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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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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의 언어로 남은 시인, 김지하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2022년 5월 8일)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살림의 언어로 남은 시인, 김지하—별세 3년, 오늘 그를 다시 기억하며김지하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3년이 흘렀다.2022년 5월 8일, 강원도 원주의 집에서 향년 81세로 생을 마감한 그는지금도 여전히, 이 땅의 언어와 양심 속에서 살아 있다.그는 시인이었고, 사상가였으며, 시대의 양심이었다.1941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한 뒤1970년대 초 시 「오적」으로 세상의 위선을 벼렸다.권력과 재벌, 언론, 종교를 신랄하게 풍자한 그 시 한 편으로 그는 감옥에 갇혔다.하지만 철창 속에서도 그는 언어의 무기를 놓지 않았다.그가 남긴 「타는 목마름으로」는 자유를 향한 갈망의 상징이 되었고,..
김지하의 글씨와 그림에 서린 절절한 울림 - 김지하를 추도하며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2022년 5월 8일)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김지하를 추도하며 ⑫김지하는 글씨와 그림에서도 당신의 시 못지않은 독특한 예술세계를 보여주었다. 글씨보다 그림으로 더 잘 알려져 있고 또 그림에 더 열중하였지만, 사실상 그의 그림과 글씨는 둘로 나누어지지 않았다. 그의 그림에는 반듯이 거기에 걸맞은 화제를 들어감으로써 작품으로서 완결미를 갖추었으니, 서화(書畵)가 일체로 되는 세계였다.김지하의 글씨는 그의 시와 마찬가지로 기존의 정형과 법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글자의 크기가 일정치 않고 한 글자 안에서도 강약의 리듬이 강하다. 그의 난초 그림 중에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이라는 화제가 쓰여 있는 작품이 있다. 풀이하여 ‘잘 되고 못 됨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명사상가 김지하 시인을 추모하며 - 김지하를 추도하며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2022년 5월 8일)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김지하를 추도하며 ⑪유신시대 나의 대학시절은 시작부터 암담했다. 겨우 미술대에 입학은 했어도 미대 커리큘럼과 학풍이 싫었다. 그러다가 자유를 향한 저항의 시들을 만났다. 담시 ‘오적’은 김수영의 시와 수필에 매료되었던 청년학생에게 또 다른 신선한 공기 같았다. 현대문학에선 외면한 운문적 설화문학과 이어지면서도 자유로운 시로 보였다. 동아일보 투고 「1974 고행」, 김지하가 주필인 미술선언문 ‘예술은 현실을 반영한다.’ 등은 암담한 예술학도에게 어두운 밤길 후레시 같았다.저 암울하고 공포스러운 유신시대 미술대학 생활에서 희망의 빛은 탈춤 풍물 마당극 같은 마당예술이었다. 그러나 전통문화에서 미래문화를 눈뜨게 한 것은..
부용산 넘어 생명의 길로! - 김지하를 추도하며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2022년 5월 8일)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김지하를 추도하며 ⑩지하형님께서 이승을 떠나신 후 49재 되는 날, 남은 사람들이 형님의 혼령을 편안히 보내드리고자 정성으로 모였습니다.돌아보니 형님과의 만남인연, 시절인연이 어언 51년이었습니다.1971년, 노동자 조직 20만 명이라는 큰 뜻을 가운데에 놓고 원주 봉산동 장일순 형님 댁에서 만났습니다.곧바로 가까운 동네가게로 옮겨가서 소주를 대여섯 병 마셨지요.그때는 기본이 2병,노동자 조직보다는 작품구상 얘기가 호기롭고 장쾌하였지요.세월은 빠르고 세상은 소연한데 마음은 처연합니다.가뭄과 폭염을 걱정하며 숲을 바라보니, 바람에 나뭇잎만 흔들릴 뿐...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는 정해진 이치를 왜 모르겠..
주님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감당할 자 누구리이까 - 김지하를 추도하며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2022년 5월 8일)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김지하를 추도하며 ⑨“하느님! 주님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감당할 자 누구리이까?”(시편 130,4)우리는 오늘 이곳 천도교당에서 김지하 시인을 기리며 인내천(人乃天)의 가르침을 되새깁니다.저는 1970년 6월 로마 유학시절, 노동신문에 실린 ‘오적’을 읽었습니다.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고발한 판소리 가락의 이 담시는 힘 있고 흥이 넘친 그러나 무섭고 날카로운 예언자적 고발 문학이기도 했습니다. 먼 이국땅에서 우리는 조국과 하나된 마음으로 이 담시를 판소리 음률에 맞추어 크게 읊으며 기도 했습니다.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지학순 주교님과 함께 우리 사제들의 귀에 익은 김지하 시인,..
흰그늘의 미학행, 향아설위의 자리 - 김지하를 추도하며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2022년 5월 8일)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김지하를 추도하며 ⑧1.무당은 신의 일을 행하는 자라고 스스로 그럽니다.신의 일을 하던 이가 돌아가셨으니 이제 누가 그 일을 하여야 하는 것인지요?노겸 김지하 시인은 살아생전, 이도 저도 발붙이지 못하고 죽어 떠도는 ‘찢어진’ 중음신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중음신으로 살던 이가 이제 돌아가셔서 중음신이 되어 떠돌고 있습니다. 살아 중음신이 죽어 또 중음신이 되었으니, 이 노릇을 어찌 할 것인가요? 중음신의 중음신이니, 풍자인가요? 해탈인가요? 역려(逆旅)인가요? 살아남은 자는, 남녘땅 사람들은 언제나 비통하고 억울하고 참담합니다. 거듭되는 고통과 고난과 폭풍우의 바다에 어디라 정착도, 침몰도 못하고 떠도..
시인 김지하와의 52년 - 김지하를 추도하며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2022년 5월 8일)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김지하를 추도하며 ⑦ 시인 김지하 씨와 이별을 하기 위해서, 저는 서울에 왔습니다. 깊은 회한을 품고 김지하 씨가 없는 서울에 왔습니다.긴 침묵을 계속한 채 홀로 세상을 떠나버린 시인! 왜 그랬는지 묻는 것조차 불가능한 현실이 나를 움츠려 꼼짝 못 하게 합니다. 발길이 무거운 “서울길”이었습니다.제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깨닫게 되는 이 나라에 대한 사랑, 여기에서 사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김지하씨의 작품을 통해서 내 몸속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김지하 씨와 나의 관계는, 시종 말과 함께 있었습니다.중앙공론사(中央公論社)의 편집자였던 내가 1970년 6월, 편집실 한구석에서 읽던 “주간 아사히”(週刊朝日)에 한국의 ..
시인 김지하가 남긴 것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2022년 5월 8일)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그림을 좋아하는 청년이었다.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미술대학은 가지 못했지만, 어깨너머로라도 그림을 배우고 싶어 선택한 게 미술대학 옆 미학과였다. 허나 삶은 항상 제멋대로 길을 내기 마련이다. 시대의 울음에 그는 펜을 들었다. 모든 것을 내놓고 시를 썼다. 그렇게 청년 김영일(金英一)은 시인 김지하(金地下)가 됐다. 김지하(金芝河).「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등의 시로 1970년대 저항문학의 상징이 됐던 김지하 시인이 향년 81세로 지난 5월 8일 강원도 원주 자택에서 타계했다. 그의 부고는 나라 안팎의 탄식을 자아냈다. 한 시대가 저물었구나. 그를 사랑했던 이, 그가 안쓰러웠던 이, 그와 반목했던 이, 그에게 실..
여기까지 다들 애썼다! - 김지하를 추도하며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2022년 5월 8일)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김지하를 추도하며 ⑥이제 우리 나이 팔십이 되었지만 나는 몇 년 전부터 주위의 경조사에 참례하지 않게 되었다. 수년 동안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글 쓰며 은거했고, 칠십 대 중반쯤에 부모님 유해를 납골당에 모시고 제사도 폐하면서 저절로 남의 장례식장에도 발길을 끊게 되어버렸다. 옛사람도 늙은이가 되면 인편으로 부조나 보내면서 바람결에 지인을 떠나보내던 것이다.아난다여, 나는 피곤하다. 눕고 싶구나.석가모니의 마지막 장면이다. 깨달음을 얻었을 때 마셨던 우유 한 잔과 죽음의 원인이었던 버섯 몇 개는 똑같은 타인의 공양물이었다. 죽음은 내가 걸어가는 이 길의 ‘저 모퉁이’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길의 끝이 ..
김지하 시인의 그림자 뒤에 엎드려 울다 - 김지하를 추도하며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2022년 5월 8일)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김지하를 추도하며 ⑤1. 아, 슬프다! 김지하 시인이 지상의 나날을 헤치고 간 서사는 도대체가 황망하기 짝이 없다. 온통 파란만장뿐이요, 온통 적막강산뿐이었다. 한 번도 그 앞에 엎드릴 틈을 주지 않았다. 나는 거기서 얻은 생채기 하나를 지금도 젊은 날의 화인처럼 가슴에 새겨놓고 있다.영원히 지우지 못하리라. 2. 31년 전 딱 이 무렵이다. 김지하 시인이 조선일보에 하고 외칠 때 나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청년위원회 부위원장이었다. 정말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 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청년위원장은 ‘노동해방문학’으로 수배 중이고, 한국 지식인 사회는 소위 ‘문명사적 대전환기’라는 유행어 아래 극단의 침체기에 빠져들고 ..
김지하, 수난과 구도의 삶을 기억하며 - 김지하를 추도하며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2022년 5월 8일)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김지하를 추도하며 ④돌이켜보면 1960년대 중엽 김지하를 처음 알게 됐을 때 그는 두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박정희 정권의 대일 굴욕외교를 반대하며 궐기한 학생운동 속의 모습이었습니다. 학교를 갓 졸업하고 어느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던 나는 근무가 끝나면 복학한 친구들을 만나러 동숭동의 농성현장으로 가곤 했었지요. 그때 김지하의 쉰 듯한 목소리가 뿜어내는 뜨거움을 나는 화상(火傷)의 위험처럼 느끼며 외곽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가정교사로 숙식을 해결하며 주로 서구문학의 좁은 울타리에 갇혀 지내온 나 같은 사람의 눈에는 당시 학생운동의 주역들이 외친 민족문제의 심각성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청맹..
김지하는 암흑시대를 밝힌 촛불 하나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2022년 5월 8일)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김지하 시인의 갑작스러운 부고에 문단 및 문화계 인사는 큰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들에게 김지하는 촛불이었고, 민족 예술 1세대의 대선배였으며, 한편으로 인간 생명을 재해석한 시인이자 철학자였다. 시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문화계 인사 4인의 육성(肉聲)을 싣는다.●이문열(소설가)젊은 시절 내 소설 ‘황제를 위하여’를 읽고서 보자고 해 만났다. 그때 난초 한 포기를 그려준 것이 첫 만남이었다. 술자리에서 “사람들이 자꾸 나보고 내가 죽기를 바라는가보다, 왜 죽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거 같다”면서 그는 괴로워했다. ‘한때 헹가래를 받으며 솟구쳤다가 다시 떨어져 냉담한 대접을 받는 사람 기분이 이렇겠구나’ 생각했다. 2005년..
지하 형님의 추억, 그리고 작별 - 김지하를 추도하며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2022년 5월 8일) 본명은 김영일(金英一)김지하를 추도하며 ③—이동순 시인1. 담시 ‘오적’이 준 충격1970년 가을 어느 날, 마침 정주동 교수의 ‘홍길동전’ 수업을 마치는데 진보적 서클 현대사상연구회의 멤버인 동기 K가 상기된 얼굴로 무언가를 돌렸다. 그것은 프린트 등사본으로 된 김지하 시인의 담시 ‘오적(五賊)’이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거친 갱지에 인쇄된 작품의 어법은 당차고 소름이 돋았다.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김지하로 가는 길 - 김지하를 추도하며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2022년 5월 8일) 본명은 김영일(金英一)김지하를 추도하며 ② —정지창 평론가·전 영남대 교수김지하(金芝河), 뭇생명의 숨통을 틀어쥐고 있는 죽임의 문화에 온몸으로 저항한 비극의 주인공이 마침내 무대에서 퇴장했다. 1941년부터 2022년까지 그는 동학농민군의 마지막 생존자로, 분단된 한반도의 남쪽에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새 하늘 새 땅’을 찾아 헤매었으나, 끝내 그가 갇혀 있던 감옥을 탈출하지는 못했다. “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 / 등에 꽂은 초라한 한 사내”(「1974년 1월」)의 이마에는 슬픔과 고통과 투쟁과 명예와 패배와 배신의 낙인이 찍혀 있다.「황톳길」과 「타는 목마름으로」를 비롯한 빼어난 시편들을 절규처럼 토해낸 저항시인, 「오적(五賊)」을 비..
타는 목마름으로, 지하를 다시 생각한다 - 김지하를 추도하며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2022년 5월 8일) 본명은 김영일(金英一)김지하를 추도하며 ①—도올 김용옥 T. S. 엘리엇의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에 잠기곤 한다. “우리에게는 엘리엇보다 더 훌륭한 시인이 있었다.”시인을 놓고 누가 누구보다 더 위대하다는 말을 할 수는 없는 이야기이지만, 최소한 시라는 것은 일상적 언어가 미칠 수 없는 감정이나 느낌의 향연이 바로 지금 여기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시의 자격이 없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 향연을 위해 일차적으로 필요한 사태는 언어의 공유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한국인의 시는 한국어로, 다시 말해서 한국인의 마음으로 쓰이지 않으면 안 된다.그렇다고 엘리엇의 시가 단순히 영어로 쓰였다는 이유로 김지하의 시보다 ..
김지하를 보내며…“구성지게 부르던 ‘부용산’ 들려주고 싶구려”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2022년 5월 8일)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고 김지하 시인을 보내며—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1983년 7월 초순 민주화운동의 전국연합조직 결성을 위해 원주 지역 대표자를 논의하고자 구룡사 계곡에서 만났을 때 모습이다. 그때 원주에서는 이창복 선생을 추천했다. 오른쪽부터 장일순 선생, 이부영 민중민주운동협의회 공동대표, 최열 공해추방운동연합 대표, 김지하 시인. 최열 대표 제공김지하 시인이 떠났다. 함부로 입에 올리기를 삼가야 할 김지하가 떠났다. 내게 그의 추도사를 써달라고 요청이 오기까지 여러 곡절을 거쳤으리라. 써야 할 사람이 사양하는 일들 말이다. 내게는 그 요청이 오면 거절할 수 없는 지엄한 이유가 있다. 그의 오늘이 있도록 만든 원인 제공자였기 ..
독재에 맞섰던 ‘투사 시인’ 김지하 별세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2022년 5월 8일)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의 김지하 시인이 8일 별세했다. 향년 81. 김지하 시인은 최근 1년여 동안 투병 생활을 한 끝에 이날 오후 강원도 원주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토지문화재단 관계자가 전했다.김지하 시인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과 폭력에 온몸으로 부딪친 투사이자 전통 사상의 현대적 재해석을 통해 선구적 생명사상을 설파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반독재 투쟁을 벌이다가 7년을 옥에서 보낸 그는 그러나 1991년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이어진 학생·청년들의 분신자살을 질타하는 칼럼을 에 실었으며,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는 자신을 탄압했던 독재자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 지지를 선언함으로써 ‘변절’ 논란..
도(道)를 아시나요? ... 개뿔 나이를 먹으면 모두가 道를 찾는다. 지하가 그러하고 신중현도 , 으로 道를 말했다. 보다는 에서 그의 道에 대한 생각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꼭 현재를 빗대어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외수옹의 행보도 道를 의식(?)한 것으로 느껴진다. 나도 나이를 먹지는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道에 관심이 많았다. 노자를 좀 더 알고자 하였다. 지금도 진행중이다. 왜? 나이를 먹으면 道를 찾는 것일까? 아니면 道가 나이든 사람만 수용이 가능한 것인가? 이같은 쓸때없는 의문이 내 머리를 사로잡고있다. 문득 장정일의 예전 책을 뒤적이다가 道에 대한 의문점을 시니컬하게 말하는 대목을 보았다. 노장사상이나 자연에 대한 경도는 반체제 성향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것을 의식화할 수 없었던 사람이 밟게 되는 자연스러운 행보. - 71쪽 ..
책을 어떻게 읽었나 - 2009. 10 10월에는 5권을 읽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76권을 읽었으니 100권을 올해는 채우기가 어려워 보인다. 5권 구매하고 지인과 서평단에서 9권을 받다. 지금까지 83권을 구매하고 66권을 얻었다. 몇 권 읽지도 않고 읽은 책을 평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고 나자신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또한 이번에 읽은 책은 그리 나쁘지 않은 책이었다.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진 책이다. 오랫만에 지하의 책을 보았는데 대담집이다. 박식함은 알지만 너무 한쪽으로만 흐르는 그의 담론에 100% 공감하기는 힘들다. 톨스토이의 는 꼭 읽기를 권한다. 책도 읽지 못하고 리뷰도 작성못했으니 시간이 없어서라는 핑계는 어느 것에도 적용되기 힘들다. 그럼에도 5권을 구매하였다. 책을 사지않아야 하는 상황이지만 또 책장을 힘들게 하였다. 더불어 ..
2009. 06. 03 - 보고 듣고 느낀 한마디 01_ 꿈꾸는 서재를 보니 "책방주인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면 술집주인은."라고 묻는다. 나는 아니다. 정말 행복할까? 다시 곰곰히 생각해 보아도 답은 '아니다'. 02_ [김지하 칼럼] 나의 이상한 취미를 보면 얼마전 내가 한 말이 정확히 맞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기들이 바라든 바라지않든 간에 한 방향으로 흘러 지내왔다. 소몰이꾼이 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하여 앞에 세운 한마리의 소는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한다. 03_ [진중권 칼럼] 유인촌 장관에게 묻는다 문화부는 '인터넷 낭인'들의 꼭두각시인가 를 보았다. 유인촌에게 대한 정면 승부다. 이것을 위하여 진보신당도 탈퇴를 하여고 한 모양이다. 04_ 앱스토어 무료SW, '새 수익모델 급부상' 모바일도 PC의 전개방법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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