찾아든 그 평정 덕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평정은 다시금 배에 타고 있던 인간들 덕분이었던가 봅니다.
좋은 사람들이었죠, 그래도. 오늘까지 저는 즐겨 그 당시 반쯤 든 잠 속에서 메아리처럼 들리던 그들의 묵직한 발소리를 기억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극도로 천천히 개시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눈을 비비고자 하면 그는 손을 늘어진 추처럼 들어올렸습니다. 그들의 응답은 거칠었으나 다정했지요. 그들의 웃음에는 언제나 위험하게 울리는, 그러나 아무 뜻 없는 기침소리가 섞여 있었고요. 언제나 그들은 입 안에 무언가 뱉어낼 것을 가지고 있었고 어디로 뱉느냐는 그들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늘 그들은 저의 벼룩이 자기들한테로 튀어간다고 불평했습니다만, 한번도 그렇다고 저한테 정색을 하고 화를 내지는 않았어요. 그들은 제 살가죽 안에서는 벼룩이 번창하고, 또 벼룩이란 뛴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걸로 그만이었던 거죠. 비번일 때면 그들은 이따금씩 반원을 이루어 저를 둘러싸고 앉아 말은 거의 하지 않고 서로 구시렁거리기만 했습니다. 궤짝 위에 몸을 쭉 뻗은 채로 파이프를 피웠고, 제가 조금이라도 움직일 양이면 금세 서로 무릎을 쳤고, 그러고는 여기저기서 누구든 하나가 나와서 막대기를 집어들어 제가 시원해하는 곳을 간질였습니다. 오늘 제가 이 배를 같이 타자고 초대를 받는다면 분명 거절하겠지만, 또 꼭 그만큼 분명한 것은 제가 거기 중간 갑판에서 잠길 수도 있을 회상이 흉한 것들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제가 이 사람들의 테두리 안에서 얻은 평정이 저를, 무엇보다 온갖 도망치려는 시도로부터 막아주었습니다. 오늘날로부터 보건대 저는 최소한 살고자 한다면 출구를 찾아야 한다는 것, 그러나 이 출구는 도망쳐서는 얻어질 수 없다는 것을 예감하기라도 했던 것 같습니다. 도망이 가능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믿고 있습니다. 원숭이는 언제나 도망칠 수 있다고요. 저의 지금의 이빨로는 보통하는 호두 깨물기에서조차 조심을 해야 합니다만 당시에는 아마 시간이 흐르면 문 자물쇠는 이빨로 깨물어 부술 수 있었음에 틀림없을 겁니다.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래봐야 무슨 득이 있었겠어요? 머리를 밖으로 내밀자마자 사람들은 저를 다시 사로잡아 더욱 고약한 우리에 가두었을 테죠, 아니면 저는 눈에 띄지 않게 다른 동물들, 예컨대 저 맞은편에 있던 구렁이들한테로나 도망칠 수 있었을 테고 그러면 그놈들한테 둘둘 감겨 숨을 거두었을 테지요, 그도 아니면 갑판 위에까지 살짝 올라가 뱃전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에는 잠깐 망망대해 위에서 흔들리다가 물에 빠져 죽었을 겁니다. 절망의 행위들이지요. 제가 인간적으로 계산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제 주변의 영향으로, 저는 마치 계산이라도 했던 것처럼 처신했습니다.
계산은 하지 못했으나, 아마도 아주 침착하게 관찰을 했나 봅니다. 저는 사람들이 언제나 같은 얼굴, 같은 동작으로,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주 제 눈에는 그들이 단 한 사람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사람, 혹은 같은 사람들은 아무런 제지를 당하지 않고 돌아다녔습니다. 저는 높은 목표가 하나 어렴풋이 떠올랐습니다. 그 누구도 저에게, 제가 그들처럼 된다면 쇠창살이 열릴 거라고 약속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처럼 성취가 불가능해 보이는 약속은 하지 않는 법이죠. 그러나 성취시키고 나면, 나중에 가서, 그런 약속들도, 이전에는 헛되이 혹 거기 있나 하고 찾았던 바로 그곳에서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 자체에는 제 마음을 특별히 유혹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만약 제가 앞서 말씀드린 저 자유의 신봉자였더라면, 저는 분명 이 사람들의 침울한 눈길에서 제게 보여진 출구보다는 망망대해 쪽이 낫다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아무튼 저는 그런 일들을 생각하기 벌써 오래 전부터 그들을 관찰했습니다, 네, 집적된 관찰이 저를 비로소 확정된 방향으로 밀어 넣었던 거죠.
사람들 흉내를 내기에는 아주 쉬웠습니다. 침뱉기는 처음 며칠 안에 벌써 할 수 있었지요. 그래서 우리는 서로서로 얼굴에다 침을 뱉었는데 차이라면 저는 제 얼굴을 나중에 깨끗이 핥는데 그들은 그러지 않는다는 것뿐이었습니다. 파이프는 곧 영감처럼 피웠는데, 그럴 때 제가 엄지손가락으로 파이프 대가리를 누르기까지 할라치면 온 중간 갑판이 환호성을 울렸죠, 다만 빈 파이프와 채워진 파이프의 차이를 저는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건 소주병이었습니다. 냄새가 저를 괴롭혔어요, 저는 있는 힘을 다해 억지로 해보았습니다, 그래도 자신을 극복하기까지는 여러 주일이 지나갔습니다. 이 내면의 투쟁을 사람들이 이상하게도 제게 있어서의 그 어떤 여타의 것들보다 더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회상에 있어서조차 사람들을 분류하지는 않습니다만,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혼자, 혹은 동료들하고, 낮에, 밤에, 별별 시각에, 자꾸자꾸 와서는 제 앞에 술병을 내밀고 저를 가르치는 거예요. 그 사람은 저를 납득하지 못했어요, 제 존재의 수수께끼를 풀려고 했습니다. 그는 천천히 병의 코르크 마개를 빼고 나서는 제가 이해했는지 못했는지 살피려고 저를 유심히 바라보았어요, 고백컨대 저는 항상 세심하지 못한 주의력, 성급한 주의력을 기울여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인간 스승이 온 땅덩이 위를 다 돌아다녀도 그런 인간 학생을 찾지 못할 겁니다, 병에서 코르크 마개가 빠지고 나면, 그는 병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고, 저와 저의 시선도 그를 따라 목구멍 안까지 쳐들렸습니다. 그는 저에게 만족하여 고개를 끄덕이고 병을 입술에 댑니다, 저는 점차 깨달아가는 데 들떠서, 낄낄거리며 가로세로 아무데나 마구 긁어대고, 그는 기뻐하며 병을 입에 대고 한 모금 마십니다, 그를 쫓아하지 못해 안달이 나고 절망한 나머지 저는 오줌을 질질 싸 제 우리 안을 더럽히고, 그러면 그러는 것이 다시금 그에게 커다란 만족을 주지요, 그러고는 술병을 쭈욱 뻗쳐 내밀었다가는 휘익 다시 쳐들어 올려 과장되게 교훈적으로 몸을 뒤로 벌떡 젖히고 단숨에 비웁니다. 저는 너무도 큰 욕망에 지쳐, 더 이상 좇아하지도 못하고 힘없이 쇠창살에 매달려 있고, 그러는 동안 그는 배를 쓰다듬으며 이빨을 드러내고 빙긋이 웃음으로써 이론 수업을 끝내는 거예요.
이제 비로소 실습이 시작됩니다. 이론에서 제가 벌써 너무도 기진맥진해 버렸을까요? 예, 너무도 기진맥진해 버렸겠지요. 그것은 제 숙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잘, 건네진 술병을 잡아, 떨며 코르크 마개를 땁니다, 잘 되어가니 점차 새로운 힘이 납니다, 저는, 어느덧 원형과 거의 차이 나지 않게, 술병을 들어 입에 갖다 대고 그러고는―역겨워서, 역겨워서, 던져버립니다, 병이 비어 있고 냄새만 차 있는 데도, 저는 역겨워서 바닥에 내던집니다. 저의 스승이 슬프게도요, 제 자신이 더욱더 슬프게도요, 그의 슬픔도 저의 슬픔도 무마가 되질 않습니다. 제가 술병을 내던져버린 다음 탁월하게 제 배를 쓰다듬으며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걸 잊지 않아도요.
너무도 자주 수업은 다만 그렇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스승을 기리자면, 그는 저에게 화를 내지 않았어요, 이따금 타고 있는 파이프를 제 살가죽을 갖다 대고는 했었어요, 마침내는 제 손이 쉽사리 닿지 않는 어딘가가 타들어가기 시작하지요, 그러나 그러면 몸소 다시 그의 크고 다정한 손으로 불을 꺼주는 겁니다, 그는 저에게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가 같은 편에서 원숭이 본성과 싸우고 있다는 것, 그리고 보다 무거운 몫을 제가 지고 있다는 것을 통찰하고 있었던 거죠.
어느 날 저녁 제가 많은 구경꾼들에 둘러싸인 가운데, 아마 축제였던 듯 유성기가 돌아가고, 장교 하나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녔습니다―제가 이 저녁에 마침 눈에 띄지 않게 제 우리 앞에 잘못 버려져 있던 소주병 하나를 집어, 뭇사람들이 점차 주목하는 가운데, 배운 대로 코르크 마개를 따고 입에 갖다대고는 서슴없이, 입도 찡그리지 않고, 두룩두룩 눈을 굴리며, 목구멍에서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전문적인 술꾼이 되어, 정말이지 맹세코 남김없이 마셔버리곤, 더 이상 절망한 자가 아니라 예술가가 되어 술병을 던져버렸을 때, 비록 배를 쓰다듬는 것은 잊어버리기는 했으나 그 대신 다른 수는 없었기 때문에, 충동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오관에 술기운이 돌았기 때문에, 저는 짧고 훌륭하게「헬로우!」하고 소리쳤습니다, 인간의 소리를 터뜨린 거죠, 이 외침과 더불어 저는 인간 공동체 속으로 단숨에 뛰어들었고,「들어봐, 저게 말을 해!」하는 그들의 반향이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제 온몸 위에 입맞춤처럼 느껴졌을 때, 그것은 스승을 위해서나 저를 위해서나 그 얼마나 승리였는지 모릅니다.
되풀이하겠습니다만 인간들을 모방하고 싶다는 유혹은 없었습니다, 저는 출구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모방했습니다, 다른 그 어떤 이유에서도 아니었지요. 또한 예의 저 승리로서는 아직 별로 이루어진 것은 없었습니다. 금방 다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어요, 그러다 몇 달이 지난 다음에야 다시 나왔고, 소주병에 대한 혐오감은 심지어 더 강해지기까지 했지요. 그러나 아무튼 저에게 일단 방향은 주어졌던 겁니다.
제가 함부르크에서 최초의 조련사에게 넘겨졌을 때 저는 곧 제게 열려 있는 두 가지 가능성을 알아차렸어요. 동물원 아니면 쇼 무대였죠. 저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스스로에게 말했어요. 쇼 무대로 가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자, 그것이 출구다, 동물원은 새로운 우리일 뿐 그 안에 들어가면 너는 없어지고 마는 거다 라고요.
그리하여 저는 배웠습니다, 여러분, 아, 배워야 한다면 배우는 법, 출구를 원한다면 배웁니다, 앞 뒤 가리지 않고 배우는 법입니다. 회초리로 스스로를 감독하고, 지극히 조그만 저항만 있어도 제 살은 짓찧었습니다. 원숭이 본성은 둘둘 뭉쳐서 데굴데굴 쏜살같이 제게서 빠져나가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저의 첫 스승 자신이 그것으로 하여 거의 원숭이처럼 되어버려, 곧 수업을 포기하고 정신병원으로 보내져야 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곧 회복되었습니다만.
그런데 저는 많은 스승을 동원했습니다, 네, 심지어 동시에 몇몇 스승을요. 제가 자신의 능력을 어느덧 확신하게 되어, 대중이 저의 진보를 지켜보고, 저의 미래가 빛나기 시작했을 때는 제가 직접 선생들을 초청해서 그들을 나란히 붙어 있는 다섯 개의 방에 눌러앉아 있게 하고는 저는 끊임없이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뛰어듦으로써 모두에게서 동시에 배웠습니다.
이 진보! 앎의 빛이 온 사방에서부터 깨이는 두뇌 속으로 뚫고 들어옴!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고백하자면, 저는 그것을 과대평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도 그랬고, 오늘날은 훨씬 더 그렇습니다. 지금껏 지상에서 되풀이된 바 없는 긴장된 노력을 통하여 저는 유럽인의 평균치 교양에 도달했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별것도 아닐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우리를 벗어나도록 도와주고 저에게 이 특별한 출구, 이 인간 출구를 마련해 준 한에서는, 그래도 상당합니다. 슬쩍 달아난다는 탁월한 독일어 표현이 있는데, 그걸 제가 했습니다, 저는 슬쩍 달아났습니다. 제게는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자유란 선택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언제나 전제로 하고요.
저의 발전과 지금까지의 그 목표를 개관하면 저는 탄식하지도 않고, 만족하지도 않습니다. 양손을 바지 호주머니에 찌르고, 탁자 위에는 포도주병을 두고, 저는 제 흔들의자에 반은 눕고 반은 앉은 채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손님이 오면 저는 적절하게 맞이합니다. 저의 매니저가 문간에 앉아 있어 제가 초인종을 누르면 와서 제가 할말을 듣습니다. 밤에는 거의 언제나 공연이 있는데, 저는 이제 더 커지기는 어려울 큰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밤 늦어 연회에서, 학술모임에서, 유쾌한 회합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반쯤 조련된 조그만 암침팬지가 저를 기다리고 있어 저는 원숭이식대로 그녀 곁에서 편안함을 취합니다. 낮에는 그녀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는 조련된 동물의 어리둥절해진 미혹(迷惑)을 눈길에 담고 있어서요, 그 점은 오직 저만이 알아보는데 저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보아 저는 아무려나 제가 도달하고자 했던 것에 도달했습니다. 그것이 애쓸 가치가 없었다고는 말하지 마시기를. 저는 아무튼 그 어떤 인간의 심판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지식을 널리 알리고자 할 뿐입니다, 저는 보고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여러분께도요, 학술원의 고매하신 신사 여러분, 저는 보고했을 뿐입니다.
출전 : 『변신 · 시골의사』전영애 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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