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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초아흐레, 꽃샘바람이 잦아든 건천동 후원 연못가, 밤새 추적추적 내린 비로 한두 잎 낙화한 목련 화판이 처연하다. 촛논이 되어 흘러내리는 붉은 눈물이 세상을 적시며 흘러간다.
난설헌의 죽음을 표현한 책의 마지막 대목이다. 그미의 시구 "이따금 붓을 쥐고 초생달을 그리다보면 붉은 빗방울 눈썹에 스치는가 싶네"를 연상하게 한다.
난설헌을 읽으며 신사임당을 떠올렸다. 난설헌도 신사임당처럼 결혼후에도 본가에서 10년을 살았다면 난설헌의 시詩는 더욱 뛰어났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신사임당을 떠올린 것은 생가가 강릉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난설헌의 본가는 건천동이고 시댁은 옥인동이기 떄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조선 중기로 들어가면서 여성의 입지는 점점 더 줄어들어 남존여비가 더욱 더 강해져 난설헌이 설 땅이 없었다. 시대가 천재를 죽인 것이다.
결박하는 것도 남이 결박하는 것이 아니고, 결박을 푸는 것도 남이 푸는 것이 아니라. 풀거나 결박하는 것이 남이 아니므로 모름지기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니.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한꺼번에 놓아버리면, 놓아버릴 것이 없는 데까지 이르고, 놓아버릴 것이 없는 그것까지도 다시 놓아버려야 하는데 ….
난설헌의 운명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본가의 운명을 말하는 것인가. 스님의 말씀이 예언처럼 들린다.
말이 아닌 붓으로 자신의 아픔을 호소할 수 있고 그것을 읽어줄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숨을 쉬고 밥 먹을 보람을 찾은 것 같아 새삼 생기가 돌고 식욕이 났다.
시숙모 영암댁이 난설헌에게 자신이 쓴 시를 보여준 뒤 평을 듣고 가슴이 부풀었다. 하지만 여인네의 삶을 살던 영암댁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지만 난설헌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미에게는 결혼한 이후에는 남편도 시어머니도 아무도 없었다. 시대적 상황이기도 하고 불행한 가정사의 시작이다. 두 명의 자녀를 일찍 보낸 것도 그러하다.
한줄기 싸늘한 물 맑고도 깊숙해
산 돌고 들 뚫어 한가로이 흐르네
출렁출렁 스스로 가야 할 곳 알아
예로부터 지금까지 가고 멈출 줄 모르네
"영허 스님의 글인데, 언문으로 돼 있어 아녀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모양이에요. 막힌 산이면 둘러가고 뚫린 들이면 바로 질러가는 것이 물의 속성이라는 이 대목이 마음을 잡아당겨요. 어느 곳을 흘러가더라도 궁극에는 바다를 근본으로 삼는 것이 흐름의 속성이라 하지 않아요."
그미는 겨우 아홉 살인 균이 단숨에 풀어내는 시의 깊은 뜻에 감동했다.
"그럼, 모든 것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다면 어떻게 될까. 물도 세월도 살마도 흐르지. 하지만 그 흐름의 시작도 끝도 알 수 없어. 다만 거스르지 않는 흐름에 대한 동생의 해석은 아주 독보적이야."
균의 지나치게 조속한 망기(忘機)의 정취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그미는 덧붙어 말했다.
“사람이 사람을 길들이기 위한 제도, 생이불유(生而不有)의 큰 뜻을 거스르는 일이 분명하다고, 낳되 낳은 결과를 내가 소유하지 아니한다고, 이도사님이 늘 말씀하셨어. 생은 끊임없는 생성의 과정이기에, 그 긴 노정 속에서 누군가에게 소유되는 순간, 생 그 자체가 멈추게 되는 것이라고. 그건 이미 생이 아니라 죽음이라고 하셨어. 조선의 아낙들을 두고 하신 말씀 아닐까.”
그미의 얼굴을 보며 균이 말했다.
“누님, 너무 많이 생각하면 세상의 모든 이치가 곤두박질친답니다.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고,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이 지혜로운 생이 아닐까 싶어요. 물처럼 거스르지 않고 흘러가면, 바다에 이른다지 않아요.”
“바다에 이르면, 그곳이 영생불멸하는 근원이라 함인가, 나는 모르겠네.”
아홉 살 허균과 열 다섯 살 난설헌의 대화이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사상에 누이 난설헌이 어느 정도 끼쳤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누이의 삶을 보며 세상이 변혁되어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은 차후의 일이지만 열 다섯의 생각이 너무나 깊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사람을 길들이는 제도"는 당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있다.
그미의 작품이 결혼 전과 결혼 후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미의 삶이 그것을 반증하고 있다.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는 점이 아쉽다. 하지만 저자가 "<닌설헌>은 역사소설이나 평전이 아니다"라고 명뱍히 밝히고 있다. 그 아쉬움은 그의 작품을 따로 읽는 것으로 달래야겠다.
난설헌 최문희 지음/다산책방 |
덧붙임_
다산책방, 2011년 11월 초판 12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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