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은 책 ‘동물농장’을 통해 전체주의 혹은 공산주의 사회를 비판했다. 냉전시기 공산주의 사회를 비판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자본주의의 승리를 상징하는 우화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자본주의로 일색화된 지금 우리는 새로운 고민에 빠지고 있다. 자본주의는 과연 안녕한 것일까? 이런 질문에서 이 책 ‘자본주의 동물농장’은 시작되고 있다. 미국 작가 존 리드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패러디해 자본주의를 비판한다.
이 책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기초로 쓰여 졌다. 동물농장을 번역한 바 있는 문학평론가 도정일은 “오웰의 ‘동물농장’이 남긴 큰 질문은 세 가지다. 평등사회 건설의 기획은 반드시 실패하는가? 자유, 평등, 정의의 사회를 만드는 일은 가능한 일인가? 가능하지 않다면 인간에게 남는 희망은 무엇이며 그가 할 일은 무엇인가? 존 리드의 기발한 풍자우화 ‘자본주의 동물농장’은 오웰의 ‘동물농장’이 다루지 않았던 이런 도전적 질문들 앞으로 지금 이 시대의 독자들을 초대한다. 자본주의 방식의 유토피아는 성공할 수 있을까?”라며 이 책을 소개했다.
이 소설은 원작이 끝 부분에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여 마치 후속편처럼 보이게 구성된 풍자소설이다. 동물농장이 세워진 후 여러 해가 흘렀다. 늙은 돼지들은 하나둘 죽어갔다. 농장의 미래는 불투명했고, 동물들은 불안에 떨었다. 그때 농장 정문에 낯선 그림자가 비친다. 인간의 옷을 입고 두 발로 걷는 자, 서류 가방을 든 자. 외양간 전투의 일등 동물 영웅, 추방당했던 돼지 스노볼이다. 이상주의자 돼지인 스노볼이 농장으로 돌아온 것이다. 원작이 공산주의의 실패를 다루고 있기에 작가는 그럼 공산주의가 아닌 자본주의 방식대로 세상을 운영하면 어떻게 될지 가정한다. 원작엔 동물농장의 계명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마지막 계명은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들은 더욱 평등하다”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풍자다. 이 구절이 소설에선 이렇게 바뀐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무엇이 되느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결정한다.”
스노볼은 이런 계명이 상징하듯 혁명가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자본가가 되어 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스노볼은 인간 마을에서 배워온 ‘더 나은 길’을 펼칠 것을 동물들에게 약속한다. 온수와 전깃불, 전기난로, 에어컨, 창문이 달린 축사 방…… 이를 실행하기 위해 스노볼과 박사 학위를 받은 의사이자 법률가이자 건축가인 염소 토머스는 ‘쌍둥이 풍차’의 설계도를 그려나간다. 농장 동물들은 두 발로 걷는 법과 옷 입는 법, 알파벳을 익히고, 스노볼의 리더십에 따라 화폐의 특성을 알아간다. 곧 농장 밖 삼림지대 동물에게까지 ‘성공과 기회의 땅’인 동물농장에 관한 소문이 퍼져나갔으며, 많은 동물들이 ‘꿈’을 찾아 동물농장으로 이주해온다.
스노볼은 거대한 변화의 일환으로 동물농장을 동물장터(animal fair)로 탈바꿈시키기로 결심한다. 그곳은 갖가지 재주를 가진 동물 공연자와 온갖 놀이시설, 범죄자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공연으로 채워진 거대한 테마파크였다.
그리고 소설 속 주간지 ‘데일리 트로터’는 늘 ‘역경을 이겨낸 승리’를 제시하며 동물들에게 계속 전진하라는 충동을 설파한다. 성공의 사례는 너무나 극소수였음에도, 새로운 이민자의 물결은 늘 자기는 낫다는, 이전의 어떤 이민자보다 쉽고 안정감 있게 천한 노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품었다. ‘성공하지 못한 것은 네 노력의 부족 탓이다.’ 스노볼이 던지는 정교한 유혹의 언어에 어느새 동조하고 세뇌당한 동물들은 자신들이 물질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여기면서 좀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땅을 소유하려 든다. 계급 격차, 이주 노동자 차별, 무분별한 자연 파괴, 이웃 농장들과의 소송, 세대 갈등, 쓸모없어 버려진 동물들 등 이곳에서도 자유와 평등은 요원하기만 하다.
존 리드가 우화로 풀어놓은 오늘의 자본주의 세상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이상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조지 오웰이 획일화되고, 기계화된 평등이 결코 이상이 이나라고 밝혔듯이 욕망과 자본이 과잉된 사회도 결코 이상이 될 수 없다. 이 책은 그런 현실을 풍자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 동물농장 |
‘동물농장’으로 돌아온 돼지
자본주의 방식의 유토피아?
‘동물농장’ 돼지 영웅 스노볼 불러와…‘조지 오웰 식’ 자본주의 풍자
공산주의가 실패했다고? 그럼 자본주의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 세상의 어두운 면을 알만한 나이가 되어서 비로소 읽을 책
‘스노볼’이 돌아왔다 자본가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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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인터넷, 에어컨이 없는 세상을 생각해본 적 있나요? 우리가 당연한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물건들도 최초에는 역사를 뒤바꾼 혁신적 발명품이었습니다. 유리나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물, 전구조차 없던 세상에서 편리한 현대 세계로 우리를 이끈 것은 누구였을까요?
오늘날 세상의 모습을 만든 건 우리가 이름조차 못 들어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저 재미 삼아 연구하고, 발명해내고, 뭔가를 개선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이죠.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는 현대인의 삶에서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6가지 혁신을 조명하는 책입니다.
탁월한 과학 저술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티븐 존슨은 이 책에서 독특한 시각으로 현대 문명을 만든 위대한 아이디어의 역사를 살핍니다. 이른바 ‘롱 줌(long zoom)' 역사관을 통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혁신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지요.
책에서는 유리, 냉기, 소리, 청결, 시간, 빛이라는 6가지 부문의 혁신을 소개합니다. 이 혁신의 산물을 소개하면서 테크놀로지가 어떤 과정을 통해 생겨나 발전했으며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추적하고 있지요. 각 분야에서 처음 아이디어를 떠올린 사람부터 시작해서 그 아이디어가 어떻게 달라지며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결국 그 아이디어로 인해 인간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설명해갑니다.
예컨대 먼 옛날 어느 사막에서 이산화규소가 우연히 발견되면서 유리가 발명됐고, 인쇄술의 발명으로 안경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유리 제조에도 혁신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안경, 즉 렌즈의 발명은 망원경과 현미경의 발명으로 이어졌죠. 또 망원경의 발명으로 천문학의 발전이 가능했고, 현미경의 발명으로 세균학이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세균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컴퓨터를 만드는 게 가능했을까요? 언뜻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이지만 컴퓨터칩이 어떤 곳에서 생산되는지 생각해보면 의문이 풀립니다. 컴퓨터칩이 생산되는 청정실은 세균이나 바이러스, 사람 몸에서 나오는 피부 세포 등 공기 중에 떠다니는 모든 입자의 발생과 유입이 억제되는 곳이지요. 세균의 발견과 청결과 관련된 부문의 혁신이 없었다면 컴퓨터의 등장은 아마도 불가능했을 겁니다.
이처럼 한 분야의 혁신이 관련이 없어 보이는 다른 분야의 혁신을 끌어내는 현상을 가리켜 저자는 ‘벌새효과(hummingbird effect)’라고 지칭합니다. 벌새효과란, 식물이 꿀을 만드는 방식으로 진화하자 그 꿀을 얻기 위해 벌새가 날개 구조를 진화시킨 데서 유래한 말입니다. 꿀을 빠는 동안 공중에 떠 있어야 하는 벌새는 날개를 위아래로 움직여 꽃 주변을 맴돌 수 있는 비행술을 진화시켰습니다. 식물의 번식 전략이 벌새의 날개 구조까지 변화시킨 셈이지요. 저자는 아이디어와 혁신의 발전 과정에도 이 같은 벌새효과가 적용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9세기 말 미국의 기자였던 제이컵 리스는 빈민가 공동주택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기술로는 어두운 곳에서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습니다. 빈민가 공동주택에는 햇빛이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죠.
당시 미국의 맨해튼에는 1만 5,000가구의 공동주택에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리스는 이런 처참한 실상을 알리고자 노력했지만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열악한 상황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죠. 사진만이 현실을 그대로 포착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때마침 섬광을 이용한 사진술이 개발됐고 리스는 이를 연구하는 데 골몰했습니다. 화약을 이용한 위험한 실험을 계속하며 화재와 실명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그런 고생 끝에 마침내 리스는 빈민가의 처참한 모습을 담은 사진은 찍을 수 있었고 결국 그 사진 한 장이 역사를 바꿨습니다.
리스의 강렬한 사진은 여론을 바꾸는 데 일조하며, 미국 역사에서 사회개혁이 대대적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리스의 사진이 발표되고 채 10년도 지나지 않아, 뉴욕 주는 공동주택법을 제정했습니다. 리스의 사진은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고 공장 작업 현장의 근로 조건을 개선하는 효과도 거뒀습니다. 그야말로 사진 한 장이 미국에서 사회개혁이 시작되는 발판이 된 것이죠.
누군가 빛이 없는 곳에서 사진을 찍는 기술을 처음 발명했을 때 그 기술이 가난한 사람들의 거주 환경을 변화시킬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어떤 분야에서 혁신이 일어나면 그 이후에는 생각지도 못한 분야에서 의외의 결과가 생겨납니다. 이와 같은 아이디어와 혁신의 연쇄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만든 셈이지요.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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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으면 숨 쉰다. 그런데 숨이 쉬면, 쉬어버리면, 그건 죽음이다. 숨 쉰다는 표현으로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겠다는 짐작을 해본 적이 있다. 살아도 산다는 게 뭔지 잘 모르고, 죽음은 더 모른다. 목숨이 멈춘다는 것 외에,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우리에겐 없다. 알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죽음을 마냥 두려워한다. 베스트셀러 <미움받을 용기>로 젊은이들의 눈치 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응원한 기시미 이치로가 이번엔 나이 먹는 모든 이를 성원한다. “저승이란 좋은 곳 같다.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다”(소설가 다카야마 후미히코)는 침착한 말로 불안을 녹여주면서.
지은이는 프로이트, 융과 함께 심리학 3대 거장으로 불리는 알프레트 아들러 연구의 대가다. 이번 책도 아들러 심리학에 뿌리를 뒀다. 동일본 대지진, 후쿠시마 원전 사고라는 사회적 경험과 심근경색으로 임사 상태까지 갔던 개인적 경험을 한 뒤에 썼다. “이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에게서 ‘생로병사 심리학’이 나왔다.
우선 지은이는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서 ‘개인’(individuum)의 정의를 분명히 한다. 라틴어로 개인은 ‘분할할 수 없다’(in-dividu-um)는 뜻. “아들러 심리학의 인간은 사회라는 맥락 속에 비로소 개인이 된다.” 단독으로 태어나긴 해도 생로병사는 혼자만의 과업이 아니란 점이 아들러 심리학의 각별함이다. 늙음으로 열등감을 느끼는 건 몸의 노화뿐 아니라 사회 주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점 때문. 하지만 “특별한 일을 못하는 늙은 사람도 그 존재만으로 타인에게 공헌할 수 있다”는 용기를 낸다면 지역사회, 나라, 더 넓게는 자연과 우주에 기여할 수 있고, 소속감은 더 팽창된다.
지은이는, 질병은 몸이 걸어오는 말이라고 본다. “병이라는 몸의 말에 응답하는 책임도 용기가 필요하다. 쾌유는 그 몸의 말에 책임을 다한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 또한 “병이 든 이후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다면, 그 자체가 병에 걸린 것의 의미”이다. 죽음은 “어떤 점에서 구원”이다. 아무도 안 죽는데 혼자만 죽는 경우는 다행히도 없으니까. 지은이에게 죽음이란 “책임질 용기가 필요한 인생의 참된 과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삶의 방식 ‘에네르게이아’는 아들러 심리학의 키워드다. 에네르게이아는 ‘지금의 과정 자체를 결과로 보는 운동’을 말한다. 불처럼 환할지, 흙처럼 따뜻할지, 바람처럼 부드러울지 모르는 죽음을 두려워해 ‘지금, 여기’를 망치면 안 된다.
인간이 생장하는 시간은 20년이 채 안 되고, 평균수명대로 산다면 대부분의 시간이 병들고 늙는 데 쓰인다. 삶을 이해하는 데 피어남보다 시듦이 더 중요한 구실을 하기라도 하는 듯. 노인이 되지 못한 때이른 죽음들도 적지 않다. 어찌 보면 늙음은, 다수가 누릴지라도, 예외적인 복이다. 아프고, 늙고, 죽어가는 난마의 과정을 빗어주는 이 책은, 다시 삶을 향한다. 꽃송이째 진다는 동백꽃을 볼 때마다 대지진 희생자들을 생각한다는 지은이의 말. “산 채로 떨어진 꽃 숱하다고 어찌 다시 생을 맹세하지 못하리.”
늙어갈 용기 |
나이드는 데도 용기가 필요해…‘인생 후반전’ 어떤 마음 가져야 할까
타인의 시선 벗어나 유쾌하게 나이 들어가려면
잃어 버린 젊음을 한탄할 것인가, 남은 시간에 공헌할 것인가
늙는 게 두려운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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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흑인가수 에드윈 스타가 불렀던 ‘워(War)’라는 노래가 있다. 베트남전 당시 인기를 끌었던 반전(反戰) 노래였다. 1986년 체르노빌에서 원전 사태가 터진 이후, 역시 미국의 가수인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리바이벌해 다시 인기를 끌었다. ‘전쟁! 무엇에 이롭단 말인가?(War! What is it good for?)’라고 시작하는 노래다. 저자는 바로 그 첫머리에서 이 책의 제목을 빌려왔다. 책의 원제는 <War! What is it good for?>이다.
그렇다고 이 책을 반전 사상을 피력하는 평화주의자의 저술로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오히려 정반대다. 저자는 노래의 가사를 인용하면서도 그 내용에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그는 1970년대의 솔 가수가 절규하는 창법으로 외쳤던 의문문에 대해 “아무렴, 이로운 게 많지. 전쟁이야말로 인류에게 평화와 번영을 선물했어”라고 답한다. 바로 그렇게, 인류의 삶에 기여한 ‘축복의 이벤트’로 전쟁의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이 책의 관점이다. 저자는 “노래 가사와 달리 전쟁은 순기능을 지닌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전쟁은 인류를 좀 더 안전하고 부유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미국 스탠퍼드대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의 첫 문장에서 “대한민국은 전쟁의 산물”이라는 주장마저 서슴없이 펼친다. 물론 의도적 도발로 읽히는 대목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냉전이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 역시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50년 전 일반적인 한국인들은 아프리카인 평균보다 겨우 조금 잘사는 수준”이었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은 전 세계적으로 소득 수준 8위의 국가”이며, 그것은 전쟁과 냉전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책의 논지에 따르자면, 한국어판 제목인 ‘전쟁의 역설’은 적절한 의역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전쟁으로 인해 인류는 여러 가지 혜택을 받아왔다는 것인데, 저자가 가장 먼저 거론하는 것은 폭력으로 인한 사망이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석기시대 동안 폭력은 아주 일상적이었다. 열 명 중 한두 명은 폭력으로 사망할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1만년 이후부터 인간들이 치러온 전쟁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승자는 패자를 집어삼켜 더 큰 사회를 만들었고, 더 강한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폭력을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 가두었다. 이렇게 해서 현재의 세계는 아주 강력한 기관들로 구성된 큰 사회를 이룰 수 있었다. 이들의 힘으로 2015년 현재 평균적으로 폭력에 의해 사망할 확률은 100분의 1 이하로 떨어졌다.”
저자가 제시하는 거시적 통계학은 매우 불편하다. 이를테면 20세기에 들어와 발생한 전쟁은 과거와 완전히 양상이 달랐고 엄청난 숫자의 인명이 희생됐다. “두 번의 세계대전, 거듭된 대량 학살, 잘못된 정책으로 인한 기아 등으로 무려 1억~2억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1만5000명 이상의 시민이 죽었는데, 이는 아마도 기원전 5만년쯤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죽은 사람보다 많을 것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해석도 긍정적이다. “폭탄이 떨어진 1945년에는 지구상에 25억명 정도가 살고 있었으며, 20세기 전체를 살았던 사람들을 따지면 대략 100억명 정도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과 관련해 죽은 1억~2억명 정도는 지구 전체 인구의 1~2%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운좋게 산업화된 20세기에 태어났다면, 석기시대에 태어난 것보다 폭력이나 그에 따른 부차적인 결과로 사망할 확률이 10배는 적다는 이야기다.”
물론 저자도 미시적 안목으로 보자면 전쟁은 지옥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전쟁 이후의 과정은) 지저분하고 공평하지 못했다. 승자는 생포한 이들을 노예로 팔아먹고 수탈하면서 강간과 폭력을 자행했다. 반면 패자는 몇 세대에 걸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기도 했다. 끔찍하고 추악한 비즈니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인류가 찾아낸 유일한 방법”이 전쟁이라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전쟁 이후 “군수품 공장은 병원이나 보육을 위한 시설로 개조”됐으며, 히틀러를 상대로 2차대전을 치른 서유럽인들은 “큰 정부야말로 가난, 부당함과의 전쟁 등에서 승리를 이끌 수 있다고 기대하면서, 정부를 강압의 존재가 아니라 자유의 수단으로 보게 됐다”는 것이다.
1만년이라는 거시적 앵글로 ‘전쟁은 인류에게 유익했다’는 도발적이고 불편한 주장을 펼치는 책이다. 물론 저자도 책의 후반부에서 지금까지 이어져온 ‘전쟁의 역설’이 앞으로는 별로 가능할 것 같지 않다고 예견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 책의 부차적 논지일 뿐이며, 뭔가 구차한 덧붙이기라는 느낌마저 든다
전쟁의 역설 |
참혹한 전쟁 후…인류는 더 안전하고 부유해졌다
전쟁은 인류의 축복…대한민국도 전쟁과 냉전이 만들었다
평화는 전쟁의 산물…“원시는 대량학살의 시대였다”
2차 세계대전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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